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고사
1.
첫 째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목이 좀 이상했다. 목덜미가 뻐근한 것이 잠을 잘못 자면 나타나는 상태와 비슷했지만 머리까지 그 통증이 전달된다는 점이 좀 달랐다. 고개를 숙여 책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도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젯밤 잠을 잘못 잔 때문인가?’
K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마냥 눕고 싶은 기분이었다. 바닥에 누워 목을 마음껏 젖힌 채 편안히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제 학력고사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이러면 어쩌자는 거지. 왜 이렇게 난 재수가 없을까?’
‘아냐,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어젯밤에 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잘 때 몸부림이 심했던 것 때문일 거야.’
K는 이렇게 자위했다.
자습 시간. 하지만 학력고사가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선생님들도 별로 간섭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은 토요일 오후. 많은 아이들이 독서실에서, 집에서 공부를 한다면서 일찌감치 떠나버렸다. 그래도 K는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기에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며 책과 씨름을 해나갔다. 하지만 승부는 너무도 자명했다. 목은 뒤에서 누군가가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만 같았고, 머리는 횟가루를 풀어 놓아 뒤죽박죽 된 기분이었다.
책을 탁 덮어버렸다. 일정한 양의 공부를 마치고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면서 내일 공부할 것을 미리 체크한 뒤 책을 덮을 때 그 소리는 자장가처럼 푸근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거의 공부를 못한 것이다.
‘학력고사가 며칠 안 남았는데. . . .’
가방을 싸들고 학교를 나선 시간은 정각 7시였다. 도대체 럭키세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오늘은 푹 자자. 푹 자고 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
K는 목의 통증을 수면 부족으로 돌리면서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여기려고 했다. 책을 보지 않을 때는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네 시간이나 빠른 하교 길. 토요일 저녁인데도 거리의 불빛들이 음침하게만 보였다.
2.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손이 간 곳은 목 뒤였다. 그런데, 숙면이 통증을 지워버린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목 깊은 어딘가에서 악마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았다.
6시였다. 오전 시간 동안에 비교적 손쉬운 [정치경제]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신경이 자꾸 목 뒤로 가는 것을 막으며 책에다 정신을 집중했다. 두 시간 이상이 흘렀는데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서서히 기쁨이 솟아났다. 어제 일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어머니께서 밥 먹으라고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이라서 오늘은 가게에 좀 늦게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같이 밥을 먹게 되는구나.”
“정말 오랜만인데요. 이렇게 밥을 같이 먹는 것이 한 달 만에 처음인 것 같네요.”
어머니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밥을 차려놓고는 그보다 먼저 가게로 나가셨다. 그리고, K는 밤 열두 시가 다 되어서야 학교에서 돌아오기 때문에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일찍 남편을 여읜 K의 어머니는 남보다 교육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다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두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그녀 자신의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나가는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지난 십 년 간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왔던 것이다. K는 때로 어머니의 삶이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성적을 볼 때면 공부를 집어 치우고 자신이 일을 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러나, 아들 하나 잘 되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원인 듯한 어머니에게 턱도 없는 생각이었다.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은 식사를 마쳤다.
“밥을 먹든지 아니면 라면을 끓여 먹도록 해라. 내가 집에 있어서 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건데. . . . 여기 천 원으로 뭐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 먹고. . . .”
K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는 가게로 나가셨다.
책상에 다시 앉아 공부를 시작하자 마음도 착 가라앉고 집중도 잘 되었다. 어머니 때문인지도 몰랐다. 오전에 [정치경제]를 거의 다 정리했다. 라면을 끓여 먹고는 집 바로 앞에 있는 야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놀란 가슴이 어딘가에 있긴 했지만, 목의 통증이 가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이나 홀가분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백 미터도 채 안 되는 나지막한 야산이었지만 정상에 올라 마음껏 “야호”하고 외쳐보기도 했다. 약간은 쌀쌀한 날씨. 그러나 구름을 벗어난 햇볕이 따사로운 그런 날이었다. K는 학력고사가 며칠이나 남았는지를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3.
아침 통학 길의 버스는 언제나처럼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기 힘들 정도로 만원이었으나 K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모두가 죽을 상인 월요일 아침이었으나 조그만 시련이 그에게 힘을 가져다 준 것만 같았다.
점심시간까지 아무 이상이 없자 그는 마음을 놓았다.
‘단지 하루만의 병이었어. 너무 무리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 . .’
5교시는 국어시간이었다. 1학년 때 K의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은 중간 중간에 욕설을 섞어가면서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목덜미를 나무망치로 내리치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목이 뻣뻣해지고 덩달아 머리도 아팠다. 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에 K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목이 아파서 미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사한테 가서 진단을 한 번 받아 보지.”
그래도 K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J의 조언은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적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K는 그 말에서 별반 위로를 받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두 제 코가 석자인 판국에 남의 일에 더 이상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책에다 머리를 파묻고 있는 친구를 더 이상 귀찮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어떻게 이 일을 헤쳐 나갈까 생각을 모아보려 애를 썼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자꾸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마음이 흘러갔다.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필요가 없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죽을병에라도 걸린 듯한 두려움이 K를 휘감았다.
‘과연 의사 선생님이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이런 병은 고치기가 무척 힘이 든다던데.’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도 한두 단 남은 채소를 파시려고 밤늦게까지 추위에 떨다 오시겠지.’
7교시 수업을 마치자말자, K는 가방을 챙겨 종례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교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걸었다. 무거운 가방의 무게도 잊고.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샌가 B 시외버스 정류장 근처까지 와있었다. 그곳은 공단지역으로 공기가 몹시 탁하고 개울에는 역한 냄새를 풍기는 폐수가 흘렀다. 하지만 K는 이 더러운 곳이 싫지 않았다.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그를 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언젠가 이 부근에서 본 한 여학생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억이 무의식중에 K를 이곳으로 끌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그 년을 막 때려줬지.”
K의 앞에서는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 두 명이 히히덕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농담이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뛰어가서 그 학생들을 마구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K는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어디에도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는. 퇴근길의 시민들이 어디에선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고, 자신이 많이 지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까지 앉아서 가고 싶었기 때문에 K는 버스 두 대를 그냥 보냈다. 출발 지점으로부터 거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나 퇴근 시간이어서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K는 그 다음 버스를 타야만 했다. 버스 안쪽으로 쑥 들어갔다. 누구 하나 K의 가방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불행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때 K가 서있는 곳으로부터 두어 자리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섰다. K는 백 미터 달리기 출발 신호를 들은 선수처럼 허겁지겁 그 자리로 뛰어가 앉았다. 자리를 잡았다는 안도감에 K는 모든 고민을 잊어버린 듯한 표정이 되었다.
(1984년 - 85년)
(2010년에 약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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