(19분이라는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기에는 꽤 긴 시간이지만, 뭔가를 하기에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여행의 막바지에서 그 짧은 시간에 급박한 시도를 해야 할 일이 발생했다.)
알람을 5시 30분에 맞춰 두었으나 눈을 뜨고 휴대폰을 켜니 4시 50분이었다. 요통이 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K를 괴롭게 했다. 좀 더 잠을 청해볼까 하다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YTN에서는 우크라이나 전황과 코로나 확진자 현황을 전하고 있었는데, 어제 자기 전에 본 것의 재탕이었다. 밤사이 국외든 국내든 새로 큰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건전지가 다 닳았는지 리모컨의 각도를 잘 맞추지 않으면 채널 변경이 잘 안 되어 짜증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채널을 바꾸며 볼 만한 프로를 찾아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을 찾을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나는 자연인이다] 재방송을 한 삼십 분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설 떠날 채비를 해야겠군.
신음소리를 참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욕실로 향했다. 오줌을 누고 또 대충 세수도 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따로 아침을 먹을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어젯밤에 먹다 남아 냉장고에 넣어둔 게맛살과 탁자 위에 둔 빵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한 달도 더 전에 시작된 허리 근육통은 요 며칠 무리한 탓에 그저께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욱씬거리는 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배에서 내려 면내로 걸어 들어오는 길에 진통제 주사라도 맞을까 해서 섬의 유일한 병원에 들렀으나 방호복을 입은 남자가 정형외과가 없다고 무뚝뚝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오고 말았다. 다른 과에 들러서라도 처방을 받았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던 것이다. 면내를 걷다가 한의원을 한 곳 발견했으나 폐업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인터넷에는 한의원이 한 곳 나와 있었으나 면내가 아니라 찾아갈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의외로 마사지 숍은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아픈 부위를 집중적으로 마사지를 받았지만 별로 효과가 없고 지나친 자극으로 오히려 통증을 키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상황에 이 먼 곳으로 오다니, 나도 참. 자업자득이 따로 없군. 그래도, 두무진은 정말 절경이었지. 울릉도의 대풍감이나 소매물도의 등대섬과는 또 다른 느낌. 거제 해금강의 해식절벽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좀 있고. 안내문엔 홍도의 기암괴석과 태종대의 절벽을 합쳐놓은 것 같다는 말도 있었지. 어쨌거나 명승임에는 틀림 없고, 두무진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고유한 매력이 있는 듯해. 파도가 거셌던 것도 좋았던가? 물거품이 허공에 부유하던 모습도 인상적이었어. 어제는 그 생각을 미처 못했는데 해상에서 해안절벽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더라면 웅장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크기만 한 백령호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중화동교회 옆의 이름 없는 담수호를 한 바퀴 걸은 것은 참 좋았어. 대청도가 바라다보이는 바다, 야산과 어울려 엮어내는 그 고즈넉한 풍경. 그 쓸쓸하고도 고요한 풍경을 카메라를 들고 천천히 걷고 있는 나. 용트림바위에서 추위에 떨며 본 일몰은? 그 붉은 빛에 꽂힐 수도 있겠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아니, 엄마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짐을 꾸렸다. 바지를 입는 것이 힘들어 누워서 입어야 했는데, 무엇보다 양말을 신는 것이 고역이었다. 앉아서 허리를 숙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누워서 양말을 발에 꿰는 것부터 상당한 통증을 감수해야 했다. 배낭을 챙겨 한 쪽 어깨에 걸치고 마지막으로 호텔 방을 한 번 쭉 훑어본 다음 신발을 신고 카드키를 뺐다. 요즈음엔 이름만 모텔에서 호텔로 바꾼 곳이 많은데, 이 호텔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숙박비도 모텔보다 1,2만 원 비싼 정도였다. 3년 전 울릉도에 갔을 때 놀란 것 중 하나는 모텔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전부 호텔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당시 묵었던 호텔들이 가격은 모텔 수준이요, 시설면에서는 오히려 모텔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따로 키를 놓는 함이 없어서 어둠에 싸인 일층 프런트에 카드키를 올려놓고 호텔 문을 나섰다.
차에 시동을 걸고 후진으로 차를 돌리는데 렌트카에는 후방카메라가 없어서 차를 돌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6시 23분. 여기서 터미널까지는 백령로를 따라가면 십 분이 채 안 걸릴 터이니 시간은 넉넉했다. 미지의 섬이었던 이곳이 3일 째라고 제법 친숙해진 느낌이었다. 주위는 아직 어두웠고 도로에는 차도 거의 없었다. 병원 바로 옆에 있는 주유소도 아직 불이 꺼진 채였다. 주유소는 24시간 운영이 기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요즈음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시골의 주유소는 그렇지 않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기름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내비에 뜬 주유소 표시만 믿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 보면 이미 문을 닫은 경우가 허다했다. 저녁 7시가 되기도 전에 닫는 곳도 있었고, 휴일이라고 문을 열지 않는 곳도 있었다. 사정이 그러니 아침 일찍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어제저녁 호텔로 가는 길에 기름을 가득 넣어 둔 건 잘한 일이야.
어제아침에 차를 렌트할 때만 해도 오늘 오후 한 시 반 배를 타고 떠날 계획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차를 렌트했는데, 직원인지 아니면 사장님인지 차를 몰고 온 여자분은 통상 24시간 단위로 대여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몇 시간 더 쓸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자차 보험이 비싼 데다 사고날 위험은 거의 없으니 가입할 필요가 없고, 차도 터미널 앞 주차장에 세워 두고 가면 된다고 상당히 쿨하게 말했다. 거기다 기름도 가득 넣어 가지고 왔으니 반납할 때 가득 넣어서 반납하라고. 그리고, 이분은 그날은 배가 뜨지 못하지만, 오늘은 배가 뜰 거라는 말도 했다.
그걸 알려주는 데가 어디지?
서해 서북단 끝에 위치한 이 섬에 오려고 그 전날 배편을 알아보니 강풍으로 배가 뜨지 않는다고 했다. 출발 당일 새벽에 여객선 터미널로 전화를 해보았더니 전날 들었던 메시지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고, 그래서 K는 출항 가능 여부도 모른 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지하철을 탔던 것이다. 두 시간 가까이 지하철을 타느라 허리 통증에 시달렸고, 또 네 시간 반 가량 여객선을 타고 오느라고 허리를 혹사, 섬에 도착한 당일은 관광이고 뭐고 일찌감치 모텔을 잡고 끙끙 앓아야 했다. 그래도 어제 하루 부지런히 돌아다녔더니 웬만한 곳은 다 돌아본 듯해 아침 7시 배로 떠나기로 계획을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온 참에 부근에 있는 대청도와 소청도도 한 번 들르면 좋을 듯했으나, 빨리 서울로 돌아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다섯 시간 이상을 통증에 시달리며 배를 타고 갈 생각을 하니 타기도 전부터 괴로움이 밀려왔다. 기름을 넣고 난 다음, 렌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출발 시간을 바꾸겠다고 하자, 아무래도 혼자 운영하는 렌트 회사인 듯 직원이자 사장님인 아침의 그 여자분이 "그럼, 저녁에 기름을 가득 넣어 두세요"라고 했다.
[용기포신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여 빈 곳에 차를 주차하고는 여자분이 알려준 대로 키를 차 안에 두고 매표소로 향했다.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려는 승객들로 터미널은 다소 부산했다. 최전방답게 그 중 다수가 군인이었다. 하지만 매표소 앞에는 서너 명밖에 줄을 서 있지 않아서 금방 표를 살 듯했다. 그런데, 요금을 지불하기 위해 휴대폰 케이스를 펼친 순간,
맨 아래에 꽂아둔, 주로 사용하는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빠트린 것일까? 호텔에서 카드로 계산을 했으니 그때까진 있었단 말인데.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우선 표를 구입하는 것이 급선무여서 신분증을 제시한 뒤 일단 다른 카드로 결제를 하고 전화 번호도 불러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일단 표는 구입했으니 서울로 돌아간 다음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분실신고를 하는 수밖에. 좀 귀찮긴 하겠지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6시 41분이었다. 출발까지는 정확히 19분이 남은 시각이었다.
K의 뇌가 갑자기 우사인 볼트의 속력으로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호텔 방 안에 두고 나온 것일까? 아니, 어제 호텔에서 카드로 계산한 다음에 그걸 돌려받은 기억이 없구나. 빨리 달리면 7분 안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는데. 19분 안에 갔다 올 수야 있겠지만, 승선은 십 분 전까지인데. 간다고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지, 뭐.
포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가만히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도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래, 가다가 그냥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발하자.
따지고 재고 할 시간이 없었다. 재빨리 차로 달려가 시동을 걸었다. 도로는 여전히 한산했고, 앞쪽에 차가 한 대 서행하자, K는 가볍게 그 차를 추월했다. 요통에 시달리던 중늙은이가 갑자기 영화 속의 첩보원으로 변신한 듯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야.
가다 보니 어느새 호텔 앞이었다. 이때 시각은 6시 48분. 정말 정확히 7분 걸렸다. 로비 앞에 차를 주차하고는 호텔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로비는 여전히 어둠에 싸여있었다. 프런트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자, 여자분이 졸린 목소리로 다소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어제 투숙한 사람인데, 카드를 찾으러 왔는데요."
"무슨 카드요?"
"어제 계산을 하고 카드를 받지 않은 듯해서요."
확신이 서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초지정을 설명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여자분은 "잠시만요" 하더니, 프런트 안쪽에서 이내 문을 열고 나와 카드단말기를 확인하더니
"아 여기 있네요. 내 정신 좀 봐. 미안합니다."
카드를 돌려주지 않은 년이나, 안 돌려준 것도 모르는 놈이나.
그녀를 붙들고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었다. 카드를 받아 든 K는 다시 차를 향해 달려나갔다.
차야 달려라. 내가 간다.
일단 카드를 회수 했으니 이제는 출항 시간 전에 최대한 빨리 탑승구에 도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래도 안전이 제일이야.
폭풍질주. 차가 병원 옆을 지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가?
마음이 급한 가운데에도 전화를 받았다. 렌트카 여자분이었다.
"승선하셨지요?"
"아 예 지금 터미널에 다 와 갑니다. 일이 좀 생겨서. 미안하지만 전화 끊을 게요."
6시 53분.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니 지금 시간에 몇 신데. 지금 어디에요."
"터미널에 다 왔어요. 급해서, 설명할 시간이 없어서, 조금 있다 전화 드릴게요."
"차 잘 세워 두세요."
6시 56분. 차를 대충 주차하고 키를 좌석에 던져 놓고 배낭을 걸치고 탑승구로 향하는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 여자가 미쳤나?
화가 난 K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슬쩍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니 다른 번호였다.
"어디 계세요. 배 안 타시나요?"
터미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바쁜 와중에도 놀라운 전자 처리 시스템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K는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터미널에 있어요. 지금 탈 게요."
"터미날이라고요? 빨리 승선안 하고 뭐 하세요?"
K는 전력질주를 하다시피 탑승구를 향해 달려간 다음 개찰을 하고 배에 올랐다. 그리고, 휴대폰을 보니 6시 57분이었다. Mission Accomplished.
K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있는 가운데 여객선은 서서히 항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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