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C. Field(필드), 플라톤의 철학, 양문흠, 서광사
*제1장 입문
*플라톤을 현실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신의 서재에서 이론을 짜내는 초연한 비세속적 학자로 여기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턱없이 표적을 빗나간 것임은 이 간략한 설명으로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는 세속인이었고, 노련한 군인이었으며, 넓은 지역을 여행하였고, 그가 살던 도시뿐만 아니라 다른 곳의 많은 지도급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아가 그의 대화편을 하나하나 식별하면서 읽을 때 주어지는 인상, 즉 전 생애를 통한 그의 중심되는 관심이 사회의 개혁에 관한 실천적인 것이었음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인식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사고를 수행할 수 있는 자들은 만일 자신의 개인적 취향만이 고려되는 것이라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완전하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하리라고 그는 확실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의무감은 다름 아닌 바로 그들에게 가장 강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플라톤의 모든 활동중에 자신의 마음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바로 이 의무감이었다. (14)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그를 알고 있었던 많은 자들에게 시대의 변천 속에서 최후의 희망을 주는 것으로서 나타났음이 틀림없다고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비판가들 및 회의주의자들과 정면으로 맞서서 그들과 얼마든지 질문하고 토론할 마음가짐이 확실히 되어 있었고 그러면서도 탐구해 볼 만한 진리가 있다는 것과 살아가면서 추구하거나 회피할 만한 올바름과 그름이 있다는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게 줄 수 있는 확실한 이론적 원리에는 전혀 도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신의 삶으로서 그들에게 본보기를 제시하였으며, 그를 알고 있는 자로서 그것에 감동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이 그 죽음을 가져온 사회에 대한, 플라톤 같은 사람의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초기에 플라톤의 마음 속에 문제가 어떻게 정식화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가 부딪쳐야 했던 도전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에는 회의적인 철학자들의 도전이 있었으며, 이 도전은 도덕적 판단을 위한 객관적 타당성, 즉 그 근거가 실재의 본성 속에 있을 가능성에 회의를 던졌던 이론들에 관해 지극히 막연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현실적으로 채택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황적 사실들의 도전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확립된 과학적 인식 체계에 견줄 수 있는, 확립되고 동의가 이루어진 지식 체계가 행위의 문제에는 결여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있었다. (28)
*제2장 형상이론 1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
1)우리가 일상 생활의 주변에서 보고 만지고 들은 대상들, 즉 일상적 의미의 실재 세계에 대해 그 실재성을 비타협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 . . 우리는 일상적 상식의 차원에서 우리가 보고 만지고 . . . 하는 것들이 실재적 세계를 구성한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것 중 어쩌면 90% 정도는 전혀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고 서슴없이 거부한다는 것은 엄연히 경험의 한 기본적 사실이다. 우리의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어떤 대상에 속한다고 일상적으로 여겨지는 색깔, 모양, 뜨거움 및 차가움 등등의 다양한 질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각하는 그 질들은 일정치 않고 다양한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지며, 이 조건들에 의거하는 한 그것들은 비실재적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색맹인 사람에게 보여지는 색깔이나 난시인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양의 경우처럼 우리의 감각 기관의 상태와 더불어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것들은 주어진 대상에 대해 시각을 달리함에 따라 나타나는 온갖 상이한 모양처럼 우리가 취하는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 그것들은 외적 조건이 다양하게 주어짐과 더불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곧은 막대기가 물 속에 있을 때는 휘어져 보이거나 우리가 보는 색깔이 빛이 바뀌어 질 때마다 바꿔지는 경우와 같다. 이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하는 모양이나 색깔이 아니라고 보통 말해지며, 다른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질에 있어서도 필요한 내용만 바꾸어(mutatis mutandis) 당연히 동일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것을 감관에 의해 파악한다는 사고 방식에 아주 친숙해 있음을 알게 된다. . . . 근대의 물리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습을 조망하게 되면, 우리는 감관에 의해 지각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실재하는 세계를 제시하고 있음을 확실히 느끼게 된다. 견고하고 연속적이며 운동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던 대상이 실재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선회하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게 되었을 때 유감천만이었다. 그러나 원자가 더욱더 신비적인 전자 및 다른 대상들로 대치되었을 때 물리학의 ‘실재하는’ 세계와 감각적 세계와의 격차는 어느 때보다도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32-6)
*수학이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종류의 사고이므로 과학적 사고가 추구하고 있는 실재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7)
2)완전히 실재하는 것은 항존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 . 초기 그리스의 과학적 사고는 물리 세계의 온갖 변화와 차이 속에서도 항상 존재하고 또 항상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어떤 실체를 찾는 데로 향해 있었다. (37-8)
*형상과 개별적인 감각 대상 사이의 관계는 이 이론<플라톤의 Idea론--인용자>의 아주 본질적이고 특징적인 내용인데, 플라톤은 이 관계를 기술하는 이름보다는 그 관계의 사실을 훨씬더 확신한다. 위의 설명에서는<46쪽의 설명 참조--인용자> 그 이름은 형상에 대한 개별 대상의 ‘근접(approximation)’으로서 여러 번 언급되었다. 플라톤은 다소 유사한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앞에서 지적되었던 문절에서는 감각적 대상에 관해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한다’거나 그것에 ‘가려고 애쓴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가 더욱 자주 언급하는 것은 형상의 ‘현전’(presence)이거나 ‘나눠 가짐’ 또는 ‘참여’이다. 가끔 그는 그 비유를 조금 바꿔서 ‘모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46-7)
*제3장 형상 이론 2: 발전과 응용
*많은 것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하는 단일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물들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너머’에 있다. 그것은 그 모든 사물에서 정확히 같은 형태로 발견되는 동일한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정도를 달리 하면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 있는 수렴적 한계(a limit towards which they converged)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도와 방식을 달리 하면서 그 한계에 못 미칠 것이므로, 그들 모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공통의 질(質)을 문자 그대로 발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완전한 형상을 상정했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개별자는 이들을 자연적으로 단일한 종류나 무리에 속하게 하는 형상과의 어떤 관계를 가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53)
*감각적 대상이 충분한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때, 플라톤은 물론 그들이 단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의미하지는 않았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들이 무(無)임을 의미할 것이고 따라서 그들에 관해서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상의 일부 노선은 한편으로는 완전한 실재나 존재를,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비실재 또는 비존재라는 단 두 대안만을 허용했는데 바로 이 점에서 난관에 봉착했었다. 플라톤은 완전한 실재와 절대적 비실재 사이에 감각적 대상의 세계를 특징짓는 중간 상태를 인정함으로써 이를 피하려고 하였다. 이 대상들은 [국가]의 잘 알려진 문절에서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이와 유사하게 그에게는 완전한 인식과 완전한 무지 또는 인식의 결여라는 두 대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중간 지대의 대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반(半)인식 또는 인식에의 접근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플라톤에 의해 **(doxa)라고 불려지는 마음의 상태인데 일반적으로 ‘믿음’ 또는 ‘생각’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감관-지각이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말해진 것이 많지 않지만,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감각에 불과한 것은 플라톤에게는 단지 일련의 스쳐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하며, 자체적으로는 어떤 종류의 인지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 관해 추론하거나 생각하거나 판단하며, 그는 바로 이런 종류의 사고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에 대한 얼마간의 일반적 특징을 보았다. 그것이 도달하는 판단들은 절대적으로는 참되지 않으나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그들은 대략적으로 또는 근접적으로 참이며 잘못될 여지가 있는데, 이는 단지 우리의 현실적 인식의 제한성의 결과가 아니라 대상의 본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불가피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한 관점에서는 참이고 다른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한 목적을 위해서는 참이고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완전한 학적 인식인 ***에 반대되는 생각 또는 믿음인 doxa는 바로 이런 종류의 사고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구분은 개별 경우에 나타나는, 주관적 확실성의 상이한 정도 사이에 성립하는 구분이 아니라 가능한 인지의 종류 사이에 성립하는 구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구분은 궁극적으로 대상의 본성에 의존한다. (56)
*제4장 도덕 및 정치 이론 1
*재사(才士)들에게 능력 발휘의 문이 열려져 있다는 것은 [국가]의 근본 원리인데, 재능 또는 재능의 가능성은 합당한 개발에 필요한 교육이 주어져야 할 것이므로 조기에 발견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이 같은 원리를 여성들에게 적용할 만큼 그의 시대를 아주 앞서 가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들이 필요한 자질을 보이면 남성들처럼 같은 훈련을 받으며 도시 국가의 최고의 위치들에 올라갈 수 있는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 만일 후대의 작가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실제로 자신의 원리에 따라 탁월한 능력을 갖춘 몇몇 여성들에게 아카데미에서 연구하도록 허용하였다. (76)
*생산 계급의 위치에 대하여 플라톤이 주는 어떤 시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재산과 가족의 절대적 공동 소유를 그들에게 적용시킬 의도는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지고의 통치자의 경우처럼 그렇게 할 필연성은 확실히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수호자의 경우처럼 엄격한 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과 그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이 극단적인 부나 빈곤은 허용되지 않겠지만 훨씬더 높을 것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덧붙여 말하면 근대의 독자들은 이 계급을 가끔 그렇게 하듯이 ‘노동자’나 ‘노동 계급’으로 취급함을 경계해야 한다. 이 용어들은 근대 영어에서는 정치적*사회적 함축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플라톤에게 적용되면 매우 오도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계급은 물질적 필요품을 공급하는 일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 ‘노동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소위 ‘사업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실제로는 ‘고용주’와 ‘노동자’로 나누어진 근대의 산업 사회의 관점에서라기보다는 주로 약간의 농부와 독립된 기술자와 상인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83-4)
*제5장 도덕 및 정치 이론 2
*플라톤이 이 이상(理想)이라는 표준에서 봄으로써, 현존하는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가 절대적 이상에서뿐만 아니라, 도달될 수 있는 근접 정도에 있어서도 미달해 있다고 여겼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가 둘러 본 한에서 각 도시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불화와 투쟁이 있었으며, 그가 잘 조직된 사회의 첫째가는 핵심 요소로 여겼던 단일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흔적마저 거의 없었다. 근대의 독자들이 완전한 단일성의 필요성을 플라톤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견해 차이와 대립은 발전과 진보의 조건이라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이것은 매우 명확한 한계 안에서만 참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차이에 의해 분열된 공동체는 건전한 상태라 할 수 없다. (88)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강한 반대 이유를 현대의 반론에 의해 지나치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가 알고 있던 방식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근본적 반대 이유는 그것은 좋은 도시 국가의 필수적 특징, 즉 분업 원리와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체제보다도 더욱 명백히, 공동체를 통치하는 일에 특별한 자질이나 특별한 지식이 요구됨을 또는 심지어 통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의 집중이 요구된다는 것조차 부정한다. 물론 민주 정치 국가에도 기술적 전문가에게 해당 분야에 대한 얼마만큼의 존경심은 주어졌다. 그러나 보다 높은 단계에서의 정책 결정에 있어서도 각자는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발언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이들은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고, 따라서 최고도의 지성, 지식 및 공평무사가 필요했다. 중요 안건에 대한 최종 결정이 아주 배타적으로 민중 전체의 모임에 맡기는 등의 민주주의가 의존했던 방식은 이런 것의 부정이었고 또 특별한 자질이 필요하다는 견해에 대한 노여운 배척이었다. (92)
*제6장 후기의 발전:영혼론
*제7장 종국적 형이상학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미 지적되었듯이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및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이 일반적 사상<‘물리 세계에 대한 진정한 학적 인식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그 인식을 수학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사상’--인용자>을 넘겨 받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물이 보이는 것들 중 유일하게 완전히 가지적(可知的)인 따라서 유일하게 완전히 실재적인 측면은 그들의 수학적 측면인데, 그들은 이 결론을 표현하기 위해 “사물은 수이다”라고 단호히 말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그들은 가지계에 속하는 수가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대상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실수를 저질렀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들이 믿을 만하다면 이것 때문에 그들은 이 사상을 조잡한 방식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환상적 방식으로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기에 이르렀음이 확실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플라톤에게는 감각적 대상은 수학적 인식의 대상이 갖는 완벽한 선명성과 가지성(可知性)을 절대로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그것에의 근접성을 가질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피타고라스의 교리를 고쳐서, 사물이 수라고 말하는 대신에 사물의 형상이 수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인식하려고 추구하는 ‘진정으로 실재하는’ 세계가 수학적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상은 17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학적 사상가들의 저술을 통해서 우리와 친숙한 것이다. (135)
*순수 형상이 수이거나 수의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기하학적 도형은 수에 의한 특수한 공간적 규정이라는 것은 어쨌든 이 정도만큼은 명백해졌다. (141-2)
*제8장 신학과 종교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태도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다. 우리는 첫째, 신 또는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그들은 우리에 대해 초연하지 않다는 것 셋째, 그들은 기도나 제물이나 마술적 의식에 의해서는 자신의 목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154)
*종교적 태도
1)첫째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전 우주의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부분이라는 것과, 그가 [법률]에서 말하듯이 ‘부분이 전체를 위해서 존재하지 전체가 부분을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이러한 의미와 우리의 개인적 필요와 욕구의 비중요성은 종교적 태도에서 첫째가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 태도에는 다른 한 측면도 있는데, 이것도 똑같은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그만 부분이기는 하지만 부분임에는 틀림없으며, 전체의 목적을 달성함에 기여하는 몫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전체의 목적은 실재로 우리의 목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법률]에서 말하고 있듯이 전체를 위한 최상의 행위는 ‘우리의 공통적 기원(起源)의 힘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도 최상의 것이 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피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적 태도의 둘째 요소이다. 즉, 이 요소는 우리 자신의 삶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는 우주 전체의 영혼이 애써 성취하려는 중대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이 자각의 느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57-8)
*개인에게 향한 정열적 사랑은 단순한 신체적 갈망 이상의 것인 한, 어떤 보다 일반적 필요와 욕망의 특수한 표현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 불멸성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이것의 가장 명백한 표현은 자신의 어떤 것을 계속 이어 나갈 자식을 낳으려는 욕망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름다움에 대한 정열과 그것을 소유하거나 그것과 접촉하려는 갈망이 있다. 이 두 욕망은 무엇보다 먼저 구체적인 개인에 의해 촉발될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영원한 실재인 형상계(形象界)와 접촉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발견될 수 있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관조에 의해 욕망은 훨씬더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 발견되기에 이르는 것도 가능할 것인데, 이는 개별적인 감각적 대상에 관한 지적 호기심은 이것이 충분히 만족될 수만 있다면 우리를 마침내 형상의 인식에로 이끌어 갈 수밖에 없음을 파악하기에 이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다. (164-5)
*플라톤의 시사에 의하면 작가는 예컨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의 외모와 특징적 언변 방식과 그들의 활동을 말로 모방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를테면 대장군 또는 다른 어떤 분야의 기술인과 대면하고 있었다는 영상(illusion)을 창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상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공구(工具)를 그리는 화가가 그 공구를 만드는 법을 모르고, 그 사용법은 말할 것도 없이 더욱 모르듯이 그 작가는 그런 사람이 그의 기술을 어떻게 얻고 사용하는지에 관해서 실재로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다면 그는 바로 대장(great general)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활동 중에 속하는 한 특수한 활동이나 삶의 행위 일반에 관해서는, 특수한 시각으로부터 보여지는 외면적 모습의 측면을 빼고는 시인들의 작품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위한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는 세간의 주장이나 시인들의 주장은 근거없는 것이다.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지적되었듯이 특수한 행위를 하도록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시인으로서 이 감정을 선한 종류의 행위로 자극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쉽게 악한 종류의 행위를 하도록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자극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그 결정을 시인들에게 내맡길 수 없으며, 올바른 행위의 참된 원리를 인식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을 통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170-1)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연극은 언제나 강한 감정을 과시함으로써 그 효과를 얻는 경향이 있다. 성공적 희곡이 조용한 자기 통제적 인물들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연극으로부터 얻는 쾌락은 대체로 무절제한 감정 과시의 대리 만족인데,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는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리고 실제로도 거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 쾌락은 우리 속에 있는 감정적 성향을 강화하여 그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잘 알려진 견해와 뚜렷이 대조되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극장이라는 안전한 환경에서 우리의 감정을 발산시켜 우리의 기분을 풀 수 있게 되면, 그 감정을 우리의 체계로부터 잠시 내모는 셈이 되며 따라서 그것을 일상 생활에서 훨씬더 쉽게 통제하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172)
*제10장 오늘날의 플라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결론을 체계적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들이 거쳐갔던 사고 과정을 발견하는 데서 자주 어려움을 발견한다. 플라톤은 이와 반대로 그가 거쳐갔던 과정의 말하자면 마디(sections)를 보다 크게 또는 보다 작게 대화편에 제시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결론을 발견하는 데서 훨씬 자주 어려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의 가르침을 위한 수단으로서 플라톤의 저술이 갖는 큰 장점 중의 하나임을 시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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