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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플라톤 (Plato)

플라톤 - 정리 [대단원]

by 길철현 2016. 9. 17.

논문을 쓰지 못하고, 동생이 다치고,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 년을 어지러움과 문학에서 보내고, 그러다가, 철학에 다시 발을 들여 놓고서는, 그 출발점으로 삼은 플라톤. 그게 200012월 무렵이었으니까, 3년 이상을 플라톤 철학에서 맴돈 셈이다.

불완전하지만 대략적인 정리는 노트에 해두었으니까,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로 나아가도 될 듯하다. 탁구 때문에 철학 공부는 조금밖에 못하겠지만, 그 조금이나마 빼먹는 일이 없도록 규칙성을 견지하면서 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즐거운 고통의 나날을 보내도록 하자.

정리


(노트에 정리한 것을 다시 옮김, 2004111/051219)

 

나의 경우에는 내 모든 (혹은 엄청나게 많은 양의) 에너지를 쏟아 붓지 않으면 변변한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게 살아갈수록 또렷해지는 듯하다. 한 마디로 무언가를 익히는 것이 힘이 드는 그런 유형이다. 대신에 나에게는 그러한 에너지를 쏟아 부을 정신적*육체적 힘은 있는 편이다. 내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그날까지 나의 꿈*자아의 실현, 인류를 위한 물 한 방울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삶에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지성이 아직도 자연의 경이나 힘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며(자연에 대한 그러한 경외심과 신비로움이 숱한 아름답고, 재미있고, 때론 슬프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배태하였고, 그러한 이야기들이 때로는 어떤 과학적 해명보다도 호소력이 짙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의 정치, 예술, 철학, 역사, 과학 등은 인류가 동물적 삶의 차원을 벗어나 인간만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누리는 하나의 전범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그리스 적 삶이 서양 세계에 미친 영향은 서양 문화의 양 기둥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인, 즉 동양인인 우리에게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서구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고대 그리스가 갖는 영향력이나 중요성을 등한시 할 수 없다.

지난 4년 정도 동안 나는 그리스 세계를 거닐고 몸을 담아 왔다. 신화 읽기에서, 호머의 [일리아드][오디세이], 그리고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 그 다음으로 플라톤, 또 아직 제대로 손을 못 대고 있는 희비극들, 이들 책 읽기는, 특히나 영역본 서적들을 읽는 것은, 힘겨움을 수반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흥취나 즐거움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지금 이런 속도라면 언제쯤 그리스 세계를 벗어나서 다른 세계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 세계가 주는 즐거움이 크고, 거기에 보물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면, 거기에서 완보하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으리라.

이 글은 지난 4년간의 부족한 내 공부를 정리하는 동시에, 일천하나마 나름대로 이해한 플라톤 사상의 핵심을 요약*정리하기 위한 것이므로 주변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막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플라톤은 인류가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꽃피운 이 그리스 세계에서도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인데, 위대한 인물은 그 시대의 흐름 혹은 시대정신(Spirit of Age)을 포착하여, 그 다음 시대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는 상례에서 플라톤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플라톤의 글을 읽고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많은 다른 학자들도 제시하고 있는 바이지만(물론 광범위하고 다양한 플라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이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이 현상 세계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하는 점이었다. 학문의 기본 성격이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이 현상 세계에 대해 뭔가 공고한 것, 학문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이 일견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체험이 체험자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의 체험에 아무런 객관성이 보증되지 않는다면, 나의 주장이 다른 사람의 주장보다 옳다거나,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당시 유명한 소피스트 중의 한 명인 프로타고라스는 이러한 사정을 바탕으로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황달에 걸린 사람이 이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인다고 말할 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황달이라는 병에 걸린 상태보다는, 건강한 상태가 더 낫기 때문에,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이것조차도 의심스럽긴 하지만) 따르는 쪽이 유리해 보인다는 정도이다.

플라톤은 당시에 만연하던 이러한 소피스트적 논리, 진리란 상대적인 것이라는 논리에 만족하지 않고(그의 이론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보다 확실하고 영속적인 것을 추구했고, 그러한 이론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그가 감동을 받은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우리의 일상 세계와는 달리, 그 확실성과 영속성을 보장하는 수학적 세계였으리라. 수학적 세계가 보증하는 확실성도 그 체계 내지는 약속 안에서만 그러하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는 분명하게 되었지만, 그가 이 수학적 세계에서 지식 혹은 인식의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했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철학 체계에까지 적용하려 했다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영혼불멸설을 내세우고 있는 배경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그 근거 기반이 허약한 일상 세계와 대조되는 수학적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정신(혹은, 영혼, 두뇌 활동)은 일상 세계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도 육체를 가지고 잇긴 하지만, 인간이 보여주는 그런 정신 활동은 보여주지 못하므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같은 부류의 것일 리가 없다(여기서 불멸설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고찰). [호응이 잘 안 됨] 플라톤의 이러한 이분법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문제를, 정신이 보여주는 세계의 우월성에 압도되어,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다. (동물 인간의 유대, 연결성, 지적 작용) (공부의 부족으로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플라톤이 주장하는 영혼육체의 이분법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박에 의해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봉인과 밀납의 비유, 다리와 걸음걸이의 비유)

그리고, 플라톤의 형상 이론은 우리의 인식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나려는 하나의 시도, 그런데, 인식의 출발을 위해서는 확실성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집착한 나머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까지 주장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플라톤의 이 형상 이론은 AB라는 대상을 분별하고, 구별하는데 유용한 측면이 있긴 하다. 만약에 우리가 플라톤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사물이나 관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추구해나가는 것이 학문의 기본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실효성이 높다. 다시 말해, 형상이론을 사물의 본질이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비유적으로, 유효하다.

플라톤의 철학은 우리 인류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지니는 의미를 우리에게 명료하게 밝혀 주었지만, ‘윤리(선의 추구)’를 최고의 덕목으로 못 박아 버림으로써,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편협하게 하고, 의문의 여지가 많은 부분에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만 과오도 범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류의 최대의 현자 중의 한 명으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책임과 의무와 또 인간으로 삶을 향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다.

내 공부는 내 능력과 노력 둘 다의 부족으로 대충 이 정도로 결론을 내리고 말지만, 내 사고가 좀더 깊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좀더 밝아지면, 그에게 좀더 다가설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