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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재인폭포

재인폭포 7 - 에필로그(20120822)

by 길철현 2023. 8. 23.

 일찍 눈이 떠지면 아침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오후에 상담을 받고 난 다음 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전날 탁구를 치러 갔더니 친한 회원 한 명이 생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뒤풀이를 가야만 했고, 노래방 가자는 걸 뿌리치고 나오긴 했어도 집에 도착하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깨지 않는다면 폭포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월계동 집에서 재인폭포까지는 가장 빠른 길로 간다 해도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폭포에 간다 해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서 먼발치로 폭포의 상단부만 간신히 보고 와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재인폭포'라는 이 글을 세상으로(세상이라고 해봐야 내가 가입한 네 군데의 인터넷 카페, 그것도 세 군데는 탁구 모임이라, 대부분 제대로 읽지 않을 것이지만) 내보내는 걸 기념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으로, 또는 언제 생명력을 다할지 모르는 재인폭포를 내 마음에서 떠나보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글 하나 정도가 더 필요할 듯하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혼곤한 잠이 일찍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이십 분. 간밤에 충전시켜 둔 카메라와 캠코더를 배낭에 챙겨 넣고 도로로 나섰다.

  그저께부터 비가 많이 왔다. 그저께 밤에는 비가 마구 퍼부어 동부간선도로가 침수되어 아침에 강의 나가는데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리고 어제도 비가 꽤 많이 왔다. 그런데, 국지성 호우라서 그런지 내릴 때는 무섭게 내리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거짓말처럼 멈추기를 반복하는 그런 형국이었다.

  시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긴 했으나 그래도 러시아워라서 의정부 방면의 동부간선도로는 꽤 많이 밀렸다. 나는 머릿속으로 시를 적어나갔다.

                 

              너에게로 가도

              네 곁으로 다가갈 순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왜 이렇게 산문적일까? 시라는 장르는 시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그러나, 시든 산문이든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이 아닌가? 내 감정이 많이 죽어있기 때문인가? 시는 노력하는 그런 것이 아닌가? 세상의 잣대에 너무 휘둘릴 필요가 없다. 내 고유의 방식으로 노래하고 말하고 글을 쓰면 되는 것. 하지만 말이란 이미 사회적인 것 아닌가? 사회적인 산물을 이용해서 개인적인 고유성을 찾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동부 간선도로가 끝나는 부분에 이르자 차량의 흐름이 많이 빨라졌다.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차량 흐름과는 달리 아무래도 시 외곽으로 나가는 차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동부 간선도로를 빠져나온 나는 10차선도 넘는, 그러면서도 늘 막히는, 의정부로 들어가는 동일로 간선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신곡 지하차도 쪽으로 좌회전. 거기서 3번 국도를 따라 덕계를 지나 동두천으로. 동두천에서는 신천 옆의 우회도로를 타고 달렸는데, 그 막바지에 있는 자동차 전용도로는 침수로 인해 차량 통행이 통제된 상태였다. 시간문제도 있고 해서 나는 재인폭포로 가는 많은 길 중에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3번 국도를 타고 내처 달렸다. 구석기 유적지로 유명한 전곡을 지나 연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에서 우회전. 거기가 바로 재인폭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재인폭포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재인폭포 침수로 잠정 출입 통제”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재인폭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 안내판은 내가 예상하지 않은 사실을 담고 있었다. 이때 시각은 9시 20분. 십 분 남짓 더 달려가면 재인폭포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라도 좀 마실까 하다가 그냥 차를 몰았다.

  고문리를 지나자 새로 포 사격 훈련장이 들어오기라도 하는지 반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이해관계의 상호충돌. 님비 현상.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게 항상 욕망의 충돌이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라. 왜? 내 가장 소중한 것마저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연천댐 건설 공사로 새로 잘 닦아 놓은 도로를 지나 재인폭포로 들어가려는 순간, 예의 “재인폭포 침수로 잠정 출입 통제”라는 안내판이 다시 한번 내 신경을 그슬리는 가운데, 초소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들 두 명이 내 차의 출입을 막았다.

  “어디에 오셨나요?”

  “재인폭포 보러 왔는데요.”

  “지금은 침수되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아는데, 멀리서 보는 것도 안 되나요? 멀리서 여기까지 보러 왔는데.”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볼 수도 없는데다가, 지금은 공사 중이라 안 됩니다.”

   “달리 방도가 없나요?”

   “안타깝지만 안 됩니다.”

  두 명 중 전투모를 쓰지 않은, 고참으로 보이는 한 명은 ‘안 된다’로 일관했고, 옆쪽에 서 있던 일병인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그는 뭔가 희망적인 말을 해줄 듯한 기대를 품게 했으나 말을 마친 두 군인은 다시 초소로 들어가고 말았다. 차를 돌려 나오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제는 물이 많이 차올랐기 때문에 강을 따라 올라간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후진해서 차를 뺀 다음 예전에 버스 종점이었던 곳에서 차를 돌리는데, 오른쪽 성산 중턱에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폭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좌절된 욕망에 화가 치밀었을까? 순간적으로 저기나 올라갔다 올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순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제대로 나있는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거기에 올라갔다가는 상담 시간에 맞출 수 없기 십상이었다. 종점 옆, 예전에 가게인가가 있던 곳은 집 자체는 모두 없어지고 따로 떨어져 있던 화장실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집터는 밭으로 만들어 누군가가 깻잎을 심어두었다. 나는 카메라와 캠코더, 그리고 우산을 챙겨 밭과 우거진 잡초가 있는 그곳을 가로질러 강 쪽으로 좀 더 나가보려 했다. 강 쪽으로 좀 더 나간다고 해서 폭포가 보일 리도 없었건만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흙은 잘못 디디는 날에는 내 등산화를 그대로 집어삼킬 듯했다. 그렇게 몇십 미터를 갔을까? 부질없는 짓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7월 오랜만에(그 때도 비가 꽤 많이 온 다음이었는데) 재인폭포를 찾았을 때 연천댐의 물이 차올라 더 이상 재인폭포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차단 띠로 재인폭포로 가는 계단 입구를 막아 놓았으나,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는 바람에 차단 띠는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나도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았더니 정말로 계단이 물속으로 이어지고, 나무들도 산발한 머리만을 내밀고 있던 광경, 더 이상 폭포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수직에 가까운 벼랑의 사면을 조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지만, 몇 걸음 나아가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듯 넓은 주차장 옆, 예전에 식당이 있던 건물이 헐린 곳에서 먼발치로, 폭포의 그 우렁찬 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 흰 천 같은 물줄기가 떨어지는지, 정지해 있는 지도 잘 구분이 가지 않는 곳에서 한참도 아니고, 잠시 바라보다가, 카메라에 담다가 발길을 돌려야만 했었지. 그렇다. 그때 이미 재인폭포는 더 이상은 예전의 재인폭포가 아니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그것의 집행만을 기다리는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도 살벌한 표현인가? 아니, 그때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재인폭포를 떠나보낸 것 아닌가?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전부터, 십 년도 더 전부터, 과외를 하던 학생이 연천 댐 계획을 이야기하던 때부터 이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모든 게 종말이 유예된 만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작별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하지만 폭포의 그 힘찬 모습은 볼 수 없어도, 아직은 폭포에 완전히 접근이 금지된 것은 아니고, 오늘 같은 날엔 비록 내가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폭포는 저 홀로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폭포가 정말로 영원히 물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재인폭포의 그 기운찬 모습은, 혹은 그 서럽게 통곡하던 모습은, 아니면 차르르 차르르 경쾌한 음악을 들려주던 모습은, 또 겨울에 빙벽으로 서 있던 모습은, 아니 마른 먼지만 풀썩이던 모습까지,  모두 내 가슴에, 내 머릿속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나는 차를 연천댐 쪽으로 몰았다. 연천댐 위의 도로는 통행금지라 예전에 군용 도로가 있던 곳에다 차를 세우고, 댐 근처의 강으로 내려가 보았다. 넘쳐흐르는 물이 제 힘을 이기지 못해 길에다가 고랑을 만들며 물이 폭포수처럼 강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는데, 작년에 왔을 때보다 물이 훨씬 많이 불어 상당히 큰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 이 글에서 연천댐이라고 적은 것은 한탄강댐의 오기이다. 한탄강에는 원래 현재의 궁신교 위치에 연천댐이 있었고 그 이름이 익숙해서 이런 실수가 있었다. 이 연천댐은 1996년과 1999년 집중호우 때 두 차례나 붕괴되었으며, 결국 2000년에 완전히 철거됐다. 그리고, 빈발하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연천댐보다 상류 2km 지점에 2006년 대규모 댐인 한탄강댐을 착공하였다. 건설교통부와 한국수자원공사는 원래 다목적댐 건설을 추진하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홍수조절댐으로 변경하였다. 2012년에는 공사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2011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