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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62-1

by 길철현 2022. 6. 14.

공부를 한답시고 도서관에서 낑낑거리던 석명이는 보고 있던 프레쉬먼 잉글리쉬를 탁 덮어버렸다. 정말 속이 다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중간고사가 1주일 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화창한 봄날에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있는다는 게 한심스러워졌던 것이다. 마땅히 신나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도서관을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흥겨워 질 것 같았다.

낯선 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가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버스의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을 별 생가 없이 내다보는 게 석명이에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그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전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온 이래 만 이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서울은 낯선 도시였다.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긴 해도 꽉 짜여진 고등학교 생활이 좀체로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성수대교를 지나 개포동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쪽 개포동도 낯선 곳들 중 하나였다. 버스엔 중년의 신사 한 분, 아주머니 한 분, 또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세 명이 재잘거릴 뿐이어서 석명이는 종점에 다왔음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언젠가 한 번은 버스 종점인데도 안 내리고 있다가 운전수의 눈총을 받은 적이 있어 버스 종점에 가까워졌다 싶으면 재빨리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별 생각없이 걸어다녔다. 복덕방에는 아파트 시세가 너절하게 붙어 있었고, 일요일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아파트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석명이에게 아파트는 굉장히 갑갑하게 보였다. 혹시 사람들은 저 갑갑한 아파트 방구석에서 서로의 숨을 막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느 낯선 거리에서 다시 버스를 집어탔다. 버스의 번호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론가 멀리만 가 분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러나 돌아올 수 없는 곳은 안 된다. 버스는 강남의 대로를 신나게 달려 나갔다.

그 때였다. 그녀가 버스 위에 올라선 것은, 그리고 석명이 앞에 와 선 것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에 별 생각 없이 앉아 있던 석명이는 순간적으로 자기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홍빛 티셔츠에 약간 물 빠진 청바지를 자연스럽게 받쳐입은 모습이라니. 사람이 아니라 요정인 것만 같았다. “여기 앉으세요.”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니, 누가 자신 같이 별 볼일 없는 삼류 대학생에게 요정에게 말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그녀의 출현으로 버스 안이 한층 밝아진 느낌이었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칠 것 같은 두려움에 정면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만 그것도 몰래 몰래 했다. 그녀의 옆에 서있는 노동자 타입의 중늙은이가 못에라도 박힌 듯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건다면 내가 그녀를 보호하리라.’

이대로 영원히 버스가 달린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이렇게 청순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니. 많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아왔지만 지금 자기 앞에 서있는 여인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짐을 느꼈다.

버스가 한강을 건너는 척 하다가 중간에 유턴해서는 노량진 쪽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떨리는 그의 가슴을 전혀 모르는 그녀는 버스 문으로 가 섰다. 그리고 버스가 정류장에 서자말자 사뿐히 내렸다. 이건 너무도 짧은 만남이다. 그녀를 따라내려서야 했것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버스는 무심히 출발하고 석명이는 앞에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향해 기도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고개를 돌려주기를.

내 마음을. 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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