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여성상의 등장--이해조의『홍도화, 상을 읽고
필자는 외국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나,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아 우리 소설이나 시를 나름대로 꽤 많이 읽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문학의 경우 시는 최남선을 기점으로, 또 소설은 이광수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 시대의 작품은 고등학교 고전문학 시간에 배운 작품들과 시조 몇 편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된 까닭을 한두 마디로 쉽게 규명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다면 우선 우리 고전문학 다수가 한문으로 된 작품이고, 또 한글로 쓴 작품들도 그 표기법이나 어휘들이 낯설어서 읽기가 녹록치 않았으며--핑계이겠지만 우리 문학이기 때문에 번역으로 읽기는 싫었던 면도 있으리라--다른 무엇보다도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사이에 뭔가 커다란 단절이 있는 듯이 여기는 우리 문학계의 태도에 은연중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가교라고 할 수 있는 신소설의 경우에도 이인직의 『혈의 누』를 최초의 신소설로, 이 밖에 이해조의 『자유종』,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본다는 아주 단편적인 지식뿐이었다. 물론 전대의 소설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신소설이라는 흥미로운 명칭을 지닌 이 소설들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차일피일 하다가 이번 기회에 이해조와 이인직, 안국선, 최찬식 등의 작품--원래 표기법이 아니라 현대 국어 표기법에 맞춰 교열한 것이긴 하지만--을 일별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뽑아 든 작품이 이해조의 『자유종』이었는데, 별다른 배경 지식 없이 이 작품을 읽고 난 솔직한 첫 느낌은 실망스러움이었다. 그 실망감은 이 작품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 대해서 가지는 기본적인 기대, 즉 인물의 형상화나 사건의 전개라는 측면을 충족시켜주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플라톤의 “대화”편들과 비슷하게 필자의 대변인이라고 할 인물들의 담론의 전개에 전력하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자체에 의문이 갔다. 다른 신소설 작품들을 좀 더 읽고, 또 풍전등화와 같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다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었을 때는 이해조가 이 작품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들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절박한 문제이며, 또 그것이 작가적 양심에 따른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나마 실감하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이 작품의 소설적 성취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 필자가『자유종』을 읽을 때 위에 언급한 것보다 먼저 눈길이 간 것은 이 작품이 여성 화자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남녀불평등과 무지의 굴레 속에 있던 당대 여성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설파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발표 당시 영국의 상황에서는 절실했던 여성의 재산권, 참정권, 직업 선택의 자유권 등 핵심적인 사항들을 조리정연하게 피력하고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의『여성의 종속』조차도 그러한 문제들이 해소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원론적 수준의 이야기로 비치듯이, 이해조가 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도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시대에 뒤진 견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해조가 당시로서는 선구적으로 남녀불평등의 현실을 작품에서 직접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러한 페미니스트로서의 이해조의 면모가 ‘과부의 개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홍도화, 상』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해조의 다른 작품들보다도 이 작품을 특히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그 전개에 아쉬움이나 흠결이 없지 않은 대로 소설적으로도 어느 정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태희에게서 새로운 여성상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명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그 때까지의 다른 여주인공들과는 달리, 이태희는 운명에 맞서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인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인물상으로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홍도화, 상』에는 과부의 개가 문제 외에도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조혼 풍습의 폐해, 남녀의 애정 문제 등 다양한 요소가 담겨져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대체로 태희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들이므로, 이 부분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이태희의 아버지 이직각은 작품에 명시된 대로 ‘얼개화꾼’(개화가 완전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으로, 시대의 변화에 외면적으로는 발맞추는 듯하지만 ‘심중에는 양반도 그대로 있고, 교만도 그대로 있고, 완고도 그대로 있는’ 그런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을 따라 마지못해 태희를 여학교에 보내긴 하면서도, 양반 가문에 혼처가 나자 그녀가 졸업을 하기도 전에 그 집안이 어떤 형편인지, 자신의 딸이 행복할 것인지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택일을 해버린다. 이직각의 이러한 처사에 대한 어린 태희의 저항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개화된 세상에는 양반은 쓸데없고 남녀 물론하고 학문이 넉넉하여야 상등인이 된다는데, 나를 왜 공부도 못하게 시골구석으로 시집을 보내려 하시노?’라는 태희의 속마음이 표현된 부분을 보면 아버지 이직각보다 그녀가 시대의 흐름을 더욱 잘 읽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 거기다가 그녀에게는 이미 등하교 길에 늘 마주치던 남학도인 심상호에 대한 애정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혼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의 뜻에 따라 결정되던 당시의 관습이 자유연애라는 서양 풍속에도 어느 정도 눈을 뜬 태희에게는 이전의 여성들에게보다 더 큰 굴레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혼인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아버지 이직각의 행동은 자식의 행복보다는 전래의 관습과 집안의 위신을 우선시 하는 그런 것이라, 결국에는 그녀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만다. 그녀는 아버지의 행동이 부당함을 자각하고는 있으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피하지 못한다. 시집을 가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고 난 뒤 손윗동서의 핍박을 받으며 세월을 보내던 그녀는, 그녀가 학교를 다닐 때 보여주었던 자각과는 달리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전혀 찾지 못하고, ‘아무 때 죽어도 필경 죽을 이 목숨을 어서 죽어 온갖 일을 다 잊어버리겠다’고 하면서 여느 다른 여자들과 같이 죽음으로서 불행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결심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우연히 어머니가 보내 준 신문에서 ‘여자의 개가를 할 일’이라는 논설을 읽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이 논설은 그녀에게 칠흑 같은 어둠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과 같은 것으로 길을 잃고 죽음만을 생각하던 그녀로 하여금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로 인해 그녀는 극적으로 사고를 전환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과부의 개가 문제가 여성들의 성적 자유를 어떻게 옥죄어왔는가? 필자의 지식이 짧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이 신문의 논설에서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듯 우리나라에서 과부의 개가를 법적으로 전면 금지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 말까지 허용되던 과부의 개가가, 조선조로 들어오면서 개가한 과부의 자식은 벼슬에 오를 수 없게 하는 형태로 제약을 가하게 되었으며, 양반층에 행해졌던 이러한 풍습이 평민층까지 점차 확대 되었다. 18세기 말 박지원은 「열녀함양박씨전」이라는 한문단편소설에서 구체적 사례를 통해 과부의 수절과, 수절을 견디지 못하는 청상과부의 자결을 반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당대의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던 연암으로서도 과부의 개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조의 가부장적 남녀불평등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야 비로소 과부의 개가는 법적으로 보장이 된다.
이 작품의 정확한 시간적 배경을 알 수 있는 단서는 그녀가 읽은 논설이 실린 『제국신문』2546호로, 이 호가 발간된 1907년을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당시는 과부의 개가가 법적으로 보장된 지 십 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관습에는 큰 변화가 없어서 수절이 당연시 되는 그런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관습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태희는 과부의 개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그 장점을 언급하고 있는 이 논설을 읽고 자신의 사고를 극적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 신문을 보고 생각해 본즉, 진정 말이지, 나 같은 과부가 수절이니 정절이니 하고 세상에 났던 보람 없이 아무 재미 모르고 그대로 시들어 죽던지 자결을 하여 죽든지 그런 얼뜨고 어림없는 일이 어찌 있어? 개가를 해서라도 악한 행실만 아니하고 유지한 남편의 배필이 되어, 적게 가정윤리를 바르게 하고, 크게 사회 습관을 개량하면 비단 내 한 몸의 철천지한을 풀어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몇만 명 내 신세와 같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어 일체로 원통한 세상을 면하고, 화락한 천지를 만나게 되면 그 영원무궁한 사업이 어찌 구구한 작은 생각으로 천금 같은 생명을 버려 물거품 꺼지듯 났던 흔적도 없어진 것에다가 비할 수 있나!
이 장면에 비친 태희의 모습은, 일정 정도 그녀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라는 측면도 있으나, 사회적 관습과 개인의 행복의 추구가 갈등을 일으킬 때 언제나 사회적 관습에 굴복하고 마는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당당히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인물, 그 이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개인적인 자각과 성숙을 성취한 새로운 여성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해조가 이 시점에서 그려내고 있는 이태희는 동시대의 어떤 작가도 창조해내지 못한 선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태희의 짝으로 나오는 심상호 역시도 그녀 못지않게 선구적인 인물이다. 다만 그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인 태희가 짊어져야 했던 사회적 관습의 무게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집간 이태희를 못 잊고 있었는데, 빨리 장가를 들라는 홀어머니의 성화에도 ‘학문도 있고 성행도 착한 여자를 취택하기 전에는 삼십이 되도록이라도 저는 장가를 아니들겠습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당당히 밝힌다. 그의 어머니가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둔다는 사실에서도 이 당시 남자와 여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의 차이를 뚜렷이 엿볼 수 있다. 우연찮게 이태희가 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심상호는 태희의 외삼촌인 김참서의 도움을 빌어 그녀와의 결혼을 추진한다. 이러한 심상호는 원래부터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은 차치하고라도, 자각한 이태희와 잘 어울리는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엄청난 중압감으로 작용하던 사회적 관습, 특히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지 않던 관습이 심상호의 등장과 함께 너무나도 손쉽게 해소된다는 점에서 선뜻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본인 역시 과부로 수절을 해온 심상호의 모친이 총각인 자기 아들과 과부와의 결혼에 있어서 아무런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것이나, 그가 ‘인아족당(모든 친척)과 원근지구(먼 곳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귄지 오래된 친구)를 모두 청하여’ 일장 연설을 하자, 비록 그 연설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이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은 것은 다소 안일하게 후반부의 매듭을 짓고 있는 않나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거기다 앞서 자각되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던 태희 마저도 자신을 보쌈하려는 김만보 일행에 의해 납치되자 ‘치마끈을 슬며시 끌러 자기 손으로 목을 잔뜩 잘라 매’는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고 마는 것은, 이태희의 자각과 성숙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사랑하던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행복한 결말로 일단 끝이 난다. 그러나, 후속편인 『홍도화, 하』에서 이태희와 심상호 두 인물이 이 상편보다 더욱 퇴행하여, 미신을 믿는 심상호의 어머니와 앞뒤가 꽉 막힌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이태희의 아버지 이직각의 횡포 아래에서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만 다니다가 김참서의 도움으로 겨우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사회적 관습이 지닌 중압감이라든가 개인의 자각의 문제를 좀 더 심도 있게 천착하지 못하고 다소 안일하게 이 상편을 매듭지은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러한 점은 이해조의 작품들이 한일합병 이후에는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보여주었던 계몽성이나 당대 현실의 날카로운 포착 등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고, 흥미위주의 적당한 타협에 머물고 만 것과도 연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사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망국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고려하면서 면밀하게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작품 활동 초기에 보여주었던 치열한 정신들은 신소설 작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인 것이며, 페미니스트로서의 그의 면모 또한 당시로서는 선구적이다. 특히 『홍도화, 상』에서 그가 창조해 낸 이태희라는 주인공,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수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에서 벗어나, 그 운명에 맞서 싸워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인물로서의 그녀는 그 때까지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현대적인 새로운 여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억에 오래도록 각인될 그런 인물이다.
*이 작품의 대본은 권영민, 김종욱, 배경열이 편집한 『빈상설, 홍동화, 원앙도』(서울대학교출판부) 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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