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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산문

현대 물리학 -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원리

by 길철현 2022. 7. 27.

상대성 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핵심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양자역학과, 양자역학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론인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사실 유튜브를 비롯하여 인터넷에 전문가들의 영상이나 글이 많이 잘 정리되어 올라와 있기 때문에 그 글들을 읽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인문학도로서 어설프긴 하지만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을 바탕으로 내 생각들을 정리하고 이 새로운 현대 물리학의 등장 배경이나 현재 우리의 사고와 생활에 미친 영향 등도 파악해 볼 것이다. 수학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비전문가의 글이라 억측이나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나, 이 부분의 지식이 없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회를 빌어 내 생각을 좀 더 명료화, 체계화하고자 하고자 하는 동기가 더욱 부각되는 듯도 하다. 

 

2개월 정도 전에 코플스턴이 쓴 [서양철학사]를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9권으로 된 이 대작을 읽어나가면서 개별 철학자에 대한 공부를 병행한다면 서양 철학에 대한 이해가 좀 깊어지리라. 한 십 년은 걸리지 않을까?).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물질이 무엇인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여러 가지 설들이 난무하던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데모크리토스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atomos)는 어원적 의미를 지닌 원자론을 주장하였고, 이 용어는 근대 물리학에 이르러 돌턴의 원자론에서도 그대로 차용되었다. 변화무쌍해 보이는 이 세상이 실제로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인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뉴턴의 운동법칙이나 만유인력 등과 어우러져 근대  물리학은 세상을 확정적인 법칙성 아래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돌턴이 원자론을 내놓은 것이 1808년이었다(원자의 개수는 백여 개 남짓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론은 한 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인 1897년 J.J. 톰슨이 전자를 발견함으로써 틀린 것으로 판명 나고 말았다(전자라는 말을 밥 먹듯이 쓰면서도 전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도 많으리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어원을 갖고 있는 원자는 모순적이게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현대 물리학은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또 이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들은 이제 소립자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소립자(혹은 기본 입자)가 물질 또는 장(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물질 요소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소립자(원자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포함하여)는 가장 최근인 2013년에 발견된 힉스 입자를 포함해 300종이 넘는다고 한다(우주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연속해서 진동하는 끈으로 보는 초끈이론이 1970년대에 나왔는데 이 이론의 정당성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판명이 날 듯하다). 

 

20세기 현대 물리학은 소립자의 발견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요즈음엔 고등학교에서도 이 부분을 가르치는 모양인데 우리 때만 해도 교과서에는 소립자에 대한 설명이 전무했다). 왜냐하면 소립자 차원에서는 이전의 근대 물리학에서 주장한 법칙들이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글의 처음에 나왔던 용어인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양자는 '물리량이 취할 수 있는 최소량을 의미한다.' '물리량이 연속적인 값을 가지며, 0이 아니지만 임의로 작은 값을 가질 수 있다'는 근대 물리학(혹은 고전 물리학)의 믿음과는 달리, '물리량이 양자화된다는 것은 물리량이 이 최소량의 정수배로 띄엄띄엄한 값을 갖는다'는 것이다(한국물리학회 물리학백과에서 인용. 이 부분은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다가 이번에 글을 쓰면서 새로 접하게 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양자역학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 이러저러한 힘을 받으면 어떤 운동을 하게 되는지 밝히는 이론' 정도가 될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양자역학-양자의 세계가 열리다. 김재영 물리산책). 나 자신의 이해가 부족하여 인용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 세계의 실상은 우리가 보통 믿고 있듯이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적인 불연속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정도가 될 듯하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소립자의 세계(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원자나 더 나아가서는 분자 차원의 미시세계에도 적용되는 듯한데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경계는 논란이 많은 부분인 듯하다. 그런데 왜 소립자 역학이라고 하지 않고 양자역학이라고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찾기 힘든데 추측상 소립자가 '양자화된 장의 국소적 진동의 결과'라는 정의에 따른다면 소립자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용어를 쓰는 듯하다). 거시세계에서는 근대 물리학이 적어도 지구 내에서는 지금도 잘 적용된다. 하지만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잘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거기다 시각을 우주로 넓혀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질량 때문에 공간이 휜다든가, 시간과 공간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시공간으로 봐야 한다는 것, 또 빛의 속도를 물리 세계에서의 극한으로 보고 그 때문에 '동시각의 상대성' 등 여러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근대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잘 보여준다.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5년 전쯤인 20대 초반에 읽은 도모나가 신이치로의 [양자역학적 세계상]이라는 얇은 책을 통해서였다. 양자전기 역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그는 수학은 최소화하고 재판 형식을 차용하여 양자의 오묘한 성질을 아주 흥미롭게 설명했다. 신이치로가 예로 들고 있는 양자는 광자(光子 photon)이다. 얼핏 여자 이름 같기도 하고 어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쉽게 표현하자면 빛 입자(빛 알갱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양에서 매 순간 뿜어져 나오는 빛의 성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근대 물리학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근대 물리학이 발전하고 있던 17세기에 호이겐스는 빛을 파동으로 파악했으며 뉴턴은 입자로 보았다. 광자라는 용어 자체는 뉴턴의 설을 지지하는 듯 보이지만, 현대 물리학에서는 빛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두 가지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양자역학적 세계상]의 3장 내용은 광자 재판이다. 소설처럼 전개되는 이 부분의 내용이 정말 흥미로워 20대 초 영어 수업 시간에 부족한 영어로 설명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제대로 표현이 안 되었을 것이고 듣는 사람들도 이해를 못했을 것이지만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다. 워낙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광자는 동시에 두 곳(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지만, 우리가 관측을 하는 경우에는 한 곳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의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던 까닭은 '어떤 물체도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철학적인 전제 혹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내용일 뿐만 아니라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에도 필요해서 좀 길긴 하지만 인터넷에 요약된 내용을 옮겨본다(워낙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세부 내용을 잘 살려낼 수 없어서).

 

'광자 재판에서 재판을 받는 범인은 "빛 알갱이"인 광자였다. 광자는 범행을 하기 전 방 밖에 있었다. 그러나 창문이 두 개 나있는 방에서 창문을 통과하여 범행을 저지르고, 창문 반대편 벽에 범행 흔적을 남기고 체포되었다.

 

재판의 핵심은 범인인 광자가 어느 창문을 통해서 방으로 침입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검사는 광자에게 두 창문 중 어느 창문을 통해서 방으로 침입했는지 물었다. 광자는 두 창문을 모두 통과했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광자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분개했지만, 변호사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변호사의 변론 요지는 다음과 같다. 광자가 어느 한 곳에서 관측되는 순간 다른 곳에서도 동시에 관측된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자는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창문에 광자가 통과하는지 여부를 감지하는 관측 장치를 설치해 놓으면 광자는 두 창문 중 하나만을 통과하여 방으로 침입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감지 장치가 없는 경우에는 광자가 두 창문을 동시에 통과한다. "관측하는 동안"에 두 창문 중 하나만을 통과한다는 사실만으로 "관측하지 않는 동안"에도 두 창문 중 하나만을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두 창문에 감지 장치를 달아 두 창문 중 하나만을 통과하도록 했을 때, 반대편 벽에 나타난 결과와 관측하지 않은 채로 창문을 통과시켰을 때 반대편 벽에 나타난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 창문에 관측 장치를 달아 두거나 경관을 두 창문 중 하나만을 통과하도록 한 실험 결과는 처음에는 두 창문 중 우측 창문만을 열어 놓고 실험을 하고, 다음에는 좌측 창문을 열어 놓고 실험을 한 후 두 결과를 더한 결과와 같다. 두 경우에는 모두 광자가 한쪽 창문만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감시를 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따라서 관측하지 않는 경우에는 두 개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광자가 두 창문을 동시에 통과하는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 바람의 혼 '광자는 홍길동')

 

이 광자재판을 통해 신이치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광자와 같은 소립자의 차원에서는 관측 행위 자체가 관측 대상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소립자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지니는데, 관측을 하지 않을 때는 파동의 성질을 보이고(이것은 결과물로 파악한다) 관측을 하면 입자의 성질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인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도 연결이 되는데,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이 부분도 인용을 해본다.

 

'빛은 간섭이나 회절과 같은 실험에서는 파동의 성질을 보여주고, 광전효과 실험에서는 입자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한 가지 실험에서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전자나 양성자 같은 입자들도 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어는 빛이나 입자들이 가지는 이러한 이중성을 상보성 원리로 정리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상보성 원리 - 입자와 파동의 협주. 물리산책, 곽영직.) 

 

이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넘어가 보자.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가장 간단명료한 설명은 소설가 성석제의 글이다(물론 그도 어디에서인가 읽은 것을 옮긴 것이겠지만).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면 '아무리 해도 물의 온도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도계를 넣는 순간 아무리 적을 지라도 온도계가 물의 온도에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소립자 차원에서는 엄청나게 확대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관측 자체가 관측 대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고 마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쉬운 말로 하자면 근대 물리학에서 주장하듯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위치의 측정이 운동량을 변화시키고, 반대로 운동량의 측정이 위치를 변화시켜 오차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불확정성의 원리. 물리산책. 곽영직). 바꿔 말해 양자역학의 경우 '측정 과정과 분리된 물리량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측정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고(네이버 지식백과. 상보성 원리 - 입자와 파동의 협주. 물리산책. 곽영직.)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오차를 어느 한계 이상으로 줄일 수 없어서 확률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확고한 인과법칙이 아니라 확률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신이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로 지속적으로 양자역학을 반박하고, '통일장 이론'으로 해결해 보려 했으나, 이후의 과학사는 양자역학의 손을 들어주었다(그래서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역학에서는 어느 정도 확정적인 원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또 슈뢰딩거도 고양이 사고 실험으로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거시세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 양자역학이 모순적임을 설명하려 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이 사고 실험은 오히려 양자역학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간단히 몇 마디 말로 양자역학을 소개하고 있으나 대중적으로 가장 친숙한 물리학자인 파인만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실제로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양자역학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과학 문명 전반에 이용되고 있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반도체, 초전도체, 나노기술 등등. 그 다음 문학 더 나아가서 문화 전반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에도 현대의 과학 혁명이 일정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양자역학은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세상이 자신들이 보고자 하는 방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까지도 이어졌으나,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우리의 인식과 외부 세계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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