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에서
고 은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에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한 채를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커다란 절을 버리기까지
저문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 곡성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 마루도 깨운다.
깨어 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 있거든 저문 강물을 보라.
[감상]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사를 성찰하고 인생의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서 삶과 죽음을 그대로 끌어안으려 하고 있다.
'한국시 및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동엽 - 산에 언덕에 (0) | 2022.12.06 |
---|---|
이시영 - 형님네 부부의 초상 (0) | 2022.12.05 |
김용택 - 섬진강 1 (0) | 2022.12.05 |
이동순 - 운문사 비구니 (0) | 2022.12.03 |
유치환 - 석굴암대불 // 서정주 -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1) | 2022.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