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타워에서 나온 나는 타워 브리지를 건넜다. 외관 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입장료도 비싼 데다가 그렇게 볼거리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그냥 패스했다.
템즈 강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퀸즈 워크(Queens Walk)를 따라 걷는데,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진짜 많았다. 강 바로 옆에 건물들이 있다는 것도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규모 면에서도 템즈 강은 한강보다 작았지만, 우리나라처럼 하상계수가 크지 않아서 주변에 넓은 공지가 따로 필요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인파에 섞여 정처없이 걷는 기분은 묘했다. 이 영국 땅에 어쩌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생각, 여행객 혹은 관광객으로 별다른 이해 관계 없이 거리를 걷는 기분, 그건 소외인 동시에 해방이었다. 그렇게 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보니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 또는 배우로, 더 나아가서는 경영진의 일부로 참여했던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여 다음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하고 나아갔다.
런던 타워에 들어갔다 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17세기에 세워졌던 이 극장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했으나, 티켓을 사고, 대충 전시물을 훑어보고 투어에 들어가서 설명을 들으니까, 1997년에 지은 것이라고 했다.
매트릭스의 여주인공인 캐리 앤 모스를 연상시키는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해설을 해주었다. 그녀는 이 글로브 극장에 소속된 배우이기도 했다. 그녀의 설명은 내가 강의하고 있는 [독학사 칼리지]의 '영국문학개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관심을 갖고 들었는데, 미처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사실들도 이야기해 주었다.
이 극장이 완전 대규모는 아닌데도 3천 명까지 수용하곤 했으니 당시 연극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현재는 최대 수용 인원이 천 칠백 명 정도). 서서 연극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로 몸을 돌릴 여유도 없이 빽빽한 상태에서 관람했다고. 입장료는 1/6펜스였는데, 한 번 나갔다가 들어오면 다시 돈을 내야 해서 양동이(bucket) 같은 곳에 소변을 보았다고. '오줌을 누다'라는 구어 표현 중 하나인 'take a piss'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말도. 그리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1998년에 나온 유명한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Shakespeare in Love)에도 나오듯이 이 당시에 공식적으로는 여자들이 무대에 오를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여자 배우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했던 영국 연극의 황금기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는 여자들이 무대에 오를 수 없었으며, 여자들이 배우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7세기 후반 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한 다음부터였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는데, 공식적인 내용과 실제 상황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인 모양이었다. 이 밖에도 연기 중에 진짜 총을 사용하여 배우를 향해 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쏘았는데 임산부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또 진짜 대포를 사용해서 음향 효과를 내다가 극장에 불이 났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이 기민하게 피난해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 등은 흥미로우면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글로브 극장은 최대한 고증을 해서 옛날 방식 그대로 복원하느라 엄청난 건축 비용(50억 이상?)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가 설명을 하면서 자꾸 나를 보는 듯했고, 나는 한편으로는 설명을 들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와의 달콤한 로맨스의 환상에 젖어 드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어떤 놈의 휴대폰이 울려 그녀의 설명을 방해하고 내 환상도 깨는가 했더니 나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앉아서 연극을 볼 수 있는 관람석 앞에는 'Bay'라는 말 다음에 알파벳 대문자가 적혀 있는 것이 일종의 지정좌석제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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