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여인, 미실>
예전에 잠시 사귀었던 어떤 여자는 만날 때 마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고는 했다. 그녀의 말은 과거에 살던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 아니 뒤집어 표현하자면 얼마나 같을까 하는 궁금증을 표현한 것이리라. 과거가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으니, 과거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미래에 대한 기대나 불안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소설 <<미실>>이 보여주는 천사오백 년 전 신라 사회의 성 풍속도, 그것도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족의 성 풍속도는 오늘 날 우리의 잣대로 볼 때는 실로 경악을 금하기 힘들 정도로 문란하고 음란해 보인다. <<화랑세기>>(김대문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화랑세기>>의 필사본이 1995년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 필사본의 위작 여부가 역사학계에서 아직 확실하게 판명이 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이 필사본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며, 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미실의 경우는 그러한 문란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써 남편이 있는 몸임에도 삼대에 걸쳐 왕에게 색공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따로 애인을 두고, 급기야는 친동생과도 성관계를 가지기까지 한다. 남녀간의 성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생활 속에서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일부일처제의 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오늘 날 우리의 눈에 미실은 음녀이자 탕녀이며, 상피의 죄까지 저지른 패륜녀로 비치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런 여자를, 그것도 위작 여부를 의심 받는 책에서 굳이 끄집어내 우리 앞에 내놓은 것일까? 자칫 잘못하면 삼류 성애 소설로 오해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저자가 미실의 일대기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
허구의 소설 공간으로 옮겨진 신라 사회, 또 미실을 중심으로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 군상을 추적하기 위해서 오늘 날 우리의 성 모럴을 한쪽으로 밀어둘 때(이 시점에서 우리는 푹스가 [풍속의 역사]에서 ‘성 모럴은 도덕률 중에서도 가장 변화하기 쉬운 것’이라고 한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미실이 왕족과 혼인하거나 색공할 여자를 배출했던 모계혈통인 대원신통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또 성적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비방들을 배웠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실은 황후라도 될 수 있는 신분이지만, 타인의 의지에 따라 그를 섬기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세종 전군의 바람에 따라 그에게 색공을 하다가도 일순간에 궁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다함의 곁을 떠나 다시 세종 전군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는 가운데,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지는 부부는 실상 남자가 주인이고 여자가 노예가 되는 의미 이상일 수는 없(111)’다는 것을 깨닫고 ‘주인의 자리를 쟁탈’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이후 진흥제의 총애까지 얻게 된 미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재색이라는 무기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장해 나간다. ‘힘없는 여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던 숱한 일들, 자신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는 선택으로 운명 속에 내동댕이쳐져야 했던 기억이 그녀를 더욱 냉철한 권력가로 만들었(179)’던 것이며, 급기야 그녀의 권력은 자신을 황후로 삼겠다던 약속을 저버린 진지제를 폐위하고, 진평제를 옹위할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권력을 손에 넣은 미실은 ‘어머니의 지혜, 어머니의 공정함, 어머니의 도량(328)’을 지니고 정치를 해나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힘없는 한 여인인 미실이 자신의 재색을 무기로 삼아 권력을 획득해 나간 노정을 보여준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유재산제의 확립 이래 이어져 온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남녀 관계의 불평등 구조를 전복시킨 인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모순적 관계의 해결을 도모한 인물의 상징으로 미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주제 의식보다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에 더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막힘없이 흐르는 유려한 문체와, 과거라는 시대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용된 무수히 많은 낯선 낱말들, 그리고 놀랍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능란한 시적 비유와 표현 등이 우리를 이 작품 속으로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다만 미실이 정치를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혹은 그 이전에라도, 그녀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하나둘 삽입 되었더라면 그녀가 더욱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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