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太陽)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華麗)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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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젊은 나이에 죽고만 함형수(1914-46)의 대표작으로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실렸다. 5행으로 된 짧고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 시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시에 나오는 해바라기, 태양, 보리밭, 노고지리(종다리) 등의 소재가 자연스럽게 고흐를 떠올리게 한다. 고흐가 해바라기와 그 해바라기가 상징하는 태양의 화가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은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보리밭이 아니라 밀밭이긴 하지만,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그 위로 노고지리가 나는 그림은 황토색과 연초록, 그리고 흰색과 푸른색의 대비가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시는 고흐의 예술에의 열정을 선언적으로 표현한 시로 읽힌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대비와 뒤로 갈 수록 길어지는 행이 그러한 선언의 강도를 증폭시킨다. 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이 시는 제목과 부제로 인해 그 의미가 다소 모호해진다. '해바라기의 비명'이라는 제목으로 인해 나와 해바라기는 불가분으로 동일시 되어버리고,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는 화자인 나와 L과의 관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시는 국내의 고흐 시편 중 가장 잘 알려진 시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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