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K니?”
두 사람은 K의 중학교 동창이자, W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인 J를 매개로 해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런데 K는 몇 달 전에 자신의 집 근처에서 우연히 W를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이다. ‘W가 어떻게 여기에?’ 순간적으로 K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K와 눈이 마주친 W는 다소 놀라면서도 동향의 친구를 만난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다니던 회사에서 발령이 나 K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아파트로 얼마 전에 이사를 왔는데, 그러지 않아도 한 번 전화를 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뜻밖의 해우는 그날 밤늦은 시각까지 술자리로 이어졌다.
이날 아침 이른 시각에 W가 전화를 한 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집에 혼자 있으니 놀러 오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마음이 괴로우니 와서 위로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올라와 이틀 출근을 하고 맞은 휴일. 아내와 갓난아이는 내려간 김에 좀 더 있다가 올라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혼자서 죽음을 대면하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연락을 주지 그랬어,”하고 K는 W를 나무랐지만,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가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W는 뜬금없이 북쪽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달리게 된 길이, 지난 1월 1일에 K가 C와 달린 바로 그 길이었다. 의정부를 지나 동두천, 전곡, 연천, 북으로 북으로 대광리, 신탄리, 그러나 신탄리를 지나자 예의 비포장 도로였다. K는 어지간히 왔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차를 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W가 의외로 강하게 나왔다.
“조금만 더 가보자.”
“아, 차 망가지는데.”
그렇다고 한들, 며칠 전에 아버님이 죽은 친구의 말을 거역할 수는 도무지 없는 노릇이었다. 덜컹덜컹 그렇게 몇 백 미터나 갔을까, 다행스럽게도 바리케이드가 두 사람의 통행을 막았다. 그 이북은 민통선 지역이라 출입증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보초를 서고 있던 상병이 말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재인폭포에 들렀다.
“뭐 특별히 볼 거 있겠어?”
“그래도 한 번 들어가 보자.”
K는 핸들을 좌로 꺾어 폭포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아무리 차를 달려도 폭포가 나오지 않아서 두 사람은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 끝없는 길의 끝에서 드디어 표지판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 왔다.
재인폭포와 폭포에 얽힌 전설을 적어 놓은 안내문을 대충 읽고 난 뒤 두 사람은 폭포로 이어지는 길로 내려섰다. 왼편에 요금을 받는 곳이 있었으나,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시멘트 계단을 한참 밟아 내려가자 말라버린 개천 바닥이 나왔다. 개천의 양쪽에는 깎아지른 벼랑이 높다랗게 서있었다. 거기서 개천 옆에 난 좁은 길을 따라 또 한 삼백 미터 정도를 걸어 올라갔을까? 그제서야 폭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런데 폭포는 말라 있었다. 죽은 폭포. 다만 폭포의 물이 떨어져 내리던 곳 아래에는 떨어져 내리던 물이 얼어붙어 석회암 동굴의 거대한 석순 같이 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야, 저 얼음 덩어리를 깨버릴까.”
장난기가 발동한 K가 큼직한 돌을 하나 들어 얼음 덩어리를 향해 던졌다. 얼음에 부딪힌 돌은 힘없이 튕겨 나오고 말았다.
“생각보다 단단한데.”
“예전에 단양에 있는 화암동굴에 갔을 땐가 그런데, 할머니 두 분이, 조명 때문인지 흰빛이 도는 커다란 석순을 보고는, 한 분이 ‘이거 얼음 덩거리 아이가’ 그러자, 옆에 있던 분도 ‘맞네, 맞아, 세상에’라고 맞장구를 쳐서 내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니깐.”
물도 떨어져 내리지 않는 이 폭포가 K에게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킨 것은 폭포를 둘러싸고 있는 벼랑의 특이한 형태 때문이었다. 벼랑의 중간 아래 부분은 정 같은 것으로 쪼아 놓기라도 한 듯한 작은 사각기둥들이 무수히 매달려 있는 그런 형상이었다.
“벼랑이 정말 특이하네. 이런 형태는 딴 데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이쪽 연천 전곡이 좀 특수한 지형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리고 소도 이 정도면 깊지는 않아도 상당히 큰 편인데. 폭포가 떨어질 때 한 번 와봐야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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