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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광주 -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

by 길철현 2016. 3. 18.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광주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다. 고만고만한 이야기를 고만고만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는 생각. 그러다가 이미 헤어진 옛 애인의 집을 찾아가듯 가끔씩 소설을 한두 편 다시 읽어보면, 그런대로 흥미롭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하루에 비유하자면 석양도 훨씬 지난 시각에 자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시건방진 생각. 그러면서, 문학보다도 철학이 우리의 삶을 더욱 잘 조명해 줄 것이다. 아니 철학보다도 정신분석이. 내 관심은 나의 본령이었던 문학에서 차츰 멀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어느새 나는 다시 우리 시를 외우고 소설을 읽고 있다.

  공선옥(나는 그녀의 이름에서 항상 병신춤의 대가인 공옥진을 떠올린 듯하다. 그녀의 글도 공옥진의 춤처럼 병신스러울 것이라는 제멋대로의 추측을 했던가?)의 책은 십여 년 전쯤에 헌책방에서 두어 권 구입을 해두었으나, 다른 읽지 않은 많은 책들과 함께 책장의 자기 자리에서 먼지만을 들이키며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고 난 첫 느낌은, 마치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을 때처럼,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사실을 가지고, 정의의 편에서 불의를 지탄하는--어쩌면 안일하고 편리한 지점에서--이야기를 후일담 형식으로 우려먹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더욱이 작품 후반부에 해금이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농성에 참여하고, 또 승규가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군부대로 끌려가 의문사 당하는 사건들에 있어서는 이들이 소설 속의 인물로서 생동한다기보다는 어떤 공식에 이끌려 진행되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나는 이러한 나의 첫인상이 편견은 아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니 이 참에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자는 심사로, 그녀의 첫 작품집인 <피어라 수선화>와 장편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을 펼쳤다. 이 작품들(이 작품들이 나온 지도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났지만)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하 광민운이라 약칭)’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과 그녀의 인생살이의 신산함을 보다 절감하게 되었다(곁다리 삼아 한 마디 덧붙이자면 5*18 당시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정부의 언론통제와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는 광민운에 대해 까맣게 몰랐다. 고등학교 교련 선생은 광민운이 깡패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했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어여쁜 제목의 이 작품은 83년 봄에서부터 84년 봄까지 주로 광주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전개된다(이 작품을 읽을 때 소설 속 현재에서 과거로의 회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헛갈리기 쉽다. 그런데 이러한 회상 기법이 공선옥이 즐겨 쓰는 방식이라는 걸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은 딸 부잣집의 넷째 딸인 해금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그녀의 수다한 가족과 또 그녀의 수다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그렇게 길지 않은 소설임에도 이 수다한 인물들이--특히 친구들의 경우--작품 속에서 제가끔 목소리를 내는 부분들이 있어서 다소 산만할 수 있으나, 그들이 ‘광주’라는 공통된 공간 내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은 어느 정도 상쇄된다.

  이문열은 [하구]라는 단편에서 스물 전후의 시기를 ‘꽃다운 시절’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그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인 해금과 그의 친구들은 이 작품의 제목처럼 ‘가장 예쁜 시절’이자 ‘꽃다운 시절’을 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슴에는 3년 전 광민운 때 유탄에 맞아 죽은 친구 경애, 그리고 그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저수지에 빠져 죽은 수경이, 두 친구의 죽음을 멍울처럼 달고 있다(소설 속에 언급이 되고 있지는 않으나, 이 인물들은 주변에 광민운 때 죽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을 하나둘 혹은 그 이상 알고 있을 것이다). 공선옥이 ‘작가의 말’에서 직접 쓰고 있듯이 해금이와 해금이 친구들은 ‘저희들이 얼마나 어여쁜지도 모르고, 꽃향기 때문에 가슴 설레면 그것이 무슨 죄나 되는 줄 알고 그럼에도 또 꽃향기가 그리워서 몸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꽃다운 청춘들은 광민운이라는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성년기로 접어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 다양한 인물군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기쁨이나 상처를 가슴에 안고, 또 거기다 광민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등에 진 채로 스무 살 인생을 좌충우돌하면서 나아간다. 이 인물군이 펼쳐 가는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통속적이기도 하다. 고아와 다름없는 만영을 제외한다면, 경제적으로 가장 하층 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환.’ 그와 해금의 그 아름다운 사랑마저 결국 파탄에 이르고 마는 것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즐거워야 할 관계마저 허용하지 않는 암울한 시대였다는 작가의 인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문체는 수많은 말장난(예를 들자면 주인공의 이름이 ‘암꺼나 해’자라든지, 친구의 이름인 정신이를 두고 전화상으로 ‘정신이 있어요’ 운운하는 부분, 또 ‘환이 나오자 어두운 마당이 환해졌다’라고 하는 부분 등등)과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을 포함하여 경쾌함이나 발 빠름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젊음의 박동하는 생명력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이러한 문체는 이 작품의 비극적 사건들과 엇박자를 내면서 묘한 긴장 관계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긴장감이 소설의 끝까지 유지되고 있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이 당시의 시대 자체가 주는 중압감에 작가가 짓눌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앞서 이야기한대로 이야기꾼으로서의 공선옥의 입담이 이 지점에 와서는 그 기력이 쇠한 것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구해 읽으면서 그녀의 유년 시절, 그리고 젊은 시절의 체험이 그녀의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좀 더 따라가 볼 것이다. 우리 삶의 아픔이라는 것이 어떤 형식으로든 끝까지 표출되어야(꾹꾹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녀가 앞으로도 더 광주를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그녀 자신의 가장 진솔한 체험이 그 시대의 핵심에 가닿아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랄 수 있는 광주의 아픔에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