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 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 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또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과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있고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색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든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로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게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서 균일하게 있기에.
--- 길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있다 라는. 이 길에 아주 많은 표지들이
있다. 있는 것은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 없으며 완결된 것이라는.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부 함께
하나로 연속적인 것으로 있기에. 그것의 어떤 생겨남을 도대체 그대가 찾아낼 것인가?
어떻게, 무엇으로부터 그것이 자라난 것인가? 나는 그대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라고
말하는 것도 사유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 라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사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필요가
먼저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자라나도록 강제했겠는가?
따라서 전적으로 있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없거나 해야 한다.
또 확신의 힘은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 곁에 생겨나도록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디케(정의)는
족쇄를 풀어서 생겨나도록 또 소멸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꽉 붙들고 있다. 이것들에 관한 판가름은 다음의 것에 달려 있다.
있거나 아니면 있지 않거나이다. 그런데 필연인 바 그대로,
한 길은 사유될 수 없는 이름 없는 길로 내버려두고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므로) 다른 한 길은 있고 진짜이도록 허용한다는 판가름이 내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있는 것이 나중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생겨났다면 그것은 있지 않고, 언젠가 있게 될 것이라면 역시 있지 않기에,
이런 식으로 생성은 꺼져 없어졌고 소멸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우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체가 균일하기에.
또 여기에 조금도 더 많이 있지도 않고(그런 상태는 그것과 함께 이어져 있지 못하도록 막게 될 것이다).
조금도 더 적게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전체가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다.
이런 방식으로 전체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있는 것이 있는 것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속박들의 한계들 안에서 부동이며
시작이 없으며 그침이 없는 것으로 있다. 왜냐하면 생성과 소멸이
아주 멀리 쫓겨나 떠돌아다니게 되었는데, 참된 확신이 그것들을 밀쳐냈기 때문이다.
같은 것 안에 같은 것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 자체만으로 놓여있고
또 그렇게 확고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강한 아낭케(필연)가
그것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한계의 속박들 안에 [그것을] 꽈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미완결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결핍된 것이 아니며, 만일 결핍된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것이 결핍된 것일 테니까.
같은 것이 사유되기 위해 있고 또 그것에 의해 사유가 있다.
왜냐하면 있는 것 없이 [사유가] 표현된 한에서는 그것에 의존하는데
그대는 사유함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왜냐하면 있는것 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거나 있게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모이라(운명)가 바로 이것을 온전하고
부동의 것이게끔 속박하였기에 그러하다. 이것에 대해 모든 이름들이 붙여져왔다.
가사자들이 참되다고 확신하고서 놓은 모든 이름들이
즉 생겨나고 있음과 소멸되어감, 있음과 있지 않음,
그리고 장소를 바꿈과 밝은 색깔을 맞바꿈 등이.
그러나 맨 바깥에 한계가 있기에, 그것은 완결된 것,
모든 방면으로부터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와 흡사하며,
중앙으로부터 모든 곳으로 똑같이 뻗어나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저기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다근가 조금이라도 더 작다든가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같은 것에로 도달하는 것을 막을 만한 있지 않은 것이란
있지 않고, 또한 있는 것은 있는 것 가운데 더 많은 것이 여기에. 그리고 더 적은 것이
저기에 있게 될 길이 없게 때문에.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가 불가침이기에
왜냐하면 모든 방면으로부터 자신과 동등한 것으로서, 한계들 안에서 균일하게 있기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80-86. 주석 생략. [심플리키오스가 인용한 것]
"그것", 즉 실재, 존재는 그것의 본성이 어떠하든,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존재는 말해질 수 있고, 내 사유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無)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는 말이나 사유의 대상일 수 없다. 왜냐 하면 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며, 무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단순히 존재할 수 있기만 할 뿐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결코 생성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무에서 나와야만 할 것인데, 무에서 나오는 것은 무이지 어떤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 실재인 "그것"은 처음에는 불가능했다가, 즉 무였다가 그 다음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있다."
왜 우리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있다"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기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생긴다면 진정한 생김, 생성이란 없다. 왜냐 하면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비존재로부터 생긴다면 비존재는, 존재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기 위해서, 이미 어떤 것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존재, "그것"은 그러므로 존재로부터 생기지 않고 비존재로부터도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존재에 통용되므로 어떤 것도 결코 전화(轉化)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약 어떤 것이 전화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어려움이 언제나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로부터 나오는가 또는 비존재로부터 나오는가? 만약 존재로부터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비존재로부터 나온다면 당신은 모순에 빠지는데, 왜냐 하면 비존재는 무(無)이고 존재의 연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 즉 전화와 운동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있다." "즉, 우리가 그것은 있다고 말하는 한 가지 길만이 남아 있다. 이 길에는 존재하는 것은 완전하고 부동이며 무한하기 때문에, 창조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증거들이 매우 많이 있다."
코플스톤. [그리스 로마 철학사]. 김보현 옮김. 철학과 현실자. 81-82.
His first great assertion is that "It is." "It," i. e. Reality, Being, of whatever nature it may be, is exists, and cannot not be. It is, and it is impossible for it not to be. Being can be spoken of and it can be the object of my thought. But that which I can think about and speak of can be, "for it is the same thing that can be thought and that can be." But if "It" can be, then it is. Why? Because if it could be and yet were not, then it would be nothing. Now, nothing cannot be the object of speech or thought, for to speak about nothing is not to speak, and to think about nothing is the same as not thinking at all. Besides, if it merely could be, then, paradoxically, it could never come to be, for it would have to come out of nothing, and out of nothing comes nothing and not something. Being, then, Reality, "It" was not first possible, i. e. nothing, and then existent: it was always existent--more accurately, "It is."
Why do we say "more accurately, It is?" For this reason: If something comes into being, it must arise either out of being or out of not-being. If it arises out of being, then there is no real arising, no coming-to-be; for if it comes out of being, it already is. If, however, it arises out of not-being, then not-being must be already something, in order for being to be able to arise out of it. But this is a contradiction. Being therefore, "It" arises neither out of being nor out of not-being: It never came into being, but simply is. And as this must apply to all being, nothing ever becomes. For if anything ever becomes, however trifling, the same difficulty always recurs: does it come out of being or out of not-being. If the former, then it already is; if the latter, then you fall into a contradiction, since not-being is nothing and cannot be the source of being. Change, therefore, becoming and movement are impossible. Accordingly "It is." "One path only is left for us to speak of, namely, that It is. In this path are very many tokens that what is, is uncreated and undestructible, for it is complete, immovable and without end."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1. Greece and Rome. The New Man. 49-50
- 파르메니데스의 "일자(the One)는 존재하며, 전화(Becoming), 변화는 환상"이라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가 언어적 혼란에 빠져서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이 부분을 좀 더 천착해 보도록 하자. 추상적인 사고에 몰두하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것인가? 유물론자의 기원을 그에게서 찾는 이유는?
-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는 일자(the One)은 현상(감각) 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사유(추론)에 의해 논리적으로 귀결되는 존재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지만, 그가 논증을 통해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중요성으로 인해 이후 철학자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이상 깊이 파악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이후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