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이영광 시인 해설]
시인은 이 시를 고교생이던 1954년에 썼다고 한다. 이것으로, 당시 청소년 예비 시인들의 등용문이었던, 《학원》지가 주관하던 <학원문학상>(1회)를 수상해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역시 시인 지망생이던 유경환 시인의, "친구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학교 뒷산에 올라가 시를 썼다는 일화가 여기저기에 보인다.
나는 이 시를 1981년 고교 신입생 시절에 처음 접했는데, 원문 그대로는 아니었다. 내가 살던 안동의 어느 고교 문학 서클에서 발간한 문집에 이 시가 표절이 되어 실린 탓이었다. 그 학생은 딱 한 낱말, '서울'을 경북 '영천'으로 고쳐선 출품했고, 그것이 그대로 거기 실려 작은 물의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나는 그때, 이 시의 6연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시는 작품의 정황을 전하는 진술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여 구조적 안정감을 얻고 있다. 화자는 편지를 읽는 중이다. 대화투로 된 2~5연은 누구의 목소리일까. 이 부분은 아마 화자가 읽고 있는 "서울 친구의 편지" 내용인 듯하다. 편지를 읽고 난 감회가 아니라 편지 내용이라면, 화자는 어느 새 시상을 액자식으로 짜고 있는 셈이다.
편지를 재구성한 이 네 연의 어조는 속삭이는 듯 다정하고, 또 낭만적이었다가, 뒤에 가선 열정적인 그리움으로 고조된다. 이것이 고스란히 화자의 감정으로 전환된 결과로, 6연의 목소리는 외마디 영탄으로 시작해 "밀물"의 비유에 실려 "온몸"을 흔들며 흘러서,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된다.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눈을 떼지 못했던 부분은 그리움을 꾸미는 "피곤하고 피곤한"이란 구절이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련하다'도 '따뜻하다'도 '축축하다'도 아니고 '피곤하다'라.. 하지만 거듭 읽을수록 이 말이 실로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움은 심장 충격으로 인한 신체 반응인 것이다.
지금 읽어봐도 이 한 줄은 빼어나다. 말을 꾸미는 일도 필요하지만 자기 감정, 자기 언어에 적중되는 것이 시 쓰기에서 얼마나 중요한 체험인가 하는 사실을 날카롭게 느끼게 된다. 이 시는 1960년대에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다는데, 어떻게들 읽고 공부했는지는 모르겠다.
[보충] 대화투로 된 이 시의 2~5연이 '서울 친구의 편지'에 적힌 내용을 재구성한 것 아닐까 생각했었다. 거듭 읽어보니, 그게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는 아직 편지를 읽지 않은 상태인 것 같다 싶어서다.
그렇다면, 2~5연은 편지를 쥐고서 편지에 적혀 있을 친구의 사연을 상상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부풀어오르는 기대와 설렘이 '글썽이'는 그리움으로까지 고양되는 것일까. 그런 것 같다.
그러면 '읽는다'는 '읽으려 한다'쯤이 될 것이다. 그렇게나 두근거리고 글썽거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그리움. '당신'이 이번 편지에선 이런 걸 적어 보냈을 것 같아.. 하는 마음. '~해도 좋아' 또는 '해도'라는 표현이 이렇게 읽게 만드는 것 같다.
'한국시 및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재 - 농업박문관 소식 - 우리 밀 어린 싹 (4) | 2023.05.23 |
---|---|
이육사 - 꽃 (0) | 2023.05.22 |
이윤학 - 째깐한 코스모스들, 피어난 새시 (0) | 2023.05.16 |
이윤학 - 캠핑 (1) | 2023.05.16 |
박진규 -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1) | 2023.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