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생물도 죽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자살할 수도 있는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밤을 이어 새벽까지 내리는 날
평소처럼 일찍 깬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여름 무더위를 그나마 견디게 해 주던
선풍기가,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친구 같은 이 친구가
갑자기, 별안간, 불현듯, 얼떨결에, 창졸간에,
정말 황망하게도,
자신의 목을 똑 부러뜨리며
급사하고 만 것이다
두 동강 난 선풍기는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었는데
굵은 힘줄 같은 선 하나가
상체의 추락을 버팅기고 있을 따름
무생물의 자살,
그중에서도 선풍기의 자살은 정말 듣보잡인데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초여름부터 끝나지 않는 늦여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더니만
임무를 다 마쳤음을 직감하고는
그만 자진하고 만 것인가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늦더위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렇게 기적처럼 부활할 수도 있고
올해보다 더 더울 듯한 내년 여름도 있는데
선풍기는 친구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버린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선풍기의 결단 또한 돌이킬 수 없으니
잘 가거라, 친구야
수리비가 과도하면
안타깝게도 기적 같은 부활은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