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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한 때

by 길철현 2021. 10. 29.

걷고 또 걷는다. 팔십 노인의 걸음에도 뒤쳐지고 마는 병약자의 걸음으로 몇 걸음 가다가 주저 앉는다. 실제로는 병실에 누워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사소한 짜증과 불쾌감이 갑작스레 증폭되어, 시커먼 손이 시커먼 아가리로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불안과,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두 다리가 자꾸만 가라앉고 있어요. 꿍짝꿍짝 유행가 한 소절이 무한반복으로 머리를 맴돌다. 불면의 극도의 피로감이 마침내 잠을 붙들지만, 잠이 들자 마자 온 몸이 경직되며 깨고. 그게 아니라면 잠의 문까지는 다가 서지만 끝끝내 문턱은 넘지 못하고. 그럼, 극도의 피로는 얼마간 가시는가? 또 가만히 앉지도 눕지도 서지도 못하는 안절부절함은 어떤가? 죽음이 내 옆에서 달콤한 키스로 유혹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정말이지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어. 큰 불이 났으니 우선 불을 꺼야죠. 항우울제, 항불안제, 수면제 모두 다 드릴 게요. 하지만 정신질환 자체로 사람이 죽지는 않아요. 우울증은 무력이 극에 달한 광기이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 모두가 니가 지은 죄! 죄값!!!이라는 목소리. 그래도 뭔가 억울하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신은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도 그냥 만들지는 않았으리라는 얼간이의 말.**

 

* 푸코 

** 펠리니 감독의 [길]에 나오는 대사를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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