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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우연의 일치

by 길철현 2022. 6. 8.

지난 일요일(6월 5일)의 일이다. 저녁에 병원으로 어머니를 간병하러 들어가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병원에서 입을 요량으로 성서의 모다 아웃렛으로 가 자주 찾는 [르까프] 매장에서 칠부바지를 하나 구입했다. 그다음, 부근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코로나도 많이 누그러졌고, 날씨도 좋은 휴일이라 점심시간이 좀 넘었는데도 식당은 손님들로 넘쳐났다. 일손이 바빠 미처 치우지 못한 빈 그릇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분주한 모습이 일상 회복을 보여주는 듯해 내심 므흣했다. 내장과 순대, 고기가 모두 들어간 '모듬국밥'으로 배를 채운 뒤 차로 향하다가 내친김에 운동화도 하나 사자하고 역시나 자주 찾는 곳인 [ABC마트]로 향했다. 이곳 역시 휴일 오후라 매장을 메운 손님들로 직원들은 정신이 없었다. 발이 편해 계속해서 신어온 신발의 새 모델(디자인만 약간 바꾼)을 구입하고는, 태그를 떼면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된다는 직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신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좀 전에 구입한 바지에 생각이 미쳤다. 어디에 두었지? 하면서 칠부바지가 든 흰 종이 백을 눈으로 좇았다. 종이 백은 내가 신발을 고른 곳 근처 구석자리에 단정하게 놓여 있었고, 나는 그걸 들고 기꺼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다섯 시 쯤 병원에 들고 들어갈 짐을 챙기면서(동생들과 돌아가며 어머니를 간병하는데 나의 이번 간병은 12일 예정이었다) 흰 종이 백에서 칠부바지를 꺼내는 순간, 혼돈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곤색 칠부바지가 들어있어야 할 흰 종이 백에서 나온 것은 검은색 긴 바지였다. 이 황당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찬찬히 상황을 되짚어 보니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는 종이 백을 두고 나왔는데, 우연의 일치로 [르까프]에서 이 긴 바지를 구입한 사람이 [ABC마트]에도 들러 신발을 고르는 사이에 내가 그 종이 백을 내 것인 줄 알고 들고 나온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내 종이 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 들고 가서, 그 사람의 종이 백만 남아 있었던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장에서 바지를 잘못 들고 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공교롭게도 허리 치수도 82cm로 내 치수와 일치했다. 상황이 정확히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중요한 것은 이 종이 백을 원래 위치에 갖다 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착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자칫 절도범으로 몰릴 수가 있었다. 운이 따라주어 내 칠부바지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때 마침 밖에는 긴 가뭄을 잠재울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떤 우산을 들고 갈까 하다가 큰 것으로 들고 나갔는데, 처음에는 잘 몰랐으나 나중에 접으면서 보니 살이 두어 군데 부러진 것이라 접고 펴는 것이 잘 되지 않았다. 혼란을 안은 채 다소 서둘러 아웃렛으로 향했다(우리집에서 아웃렛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식당과 [ABC마트] 중 어디를 먼저 들를까 하다가 일단 [ABC마트]로 들어갔다. 비가 내리고 다소 늦은 시각이라 매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혹시 종이 백을 찾으러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 백을 매장에 맡겼다. 그다음 살이 부서진 우산을 수습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신발 매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이 식당을 찾는 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식당이 신발 매장과 같은 도로 상에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뒤편 도로였다. 반가운 비도 반쯤 부서진 우산을 힘겹게 펴고 접고 하다보면서 비에 젖다 보니 짜증이 올라왔다. 식당은 점심때만큼 붐비지는 않았으나 저녁을 먹으러 온 손님들이 몇몇 있었고, '종이 백을 못 보았느냐'는 말에 사장님인 듯한 분은 '못 봤다. 있으면 챙겨두는데'라고 했고, 이십 대의 외국인 직원은 '지갑을 찾느냐'라고 묻다가, 다시 한번 '종이 백'이라고 하자, 다소 단호하게 손사래를 쳐서 나를 야속하게 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그 칠부바지를 입을 운이 아닌 듯했다. 

 

마지막으로 신발 매장 직원의 조언을 좇아 [르까프] 매장에 가보았다. 우산이 제대로 접히지 않아 빗물 방지용 비닐을 이용하지도 못하고 빗물을 떨어뜨리면서 매장으로 올라가 구석자리에 우산을 던져두었다. 사장님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아직 찾으러 오지 않았는데, '그 손님이 기억난다'며 내 '바로 뒤에 바지를 사갔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금 구매를 해서 연락할 방법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연락처를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손님 옷도 구매처인 이곳에 두는 것이 낫겠다고 해, 나는 다시 [ABC마트]에 가 종이 백을 찾은 다음 [르까프]에 맡겨 두었다. 이제는 시간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날 오전에 거짓말처럼 [르까프] 매장에서 전화가 왔다. '긴 바지 고객이 칠부바지를 갖고 왔으니 찾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병원에 들어와 있어서 당분간은 찾으러 가기가 힘들다'라고 했더니, '그럼, 택배로 붙여 주겠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해주면 고맙다. 착불로 하시라'라고 했다. 

 

또 하루가 지난 오후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택배비를 지불하려 했더니, 기사분이 '이미 계산이 되었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르까프] 측에 문자를 보내려 했더니, 일반 전화라 전화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우연의 일치가 불러온 혼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직 종이 백을 열어 보지 않았는데 칠부바지가 들어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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