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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및 감상

고형렬 - 거미의 생에 가 보았는가

by 길철현 2023. 4. 24.

천신만고 끝에 우리 네 식구는 문지방을 넘었다​
아버지를 잃은 우리는 어떤 방에 들어갔다​
아뜩했다 흐린 백열등 하나 천장 가운데 달랑 걸려 있어​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간혹 줄이 흔들렸다​  

우리는 등을 쳐다보면서 삿자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건너편에 뜯어진 벽지의 황토가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건너가고 윙 추억 같은 풍음이 들려왔다​
귓속의 머리카락 같은 대롱에서 바람이 슬픈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인간들에게 어떤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에 늙은 학생같이 생긴 한 남자가​
검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남자의 바로 ​
책 표지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넘긴 것 같은 조금 수척한 남자가 멈칫했다​ 
 
앞에 가던 형아가 보였던 모양이다 남자는​
형아를 쓸어서 밖으로 버리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모친은 그 앞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아들이​
사라진 지점에서 어미는 두리번 거리고 서 있었다​ 
 
​그때 남자가 모친을 쓸어 받아 문을 열고 한데로 버렸다​
먼지처럼 날아갔다 남자는​
뒤따라가는 아우에게 얇은 종이를 갖다 대는 참이었다​
마치 입에 물라는 듯이​
아우는 종이 위에 올라섰다 순간 남자는​
문을 열고 아우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나는 뒤에서 앙 하고 소리치며 울었다 그 울음이​
들릴 리가 만무했지만​
그때 남자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혈육들은 그 후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 소리만 그날 밤새도록 어디론가 불어 갔다 어둠 속​
삿자리 밑에서 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슬프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긴 미래사였다​
남자는 단지 거미를 죽이지 않고 내다 버렸지만​
그날 밤 나는 찢어진 벽지 속 황토 흙 속으로 들어갔다​ 
 
​ 
 삿자리 : 삿(삿갓사초)으로 엮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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