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움이 꿈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는 허망함이 우리를 감싼다.
반면에 고통이 꿈이었다는 걸 깨달을 때는 안도감이 찾아온다.
동아리 후배들과 망년회인지 뭔지를 하느라고 밤을 새우고 아침 무렵에야 잠이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부랴부랴 오긴 했어도, 폭포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동차에 달린 시계의 숫자가 이미 오후 네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짧은 겨울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의식의 놀음임에도 불구하고 한 천 년이 지나가고 새 천 년이 다가오는 시간의 흐름 위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사실에 무덤덤할 수만은 없었다. K는 폭포로 가 폭포가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새 천 년에는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이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아니 폭포에서 새 천 년을 맞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규정대로라면 평일인 까닭에 폭포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니까 예외적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을까 하는 별 가능성도 없는 기대에 헛되이 기대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초병들이 꿋꿋이 초소를 지키고 있었다. 수고가 많소이다. 재인이 우리 십오대조 조상인데, 어떻게 못 들어갈까요? 여기 부대장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친한 데.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K는 차를 돌렸다. 폭포를 보지는 못했지만 폭포 입구까지 왔으니까 그걸로 만족하자. 내일은 폭포에 들어갈 수 있잖아. 그래도 그냥 돌아가긴 너무 아쉬운데. 맞아, 내일은 더 이상 오늘이 아니니까. 얼마를 차를 돌려 나왔을까?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일단 강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거기부터는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되잖아.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강 양쪽이 모두 절벽인데 강으로 어떻게 내려가? 그렇더라도 일단 부딪쳐 보는 거야. 이백여 미터 정도 차를 돌려 나오던 K는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도로로 차를 꺾었다. 그 좁은 도로를 조금 달리다가 차를 주차해 둘 만한 공간이 눈에 들어와 거기에 차를 세워 두고는, 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식당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기풍 식당. 식당 옆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의 끝부분에 길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저기가 강으로 내려가는 길일까? 불도저 같은 것으로 밀어서 내어 놓은 길은, 그러나 공터 끝에서 끝이 나 있었다. 이쪽으로 내려가는 건 힘들겠군, 하는데 흐릿하긴 하지만 좁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경사도 상당했지만 내려가는 걸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중간에 한 번 넘어져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놓치는 바람에 카메라에 생채기가 나고 무릎도 좀 까졌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무사히 강가에 다다른 셈이었다. 강은 반쯤은 얼고 반쯤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강변은 커다랗고 모난 바위투성이어서 재인폭포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바위들이 둥글지 않고 모난 것으로 봐선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온 것이라기보다는 강안의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 듯했다.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잘못 밟아 넘어지는 낭패라도 일어나면 큰일인지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위반도 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의 눈에 띄게 될까 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지! 뭐 하는 놈이야! 손들어! 신발이며, 페트병이며 잡다한 쓰레기들이 눈에 들어왔고, 작은 나룻배 한 척은 몸을 삼분의 이 이상을 물에 담근 채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위태로운 발걸음을 옮겼을까? 이제 왼쪽으로 꺾어지면 재인폭포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런데, 그 순간 K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진 채 멈춰 섰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군인 한 명이 자기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잡혀 가는 일만 남았구나. 아니, 내가 법을 어긴 것은 없잖아. 그렇더라도. 그러나, 총소리도, K를 외쳐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K는 자신이 첩보 영화의 스파이라도 되는 양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어떻게 된 것일까? 분명 내 쪽을 보고 있었는데. K는 바위 뒤에서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박 선생이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갔다가 곤욕을 치렀지. 하긴 나도 설악산에 몰래 숨어 들어가다가 감시원에게 들켜 큰일 날 뻔했지.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K는 빼꼼 고개를 내밀고 동정을 살펴보았다. 군인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정말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시간을 많이 지체해 버린 탓에 짧은 겨울 해는 이제 거의 다 타들어 가고 안 그래도 어두운 계곡은 바깥보다 한 발 앞서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K의 발자국 소리만이 적막한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 금기를 깨고 비밀을 엿보는 듯한 설레임. 재인폭포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맞아줄지 K는 자못 궁금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찾았기에 폭포 앞까지 가는 길은 이제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폭포 앞은 길과 길 아닌 곳이 별 차이가 없었다. 자신이 디딘 바위, 지나온 곳이 바로 길이었다. 멀리서 볼 때는 희뿌윰하게 뭔가가 걸려 있는 듯한 형국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흰 장막 같은 빙폭이 윤곽을 드러내었다. 겨울 수량이 적었던 탓인지 빙폭은 찢어진 장막처럼 폭포 중앙은 빈 채로 왼쪽과 오른쪽에 하얗게 걸려 있었다. 하긴, 이 년 전에 W와 왔을 때는 아예 빙폭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지. 대신에 폭포 아랫부분에는 석회암 동굴의 석순 같은, 아니 돌 기원탑 같은 백색의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거의 높이가 이 미터는 될 얼음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W와 왔을 때에도 꼭 저런 모양이었지. 하지만, 지금 것이 훨씬 더 큰 것 같은데. 멋진 장관을 기대하고 온 것은 물론 아니었다. 시간이 정지되기라도 한 듯 떨어짐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는 폭포. 폭포도 군인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것일까? 단 한 마디라도 듣고 싶어. 살아 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 삶의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내가 죽는다 해도, 어떻게, 세상은 정말이지, 코털 하나 까딱하지 않겠지? 삶이 고통스러운데 삶을 견뎌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배부른 자의 허위의식. 니가 고통이 뭔지 알기라도 하는가? 아니다. 난 고통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어. 지난 일 년, 병원에 있으면서, 다친 동생을 간호하면서. 신경이 짓눌린 동생이 내지르는 비명을. 하긴,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해. 만일, 동생의 신경이 완전히 손상되어 버렸다면 고통도 없겠지. 그래, 죽음은 고통의 끝을 의미해. 당연히 삶은 고통과 즐거움이 뒤섞인 거야. 대학원 수업 때 일문과의 김교수님이 뭐라고 그랬지? 우리의 삶이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다고 할 때, 그럼에도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폭포야, 말해봐. 바보처럼, 굳어버린 채, 멍하니 있지 말고. 어둠이 깊어가고 있어. 추워. 그러나, 인간이 바보가 아니라면, 인간은 바보인가?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삶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쫓겨 그야말로 맹목적으로 대를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둔한 머리로 뭘? 밑지는 장사? 그렇더라도 뭐 별 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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