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우 - 봄날 (100205)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쓰기 전에 나는 먼저 왜 내가 ‘광주민주화운동’(이하 광민운으로 약칭)에 때늦게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모아본다. 그 이유는 단순히 말해보자면, 그 비극적인 사건이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의 한 도시에서 일어났고, 또 그 사건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즉 내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는(벌써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긴 했지만) 공간적*시간적 공유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신경증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이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흔 해 이상을 버팅겨 와야 했기 때문에, 사람살이의 아픔이나 비극에 특히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을 깊은 곳까지 밀어나가 본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언제나 실수나 잘못 등으로 얼룩지기 일쑤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보다 나은 것’을 향한 부단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광민운이 비록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기 이전,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추찰해 보고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을 되새김으로써, 개인적인 차원에서나마,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 광민운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작년 말 한 인터넷 문학 카페에서 주최한 독서 감상문 모집에 응모하기 위해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으면서 다시 촉발되었다. 그 때 독서 감상문을 쓰면서 나는 광민운과 관련된 내 기억들을 기억이 닿는 대로 정리를 해보았고, 또 임철우의 이 [봄날]이 광민운을 집중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읽어 나갔다. (사족--나는 이 [봄날]을 헌책방 ‘고구마’에서 2005년도에 사두고는 그 때까지 읽지 않고 있었다. 원래 다섯 권이 한 질인데, 그 때 구입한 것은 4권까지 밖에 없었다. 4권을 다 읽기 전에 5권을 사야 했는데, 5권을 구하기가 힘이 들었다. 새 책을 사면되었지만 그것은 헌책 마니아인 나에게는 최후의 방책이었다. 나는 인터넷 헌책방을 여기저기 검색해 보았지만 5권만 따로 파는 곳은 없었다. 그 얼마 전에 들른 ‘부활’이라는 헌 책방에 전질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책방 주인은 자기도 어렵게 한 질을 맞춘 것이라며 한 권만 따로 팔려고 하지 않았다) 급한 김에 다섯 권을 만 원에 구입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우연히 ‘고구마’에 들렀는데, 5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구입하고, 남는 한 질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주었다.) 그런데, 책을 좀 읽어 나가다가, 이 책이 임철우의 다른 장편인 [붉은 산, 흰 새]의 연계 선상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그 작품부터 읽었다.
[붉은 산, 흰 새]는 6*25 동란으로 인한 좌우의 대립의 와중에 아버지를 잃고, 또 아내마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겁탈을 당한 상처를 견디지 못해 고향인 낙일도를 떠났다가,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 십오 년 만에 고향에 들른 한원구 부자와, 때마침 자신의 전처의 오빠가 간첩으로 이 고장에 잠입한 사건으로 섬 전체가 발칵 뒤집혀 진 상태를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주 : [봄날]은 광민운을 소재로 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따로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이 작품은 간단한 줄거리 정도는 덧붙이는 것이 이 작품과 [봄날]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6*25 동란의 와중에 좌익들에게 아버지를 잃고, 아내마저 윤간을 당한 한원구는 고향인 낙일도를 떠나 광주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면서 살다가, 아버지의 유골을 이장하러 고향 마을에 들른다.
한원구는 첫 아들인 무석이 아내 귀단이 윤간을 당한 뒤 잉태한 자식이라는 것 때문에, 아내 귀단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학대했고, 급기야 귀단은 미쳐서 가출하고 만다. ([봄날]을 보면 광주에서 청산댁과 재혼을 한 한원구는 명기와 명옥을 낳았다.)
아무도 몰래 그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낙일도엔 당시 조성태라는 간첩이 출몰하여, 그를 잡기 위해 군경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조성태는 조양재의 둘째 아들로 6*25 당시 행불되었다가, 간첩으로 넘어 온 모양이었다. 조양재는 한원구의 전처인 귀단의 아버지로, 한원구에게는 장인어른이었다. 조성태를 못 잡은 군경은 결국 조양재 일가와 친척을 간첩 혐의로 모두 구속하고, 이웃의 다른 사람들도 심한 추달을 당한다.
실성한 것으로 알려진 귀단도 낙일도에 등장하여, 아들인 무석이나 명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홀연히 사라진다.
이 작품의 줄거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원구의 첫째 아들인 무석이 좌익들에게 윤간을 당한 다음에 잉태된 자식이라는 점이다. [봄날]을 보면 스물여덟(?)인 무석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견디다 못하고 집을 떠나 빈민촌의 낡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이 작품의 작가 후기를 보면, 원래 임철우는 광민운을 다룬 작품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먼저 이 내용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디 이 제목으로 [문학과 사회]에 연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팔십년 오월 며칠 동안의 기간만을 다루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득 그것만 가지고는 뭔가 한쪽이 대단히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치적 * 사회적 원인 및 배경만으로는 끝내 온전히 설명될 수 없는 어떤 부분, 가령 그 비극의 학살 현장에서 노출되어진 이 시대 인간 군상들의 야만성과 광기, 잔인함과 폭력성의 배후에는 정작 또 다른 근원적 인자가 아울러 혼재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의심은 막연하게나마 내 고향섬과 그 ‘어둠 속 벽화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갔고, 그것들의 배후엔 동족 살륙의 전쟁 및 분단이 배태해낸 소름끼치는 원죄의 올가미가 숨어 엎드려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 올가미는 결코 사십 년 전의 해묵은 전쟁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들 모두의 의식과 무의식, 정서와 영혼까지를 철저하게 지배한 채 끊임없이 이 땅의 우리들 모두를 파괴, 해체해가고 있는 어떤 어마어마한 ‘어둠의 에네르기’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290-91)
광민운의 배후에 ‘동족 살륙의 전쟁 및 분단이 배태해낸 소름끼치는 원죄의 올가미’가 있다는 임철우의 이 말을 좀 더 밀고 나가보면 우리 현대사의 한 비극의 극점인 광민운이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의 하나의 큰 파열음이고, 그것은 가깝게는 분단 체제의 고착과 군부 독재 정권, 그리고 그 이전의 6*25, 또 애초에 그러한 상황을 초래하게 했던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과 아픔과 동궤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1권의 첫머리에 <책을 내면서>라는 제목으로 광민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처음 7년은 다만 맹랑한 유언비어 혹은 과장된 전설이었고, 다음 3,4년은 텔레비전 속의 제법 요란한 국회 청문회 연속극 같은 것이 되더니, 이제 너나없이 이쯤 해서 역사 속의 해묵은 일지 정도로 정리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9-10)
이 책이 나온 지도 벌써 13년이 되었으므로, 정말 지금은 ‘역사 속의 해묵은 일지’로 정리되었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공선옥의 작품을 읽으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광민운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변화는 깊은 성찰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선 나만 놓고 보더라도, 과연 광민운이 ‘완전한 권력의 장악을 획책하던 신군부의 의도에서 나온 계획적인 것’인가, 아니면 ‘과격한 진압이 시민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걷잡을 수 없게 확대된 것’인가의 사이에서 뚜렷한 답을 못 찾고 있다는 점은 광민운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내려지지 못 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나 자신의 무지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평가는 문학 작품에서보다는 이 사건을 다룬 기록서 혹은 역사서들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겠으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이 작품이,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광민운의 ‘총체적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가 피땀을 바친 성과물이라는 데에는 큰 이의가 없다. 임철우 자신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실과 상상력-그 둘 사이에서, 적어도 이번 소설에 관한 한, 나는 최대한 사실성에 의지하려 했다. (13)
다시 말해 이 작품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간을 중심으로(실제 소설은 16일에 시작되어 31일에 끝이 난다), 그러니까 신군부에 의해 계엄령이 발효되고,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과 시민들의 저항, 군대의 철수와 재진입까지의 과정을 허구와 사실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전개해 나가고 있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논의하기에 앞서 먼저 ‘봄날’이라는 제목에 대해 좀 고찰해 보도록 하자. ‘붉은 산, 흰 새’라는 제목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위치하고 있는 연약한, 또 다른 면에서는 강해 질 수도 있는, 보통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은 이 작품을 읽어본 사람은 쉽사리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봄날’이라는 제목은 세상 만물이 생동하는 봄의 한 가운데에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또 죽어야 하는 야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그 둘 사이의 괴리를 대조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엿보인다. 사실 임철우는 같은 제목으로 85년도에 단편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광민운의 실상을 작가가 보고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난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임철우는 지나치다고 보일 정도로 광민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면서도, 광민운의 소용돌이 속에 죽어간 인물(명부)과, 그 뒤에 남겨진 인물들(상주, 나, 병기, 순임)의 묘사를 통해 광민운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광민운이 있고 2년이 흐른 시간을 배경으로 한 그 작품이나, 또 7년 뒤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 “관광객들”(87년도 발표)에서나 생명력으로 충일해 있는 자연의 모습이 과도할 정도로 강조되고 있다.
광장은 어디에나 가득히 고인 햇살로 출렁이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햇볕에 흥건히 젖어 기묘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검은 등판을 까내놓고 엎디어 있는 포도 위에도, 거리를 따라 늘어선 빌딩들의 각이 진 옥상 위에도 밝은 오월의 햇살은 묵직하게 내려앉고 있었고, 광장을 돌아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량들의 유리창이며 길 옆 은행나무 가지 끝으로 갓 돋아오른 연록색 이파리 마다엔 부딪쳐 잘게 바스라진 노란 햇살들이 물고기 비늘로 반짝이며 푸들푸들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나는 한동안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봄날”, 147-48)
과연 퍽도 쾌청한 날씨다. 유리알같이 맑고 환한 오월의 햇살이 곧게 뻗은 포도 위에 풍성하게 쏟아져내리고 있고,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봄날의 훈풍이 양대범의 베이지색 신형 승용차의 날렵한 차체에 부딪칠 때마다 물방울처럼 통통 튀어오르고 있다. 주변의 산과 들은 마악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푸르른 나무와 풀잎들로 한데 어우러져서 한층 더 싱그럽다. 들판엔 벌써 모내기를 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관광객들”, 102)
‘봄날’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만물이 생동하는 봄과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야만의 시간이 겹친다는 아이러니를 표출한 것이자, ‘오월’의 다른 이름이다.
이 소설은 [붉은 산, 흰 새]와 마찬가지로 한원구가 그 문을 열고 있는데, 이 소설의 무게중심이 그 열흘간을 총체적으로 조망해 보자는 쪽에 가 있기 때문에, 이내 다양한 인물군이 등장한다. 임철우는 앞에 예를 든 것처럼 사실성과 작가적 상상력 중에서 ‘사실성에 의지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작품이 엄연히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에서는 그 둘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그로서는 커다란 난제가 아니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난제를 한원구의 자식들이 모두 광민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해결해 나가려 했다. 특히 큰 아들인 무석을 시민군에 그리고 둘째인 명치를 진압군에 위치시킴으로서 광민운의 비극이 극대화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하고 있다(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6*25나, 또 형제가 서로 한쪽은 전경으로 또 한쪽은 시위대로 맞서야 했던 상황은 우리 영화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극한 상황들 중 하나이다). 다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한원구 가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분류해 보자면, 먼저 한원구 자신처럼 시위에 냉담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인물들을 한 부류로 상정해 볼 수 있고(이 부류에는 이 작품에서는 별다른 중요성을 띠지 못하나 실제로는 꽤 많았을 인물들, 즉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광주를 떠난 사람들도 속할 것이다), 그 다음 무석과 한 아파트에 사는 한기, 칠수나 이들의 친구인 박봉배처럼 광민운의 중심부에 서게 되는 부류. 여기에는 무석의 친구이자 지식인으로서 광민운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 한상현 같은 인물도 포함될 것이다. 그 다음, 명기(한원구의 셋째 아들)와 그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광민운에 적극 가담한 대학생들은 같은 부류로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또 따로 떼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명치가 속해 있는 특전사, 일반 군부대, 전경, 경찰 등 시위 진압을 맡은 진압군이 한 부류가 될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광민운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한 부류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허구적으로는 한원구의 고등학생인 막내딸 명옥과 함께 선물을 사러 나왔다가 달아나는 시위대의 틈바구니에서 쓰러져 죽고만 친구 현주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피해를 당한 인물들로는 총탄에 맞아 죽은 임산부, 중학생, 송암동의 주민들 등을 들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광민운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일단 차치하고 볼 때,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와, 또 그러한 세력의 등장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 대규모 인명의 살상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해도 신군부의 실체는 상당 부분 베일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이 글의 모두에서 제기한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철우는 이 작품에서 최기성 대위의 입을 빌려(권2, 276-290) 광민운이 정권의 완전한 장악을 획책하는 신군부의 의도된 각본에 따라 전개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광민운이 실제로 그러한 의도에 따라 전개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한 것은 광민운의 비극이 ‘진압군의 무자비할 정도의 강경하고도 과격한 시위 진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군의 입장에서는 당시 상황이 계엄령 하였고, 따라서 시위 자체가 용인될 수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신군부 자체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의 장악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항변은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강경 진압이 전년도 10월에 있었던 부마민주항쟁보다도 더 강력한 시민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것을 작가는 광주가 대도시이기는 하나, 지역적인 폐쇄성으로 인해 시민들 전부가 한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진압군들에 의해 연행되고 부상당한 사람들과의 동일시가 쉽게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임철우는 설명하고 있다.
광민운 당시의 극한의 상황, 작가가 무석의 입을 빌어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상황(5권 17)에서 작품 속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처한 입장과 위치에서 행동의 방향을 모색한다. 대척점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명치와 무석이 자신들의 생각의 극점에서 토로하는 다음 말들은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의 사고의 방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저 눈앞의 도시 전체와 팔십만의 시민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그들 모두가 그 거대한 그물 속에 한꺼번에 갇혀 있는 거였다. 그들 모두는 서로가 똑같이 포획당한 물고기일 뿐, 결코 적도 원수도 아니었다. 적은 정작 다른 곳에 있을 터였다. 병사들을 일순간에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과 광기의 노리개로 만들어서 동족을 처참하게 살육하도록 만들고, 마침내는 형제와 친구끼리 서로 총구를 맞대도록 만들고 있는 자들, 저 거대한 그물을 한 손에 쥔 채 제멋대로 뒤흔들고 있는 자들. 이 추악한 범죄를 처음부터 음모하고, 조종하고, 관리하고 있는 자들. 바로 그들이었다. 적은. (권5 178) 명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총을 들게 되었을까. 칠수, 봉배, 헌혈하고 나오다가 총에 맞아 죽은 그 여학생,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이미 죽었거나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나 역시 잠시 후면 그들처럼 죽을 수도 있을 테지. 그뿐이다.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민주주의니, 자유니, 정의니 하는 거창한 주제 따위를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어. 난 다만 이 추한 현실을 용서할 수 없었을 뿐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는 것. 사람이 이렇게 개나 돼지처럼 처참하고 비루하게 죽임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말 어쩌다가 보니까 총을 들게 되었을 뿐이지. (권5 404) 무석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많은 눈물을 훔쳤고, 워즈워스의 시 구절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행했나(What man has made of man)’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스스로를 아무리 이성적인 존재라고 자처해도, 인간은 결국에는 그를 이끌어가는 의지나 순간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존재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정신적 * 육체적 고통과 그러한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내가 한 동안 탐독했던 고대 그리스의 작가들, 지금부터 거의 삼천 년에서 이천 오륙백 년 전의 작가들, 그러니까 호머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나,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에 묘사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인간의 물질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달리, 인간의 정신적인 면은 특히 감성적인 측면의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점도 돌이켜 보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서 필자가 주장하던 내용, 즉 왕이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생각하며--워낙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어떻게 보면 정권의 장악을 획책하던 신군부조차도 당시 큰 역사의 흐름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마저 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임철우가 광민운의 총체적인 진실을 소설이라는 틀 안에 담아내고자 하는 힘겨운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전작인 [붉은 산, 흰 새]에서 중심역할을 했고, 이 작품을 여는 역할을 맡았던 한원구를 홀대한 느낌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한원구]는 세상을 송두리째 저주하고,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래야만 하는 자기 자신을 기실 무엇보다도 가장 혐오하고 저주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권1 243)
이처럼 세상과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인물에서 한 동안 작품에서 사라져 있다가 친구인 천진수(그의 아들 정민도 진압군의 곤봉에 맞아 두부가 함몰된 상태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 무석과 명치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다음과 같이 급작스런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시대의 어마어마하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수레바퀴 밑에서 개개인의 삶과 운명이란 얼마나 미미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는 것인가를. 그 수레바퀴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누구든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채, 마침내는 폭포의 까마득한 낭떠러지까지 떠밀려가 저마다 무수히 찢기고 부서지고 바스라질 뿐이다. (314-15) 한원구의 생각
아아, 미쳤던 거여. 내가, 내가 지금껏 미친 꿈을 꾸고 있었던 거여. 평생 동안 스스로 밑도끝도없는 증오의 덫에 묶여서, 내 모든 소중한 것들을, 심지어 내 가족조차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파괴해왔던 거여. 아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제 와서 그 엄청난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 . .
. . .그 무서운 증오의 씨앗을 안겨준 것은 전쟁이었지만, 그 증오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하는 일은 오직 그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그럼에도 오로지 그 덫에 스스로 갇힌 채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귀단과 무석마저 불행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원구는 끝없이 절망했다. (316) 한원구
작품의 전개에 있어서 한원구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하더라도,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용술(자기 집의 머슴을 살던 사람으로 아버지를 죽인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음)의 처 사이에 불륜이 있었다는 비밀을 알아낸 것과,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등의 몇 가지 사실로 이러한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한원구의 인식의 전환은 한원구 내면에서 일어났다가 보다는 작가 자신이 광민운의 끝에서 얻은 역사의식을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 점에서 나는 한원구가 홀대를 받지 않았나 한다.
임철우의 세계관은 그가 지나온 우리 현대사의 그것처럼 무겁고 폭력적이고 음울하다. 되새기기 싫은 상처나 악몽처럼 끔찍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거나 회피할 때, 우리는 다시 상처와 악몽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의 온전한 정신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우리가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멍에가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인식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새로운 방향으로의 모색이 가능해 질 것이다. 광민운의 의미가 이 작품을 통해 조금쯤은 밝혀진 듯도 하나, 아직도 많은 부분은 의문부호로 남아 있다. 그 의문들은 10*26과 12*12, 그리고 광민운과 함께 당시 대표적인 인권 탄압 사례의 하나였던 ‘삼청 교육대’ 사건 등에 대해 좀 더 정확한 인식이 따를 때 조금씩 베일이 벗겨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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