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속의 개인--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최인훈의 대표작인 [광장]이 발표된 지도 벌써 40년 이상이 지났다. 거기다 작품 속의 대부분의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이해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들을 고친 전집판 [광장]이 처음 나온 지도 벌써 25년이나 지났다. 사실 최인훈은 이 작품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번 고쳤다. 작가가 기왕에 발표된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은 한편으로는 작품에 대한 불만족의 표시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작품을 보다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는 작가의 각별한 애정의 소산으로 봐야할 것이다. 일단 이 문제는 이 정도로 차치하더라도, 이 전집판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이 작품이 여전히 우리에게 심리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논의의 대상이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요 몇 년간의 남북 화해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명준이 처했던 것과 별반 변함이 없는 분단이라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혼란스럽고 과도기적인 사회를 살아나가는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서 주인공 이명준이 시대를 넘어서서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인가?
[광장]을 내가 처음으로 접한 것은 15년 전,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때이다. 같이 하숙을 하던 친구가 가지고 있던 것을 읽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이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대입이라는 힘겨운 싸움 끝에 푸르른 꿈을 안고 대학이라는 광장에 들어선 나를 맞이한 것이 최루탄과 화염병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그 보다 훨씬 더 격심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살아간 이 작품의 주인공이 직면했던 어지러움을 보며, 사회와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인 개인과의 관계를 어렴풋이나마 따져보기 시작했으리라. 또,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받아온 반공 교육이 투사하는 그런 북한 외에는 북한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는 시점에서, 비록 과거의 모습이긴 하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북한의 모습에서, 비록 정치 체제는 다를지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호흡하고 생활하는 곳으로서 북한을 바라보게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때 나를 사로잡은 [광장]의 매력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에도 나는 이 작품을 몇 번 더 읽었고, 우수한 장편([광장]은 분량으로 볼 때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좀 짧긴 하다)이 드문 우리 나라 소설사에서, [광장]이 우뚝 솟은 봉우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은 일관되게 가져 왔다. 나는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흡인력의 핵심은 무엇인가, 또 내가 기왕에 가져왔던 생각은 정당한 것인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광장]은 최인훈이 문단에 데뷔하고 불과 일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발표되었는데, 이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문학적인 천재성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와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저자 자신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4*19 혁명 직후의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발표될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한 개인의 문학적 재능과 정치적 자유가 행복하게 결합한 예이다. 이러한 4*19혁명 직후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탄생한 [광장]이 이후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우선 이 작품이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가장 큰 당면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분단 현실에 대한 최초의 생생한 증언이라는 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분단 현실은 이 작품 이후 판문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박상연의 [DMZ]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제목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우리 문학의 한 중심축이 되어 왔다. 더 나아가 [광장]은 남북한의 사회 체제*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노골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정권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이 월남하기 이전 몇 년간의 실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시대의 추이에 따라 남한의 정치*경제 등 제반 상황이 엄청나게 변했으며, 또 북한의 경우에는 현재 극심한 경제난 아래 허덕이고 있음으로 해서, 최인훈이 주인공 이명준을 빌어 소리 높이 외치던 주장들이 이제는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빛이 다소 바랜 것도 사실이다. 작가가 ‘변하는 것을 소재로 하면서 효력이 변하지 않는 것을 만드는 모순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 문학이다’1고 말하고 있듯이, 분단이 고착화되고, 전쟁을 직접 체험한 세대의 다수가 죽은 현재에 와서 [광장]이 가지는 의미, 즉 <효력이 변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가를 좀 더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으리라.
[광장]은 해방 이후부터 6*25가 끝날 때까지의 우리 현대사의 격동기를 살다간 한 젊은이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과 북 양쪽 다를 경험하게 되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정을 서문에서 "그는 어떻게 밀실을 버리고 광장으로 나왔는가. 그는 어떻게 광장에서 패하고 밀실로 물러났는가"(16)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이라는 말, 그리고 ‘광장’의 상대편에 놓여있는 듯이 보이는 ‘밀실’이라는 말은 이 작품 전체에서 약방의 감초 이상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데, 비유적으로 사용된 이 두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듯하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회사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15)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을 ‘광장’과 ‘밀실’ 이렇게 이항으로 단순화하여 나눈 최인훈의 착상은 기발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그 비유의 적절함이 콜럼버스의 달걀을 연상시킨다. 저자가 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는 우리 인간은 ‘광장’과 ‘밀실’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이며, 둘 중 어느 한쪽이라도 손상될 때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어떤 궤도를 따라 일관되게 흘러가는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듯이, 이 광장과 밀실이라는 말도 소설 속에서는 다양하고 모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은 "운명을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또 단순히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광장과 밀실은 때에 따라서는 각각 북한과 남한을 표상하기도 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와 사랑을 가리키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밀실이라는 말을 써야할 곳으로 보이는 경우에 광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기도 하다. 광장과 밀실이라는 비유어의 지나친 사용과 의미의 모호함이 작품 이해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광장과, ‘개인적 공간’으로서의 밀실이라는 기본틀 위에, 뫼비우스 띠의 경우처럼 광장과 밀실은 상대편에 놓여있는 듯이 보이면서도, 실지로는 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관념 철학자의 달걀" 이명준은 이 광장과 밀실을 어떻게 밟아나갔는가? 철학과 3학년 이명준은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청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꼬리가 붙은 범죄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튼튼하다고 믿었던" 그의 밀실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것을 본 그는 사랑하는 여인도 배신하고 "때묻지 않은 새로운 광장"으로 간다는 환상을 품고 월북한다. 그의 꿈은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꼭두각시 뿐 사람은 없"는 "잿빛 공화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광장에서 패배한 그는 은혜라는 여인에게서 구원을 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자가 그를 배신한다. 6*25가 나고 정치보위부원으로 서울로 온 그는 온갖 고문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다시 은혜를 만나게 되나, 그녀는 전사하고 만다. 은혜의 죽음으로 "마지막 돛"마저 부러지고 포로가 된 이명준은 제3국행을 택한다. 배를 타고 제3국으로 가는 도중 그는 자살하고 만다.
소설 속의 이명준이 걸어간 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와, 그가 속한 사회 혹은 체제와의 불화이다. 그러한 불화는 남한에 있을 때는 형사의 불법적인 구타로, 또 북한에서는 자아비판의 형태로 극점에 달한다. 이러한 불화의 극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언제나 굴복이다. 그와 사회와의 불화는 북한에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그로서는 불가항력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또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의 이상주의적 관념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로서는 그러한 불화의 상황을 풀어나갈 힘이 없기 때문에 패배하고 만다. 그가 성애에 몰두하고, 여성에게서 구원을 찾는 것도 한편으로는 광장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가 사회와의 불화 가운데서도, 사회가 그를 발붙일 곳 없는 상태로 몰아부치고 있다는 판단이 있기 전까지는 먼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비판만을 일삼은 것이 아니라 "광장으로 시민을 모으는 나팔수"를 꿈꾸었고, 북한에서도 그 "사회를 바른 모습으로 돌리고, 그런 모습에 맞춰 남녘을 끌어붙"이기를 기대했다. 그가 월북을 결심하게 되는 것도 자신이 남한 사회에 더 이상 발을 붙일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또 포로가 된 그가 제3국행을 택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북한이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가지고 온" 포로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 그의 자살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를 따라오던 갈매기들이 죽은 은혜와 그의 태어나지 않은 딸이라는 걸 명확히 인식하는 순간,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의 행동은 그러므로 그들의 용기와 사랑에 화답하려는 적극적인 몸짓으로 봐야할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체적인 노력으로 성취한 것이 아닌 해방으로 남북이 분단될 수밖에 없는 시점에서, 박래품 이데올로기의 시험장인 남과 북 어디에서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거기다 참혹한 동족 상잔의 한 가운데 서게 되고, 급기야는 애인의 죽음까지 목도해야하는 상황은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는 점이다.
몇 년 전 6*25 특집 다큐멘터리에서인가 이명준이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저렇게 되었으리라, 아니 그보다는 이명준과 배를 같이 탔던 석방 포로 중의 한 명이라고 짐작되는 인물을 만났다. 그는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십 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남쪽에 살고 있는 형님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노인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동생은 북한군으로 형은 남한군으로 6*25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형제가 서로의 목에 총부리를 들이대야하는 전쟁은 도대체 어떤 전쟁이며, 그 비극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최인훈에게 있어서도 분단과, 분단에 따른 우리 민족사의 비극은 위의 형제나, 동시대의 어느 누구 못지않게 뼈저리게 와닿은 생생한 현실이었기에,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 정치적 자유를 만나자 마자 그 보따리를 풀어놓은 것이리라. 그 보따리 속의 주인공인 이명준은 젊고, 자기중심적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모순이 많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간 궤적이 시간을 넘어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혹한 시대의 한 가운데를 걸어간 증인으로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광장]을 다시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결과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최초의 판단이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더욱 즐거웠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2001년)
- 최인훈, ‘소설 [광장]을 고쳐 쓴 까닭’, [문학과 이데올로기(전집 12)](문학과지성사, 서울), p37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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