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탄 자가용은 폭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총을 든 군인 두 명에게 제지를 당했다.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나 하고 순간적으로 K의 가슴이 덜커덩 내려앉았다.
“왜 그러는데요?”
“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폭포 보러 왔는데요.”
“아, 재인폭포는 열두 시가 돼야 개방이 됩니다.”
군인의 말에 길옆 철조망 상단부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니까, 재인폭포가 있는 곳은 군 작전 지역이라, 7월과 8월에만 전면 개방을 하고, 그 밖에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그리고 국경일에만 개방을 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일요일이라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별생각 없이 들어갔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자가용의 계기판에 달린 시계는 열한 시 십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되돌아 나갈까? 폭포 하나 보려고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K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검은색 고급 차 한 대가 K의 차 뒤에 섰다. 중년의 운전자가 내리더니만 K 쪽으로 오다가, 길옆 철조망 상단부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봤는지 그쪽으로 걸어갔다. 안내판의 내용을 읽고는 다시 자기 차로 돌아가는가 했더니 차를 뒤로 좀 뺀 다음에 아예 돌려서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도 그냥 되돌아 나갈까? 하지만 그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주말을 맞아 서울을 떠날 때부터 목적지는 이곳 재인폭포였다. 폭포가 보고 싶었고, 폭포가 들려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고, 달리 가야 할 곳도 없었다.
테이프에서는 K가 지난 두 달 간 줄기차게 들어왔던 저니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티브 페리의 가늘고 높은 그래서 여성적이면서도 애잔한 목소리가 K를 달콤하게 녹여주던 ‘Still She Cries.’ 노래에 몸을 맡긴 채 약간은 멍한 상태로 있던 K는 누군가가 시키기라도 한 듯 불쑥 수첩을 꺼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삶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정말 지난한 일이다. 객관성이라는 것은 거리를 의미하는데, 우리는 삶 속에 있기 때문에, 삶과 그것을 보는 개인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식은 이 삶에 끊임없이 질문의 화살을 쏘아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의식이라는 것은 언어와 거의 등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이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또 삶이 일회적이라는 데 가닿은 의식은 이 삶에서 최상의 것을 꿈꾸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허공에다 몸을 맡기고 부지런히 머리, 팔, 다리를 움직여 나가라는 법정의 말은 이러한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로드 짐?에 나오는 철인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물 밖으로 나오려고 무턱대고 허둥대다가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차라리 깊은 바다에 몸을 내어 맡기고 부지런히 손과 발을 저어나가면 깊은 바다가 사람을 뜨게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망망대해에 빠진 사람은 건져주는 사람이나 인근에 섬이 없다면 십중팔구 죽고 말지 않는가?
여기까지 적어 나간 K는 다음 장으로 넘겨 재빠르게 써내려갔다.
S야!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너를 사랑하는 걸 멈출 수 있을까?
혹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너를 용서할 수 있을까?
몇 줄을 적다 K는 문득 글을 중단하고 지난 한 달 내내 곱씹어온 생각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짚어 나갔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K에게 닥쳐온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보기에는 턱 없이 짧았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S가 잠시 잠깐 K에게 한 눈을 팔았다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얼른 K와의 관계를 접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S의 입장에서 보자면 K가 자신을 좋아하길래 그 마음을 그대로 접기도 그래서 잠시 두고 보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솔직하게 사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다고 본다면, S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털어놓았을 때, 서른두 해나 이 세상에 두 다리를 붙이고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 또 자신보다 네 살이나 아래인 S의 인생 선배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충고를 하거나, 아니면 보다 직접적으로 욕이라도 한 마디 해주거나,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 입은 자아에 대한 보상으로 뺨이라도 한 차례 때려 주는 것으로 상황을 끝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K는 젖 조르는 아기마냥 엉엉 울며 유치하게 S에게 매어 달렸고, S가 오히려 누나가 되어 K를 달래고 얼러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왜 S가 K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했을 때 K는 이제 이 세상이 끝났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십 대에 이미 겪었어야 할 통과의례를 늦은 나이에 그것도 아주 미숙하게 치르고 있는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던 삶의 공허감, 무목적성, 무의미성 이런 것 때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는데--물론 이것은 삶이라는 복잡다기한 총체를 일면적으로 단정 짓는 행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삶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나 인상이 그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데--또, 거기다가 대학 시절 내내 혼자 좋아했던 후배에게 어쭙잖은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 후배가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되받았을 때, 하우스만의 시처럼 주지 말아야 할 마음을 주어버린 뒤, 땅바닥에 버려진 마음 때문에, 기나긴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그래도 그 때는 이십 대였으니까. 그 때로부터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 후배인 S에게로 K의 마음이 쏠릴 때, K는 이전의 상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S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결과는 역시 7년 전의 되풀이였다. 아니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은 이번에는 K가 자신이 사랑할 수 있고, 또 자신을 사랑해 줄 여자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막 갖게 된 그 순간에, 그러니까 조심조심, 그러면서도 크게 크게 불어 올리던 풍선을, 아니 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던 마음을, 바늘인지, 칼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터뜨려 버린 그런 격이었다. 터져서 찢어진 채 형편없이 쪼그라든 풍선, 그 풍선 같은 마음. 견딜 수가 없어서, S에게 매어 달리고, 젖 조르는 아기마냥 엉엉 울고. 마침내는 죽어버리고 말아야겠다는 극언까지 내뱉고. 그러다가, 닷새간이나 단식을 하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해해 보려 했던 것. 전화도 끊어 버리고, 물만 먹으며, 누워서 보낸 그 긴 시간. 정체된 듯한 시간. 그때 재차 확인되던 자신의 어리석음, 혹은 자신과 타인과의 넘어설 수 없는 그 거리감. 자신의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척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 그러면서 몇 번이나 접었던 작가에의 꿈이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단식을 끝내고 E마트로 차를 몰고 갈 때 마구 밀려오던 현기증. 세상은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빙글빙글 돌고 있구나. 그리고, 코끝을 날카롭게 유린하던 각종 음식 냄새. 포경 수술을 받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그러면서 부조리하게 고양되던 정신. 언제나 타인에게 말을 하는 것이 힘든 일이었는데, 말이 애를 쓰지 않는데도 술술 나오던 K로서는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경지.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난 것일까? 이성에 억눌려 지내던 감정이 전면으로 등장하여 더 크게 웃고 더 크게 울게 된 것인가? 그래서, S에게 내팽개쳐진 상태이면서도, 정다운 오누이처럼 거의 매일 밤 전화로 S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눈 불가사의한 며칠. 그러면서도, S와의 관계는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비애감. 삶의 이해할 수 없는 두께. 자신이 든 카드가 무엇이든 간에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과연 시간이, 시간이, 답을 줄 것인가?
정각 열두 시가 되기 오 분쯤 전에 초병들이 차를 통과시켜 주었다. K는 차를 좀 더 몰고 들어가서 재인폭포로 내려가는 입구에 만들어 놓은 너른 주차장에다 차를 세웠다. 매표구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입장료 천 원에다, 주차료 천 원까지 따로 내어야 했다. 이런 벽촌에서도 주차료를 받는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짜증이 났으나, K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내밀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좌우로 방향을 트는 시멘트 계단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욱 길어 보였다. 계단을 다 내려온 K는 철제 다리를 건너 개천 저쪽 편에 있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개울물이 뭐라고 조잘거리며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한 번 와봤기 때문일까? K는 능숙한 발걸음으로 폭포 쪽으로 나아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말라죽어 있던 폭포가 다소 기운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벼랑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특이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절이 계절인지라 절벽의 윗부분에는 아카시아 나무와 그 밖의 이름 모를 나무의 초록 이파리들이 뒤덮고 있었고, 절벽 곳곳에 자리한 담쟁이들이 절벽을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텅 빈 웅덩이였던 용소에도 푸르다기보다는 초록빛에 가까운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런데, 용소를 지난 물은 지하로 스며드는지 용소와 그 아래 개천 사이는 크고 작은 바위와 자갈들 뿐, 물길은 끊어진 상태였다. K는 폭포 정면으로 나아가서 작은 식탁만 한 크기의 바위에 올라앉아 폭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선 물줄기는 곧바로 수직 낙하하며, 희게 부서지며, 용소의 물에 부딪히며, 허연 거품을 내뱉었다. 일회성 추락의 무수한 반복. 눈은 폭포를 바라보면서도 생각은 또 제 맘대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왜 여기까지 왔지? 집에 마음을 붙이고 있기가 힘이 들어서? 시간이 난 김에? 불쌍한 재인이? 불쌍한 나? 내 바로 뒤에 있던 차는 돌아서 어디로 갔을까? 얼마를 그렇게 폭포를 바라다보았을까? 폭포의 아래쪽부터 서서히 시선을 위로 옮겨가던 K는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부분이 자기 쪽으로 넘어져 오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구나. 이렇게 끝날 것을. 이렇게 끝날 것을. 그러나 K가 받은 느낌은 떨어지는 물줄기를 오랫동안 바라본 데에 따른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을 오래 보고 있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까지 움직이게 되고 마는가? 그럼에도 K는 생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 현상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다시 폭포를 찬찬히 아래서부터 위로,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며 시선을 옮겨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절벽이 자기 쪽으로 넘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폭포 옆의 절벽도 거대한 용의 몸뚱어리인 듯 마찬가지로 꿈틀꿈틀 대었다. K는 수첩을 꺼내 폭포의 모습을 간략하게 스케치하고는 몇 마디 적어보았다.
-폭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폭포 상단부의 절벽이 내 쪽으로 넘어지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폭포 옆의 절벽들도 용의 몸뚱어리인 듯 꿈틀댄다.
-나한테 수십수백수천 번 이야기해야 할 것은 남은 남이라는 것이다. 타인은 타인이지 결코 내가 아니다. 그들과 나와의 거리를 명확히 인식할 때, 대화의 필요성, 필연성은 보다 자명해진다.
-물이 떨어지는 저 광경, 저것을 어떻게 언어로 치환할 수 있을까? 하나의 흐름이던 물이, 흰 알갱이로 산산이 부서지다, 다시 하나가 되는 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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