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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대선전

by 길철현 2022. 2. 18.

오미크론이 무섭게 확산되는 가운데 20대 대선 투표일이 2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는 투표.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일곱 번의 대선에서 나는 나의 권리를 한 번도 빠짐없이 행사하였고, 그중 두 분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유력 후보 두 분 다 믿음이 가지 않고 차악으로 보기도 힘들어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할까 심히 고려중이다(주1). 코로나에 따른 비상시국인데도 온갖 네거티브와 가짜 뉴스, 그리고 후보자는 물론이거니와 전에 없이 배우자에 대한 각종 의혹 등이 선거판 자체에 염증을 불러온다. 

 

선거에서 투개표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민주주의의 초석이 놓인 국가라고 할 때,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실제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로 진입하게 되었을까? 해방 후의 대표적인 선거 부정행위는 1960년 3월 15일에 있었던 [4대 대통령선거]와 [5대 부통령선거]이다. 이 부정 선거는 잘 알다시피 419 혁명을 불러와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419 혁명으로 대통령에 올랐던 윤보선이 맞대결한 [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잘 모르겠으나 의외로 선거 부정이 심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윤보선이 박정희를 좌파라고 비난했다는 점이다. 이때 단지 15만 표 차이로 당선된 박정희는 우리나라의 경제적 발전에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독재자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왔고,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는 관권 개입 등 부정행위가 만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2년 유신헌법(이 유신헌법은 개정 절차가 불법적일 뿐만 아니라 그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자체가 부정으로 얼룩졌다. 투표율 91.9%에 91.5%의 찬성이었다고 하며, 유홍준의 글에 따르면 무주, 진안, 장수(줄여서 무진장)의 투표율은 자그마치 103%였다(주2). 유신헌법이 통과된 이후의 대선은 한마디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66년 생인 나에게, 박정희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중학교 1학년이던 1979년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 대통령이었다. 교실 앞에 걸려있던 그의 사진과 태극기는 부지불식간에 그와 국가를 동일시하게 했으며, 그가 대통령인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내가 그를 특히 존경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시해되고 이틀 뒤(달력을 조사해 보니 이 날이 일요일이라 정황상 그렇다) 집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 농구를 하다가 당직 선생님에게 쫓겨났던 기억을 두고 볼 때도 그렇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체제 하에서 선거인단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100퍼센트 득표율로 7대, 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이게 무슨 선거냐(아니면 이게 선거다!), 라고 말해야 할 정도이다(주3). 그가 죽고 난 다음 국무총리였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잠시 바통을 이어받은 최규하, 그리고 박정희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역시도 간선제로 100퍼센트 혹은 90퍼센트가 넘는 득표율로 10대, 11대, 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이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맹이었던 아버지나 겨우 한글을 깨우친 어머니 두 분 다 먹고살기에 바빠 당시 정치에 무감각했고, 먹고 살기가 이전보다 나아졌으니 박정희나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빨갱이로 치부하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편승했다. 이 같은 사실은 친가나 외가 모두 이승만 정권 때든 박정의 정권 때든 좌익과 연루되어 혹은 반정부 운동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어린 나이에 내가 독자적으로 당시 정권의 독재성을 비난했을 리는 만무하고(그보다는 그 또래 아이들이 즐겨하는 온갖 놀이나 학업 스트레스만 해도 벅찼다) 국시인 반공 교육에 세뇌되어 박정희가 시해되던 그해 봄쯤에 학교에서 시행한 반공 글짓기에서 김일성 독재 치하에 신음하는 내 또래 북한 학생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내용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또 하나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은(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득학교 6학년 때가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때) 사학과 대학생이던 작은 이모가 마르크스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전후 맥락을 잘 알 수 없는 대로 이모는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연구에 몰두했다고 다소 칭찬하는 어조로 말하는 걸 듣고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와 관련된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던 나에게 다소간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돌이켜 보니 이모의 이야기는 소통되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유추하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419혁명이 516쿠데타로 미완에 그친 정치 혁명이었다면, 전두환의 대통령 간선제 유지를 골자로 한 413 호헌 조치에 대한 반발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 등으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1987년의 610민주항쟁은 다소간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했다(주4). 당시 군대에 복무 중이어서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610항쟁은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대표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했고(전두환은 나중에 이 629선언이 자신의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13대 대선은 직선제로 치러졌으며 당시 야당 후보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를 하지 못한 바람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두 사람은 단일화를 하지 않더라도 노태우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인가?). 이 대선 투표가 나로서는 첫 투표로 당시 카투사로 여전히 군대에 복무 중이어서 부재자 투표를 했다(주5). 내가 근무하던 곳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외부적인 강압이 없었는데, 보다 작은 부대로 파견을 나가 있던 내 동기는 담당장교가 기호 1번만 보여주면서 거기에 찍으라고 외압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굴복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이 작은 예에서도 드러나듯 선거 부정은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부재자 투표를 중심으로 있었다. 당시 부정 선거 논란의 한 핵이었던 구로을 부재자 투표함(이 투표함은 개표를 하지 않고 무효표 처리했다)이 29년이나 지난 2016년도에 개표되었는데 노태우 후보의 득표율이 73.84%(총 4325표 중 3133표)로 몰표를 얻은 것 또한 군 부재자 투표에 강요 등 외압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주6). 군 부재자 투표에 있어서의 선거 부정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도 이어졌는데(만만한 것이 군인이다), 이러한 부정 행위는 당시 현역 장교였던 이지문 중위의 폭로로 그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나 이 이후로 군 부재자 투표에 노골적인 부정 행위가 보고된 적은 없었다. 이지문 중위는 근무지 이탈 및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이등병으로 강등 * 파면되었으나 1995년 대법원에서 승소해 중위로 명예 전역했다.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인 이 후배를 93년인가 94년 쯤에 학교 도서관 휴게실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고(누군가 그라고 일러 주었다) 그 뒤로도 한두 번 더 보았던 듯하다. 용기 있는 행동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나 그가 자랑스러웠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주7). 

 

1971년 7대 대선 이후 16년만에 치러진 이 직선제 대선에서의 선거 부정은 군 부재자 투표의 경우처럼 투표 자체에 개입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에 영향을 주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른바 안기부의 [무지개 공작]은 안보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전략으로 선거 결과를 뒤엎을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효과를 거둔 성공적인 공작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대선을 불과 17일 앞둔 상황에서 구조 신호 하나 없이 실종된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계속)

 

 

13대선에서 또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한 것은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 사건이다. 안기부는 11월 29일 사라진 이 비행기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발표하고 (좀 더 공부해 볼 것).

 

 

(주1) 단순히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투쟁해야 했는가를 돌이켜 볼 때, 투표권은 국민의 권리로만 생각하기 쉽고, 우리나라처럼 자유투표제(임의투표제)를 선택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조사해보니 투표는 의무적 성격도 강하여 벨기에를 비롯하여 26개국이 의무투표제(강제투표제)를 실시하여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제재를 가한다.  

(주2)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창작과비평사. 18.

(주3) 우리 앞집 주인아저씨가 이 이름도 이상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나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주4) 흥미로운 점은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남파 간첩을 주인공으로 한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 80년대 당시 남한의 체제나 사회가 북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영이 처음 보았던 팔십년대의 남한은 지금의 남한보다 차라리 당시의 북한과 더 비슷했다고 할 수 있었다.'(198)

(주5) 610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었고 이것의 찬반을 묻는 투표가 대선에 앞서 1987년 10월 29일에 있었다. 그런데, 내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보아도 투표를 한 기억이 없다. 

(주6) 전체 득표율은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0%로 노태우와 김영삼의 표 차이는 200만표가 좀 덜 되었다. 

(주7) 유홍준은 유신헌법 개정 찬반 투표에서 "군부대는 반쪽 가리고 O표만 찍는 공개투표를 시행하여 거의 100% 투표율에 99% 지지율을 보여주었"다고 하며, 그래도 자신의 친구는 "용기있게 반대에 찍"었다가 "명령불복종이라고 영창 15일을 살았다"고 덧붙였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창작과비평사. 18). 헌법에 반하는 불법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명령불복종죄로 처벌할 수 있었던 이 사건은 당시 우리나라의 비민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이다.  

 

북풍(이회창. 아들 병역)

국정원 개입

드루킹 사태

 

 

14대 총선 이지문 http://v.media.daum.net/v/20180608162000262?f=o

13대 대선 87년 12. 16

노태우 36.6%  195만표 정도 차 200만 표

 

김영삼 28.0%

 

김대중 27.0%

득표율

8,282,738 6,337,581
36.6% 28.0%

 

(사진이 있었는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생각보다 쓸 것이 많다.)

 

 

노태우 13

김영삼 14

김대중 15

노무현 16

이명박 17

박근혜 18

문재인 19         

 

김현희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해역 상공에서 폭파 사건. 

87년 10월 27일

대선투ㅌ표 군대에서 

  • 일정한 조직이나 집단의 구성원이  대표자나 임원 등을 투표 등의 방법으로 가려 뽑는 행위
  • 선거 또는 어떤 안건의 가부를 결정할 때, 일정한 표에 의사를 표시하여 지정된 곳에 

이 이사장은 27년 전인 1992년 14대 총선 때 현역 중위 신분으로 군 부재자투표 부정 실태를 폭로해 이등병으로 강등·파면됐다가 1995년 대법원에서 승소해 중위로 명예 전역했다. 민주당 서울시의원, 참여연대 공익제보자지원센터 실행위원을 지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이명박) 17대

 

민경욱 부정선거 소동

 

20대

 

[재조사]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이 25일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테러 사건에 대한 재검증 필요성을 시사했다. 최근 안다만해에서 KAL 858기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돼 한국 정부가 미얀마 정부와 조사를 협의 중인 가운데 여당 최고위원이 북한의 폭탄 테러가 아닐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은 발생 한 달 만에 김현의 등 북한 공작원들이 붙잡혀 북한이 벌인 폭탄 테러라는 결론이 나왔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도 모두 북한의 폭탄 테러로 확인됐다. 그러나 1987년 대선 직전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을 들어 일가에서는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설 최고위원은 이날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KAL858기 동체로 추정된느 물체를 인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858기가 맞는지가 확인되면 유해도 나오고 블랙박스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진상조사를 다시 안 할 수 없을 것" 이라고 했다. 설 최고위원은 또 858 폭탄 테러 사건 조사가 대단히 미진한 조사였다는게 밝혀져 있지 않느냐"며 "조사가 새로 돼야 된다"고 했다.

진행자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에서도 폭탄 테러가 맞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진실위 조사 결과도 지겸증해야 한다는 입장이냐"고 맏자 설 최고위원은 "지금은 그 부분을 논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동체를 건져올려보면 그 상황을 갖고 재검증해야 된다 안된다 판정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동체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해선 "2007년 당시만 하더라도 과거 정부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고 본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갖고 있는 여력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그게 작용됐을 거라고 본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 이뤄진 조사조차도 그 전전 정부인 전두환, 노태우 정부의 영향력으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진행자가 "당시 국정원 안에 이 재조사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다는 말이냐"고 묻자 설 최고위원은 "반드시 있었다고 보고, 그것이 작용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설 최고위원은 "사건 직후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하게 붙잡힌 김현희씨를 만나 얘기를 듣는 게 중요한 문제였는데 이젓이 불발됐다"는 이유를 댔다. 이어 "지금은 전두환, 노태우 정부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때 영향력이 다 소멸 된 상태"라며 "지금 그 문제를 접근하려고 들면 충분히 진실에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이라고 했다.

설 최고위원은 또 "당에서 아직 858편 폭파 사건 재조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면서도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 왔다. 준비를 하고 있는 것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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