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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자살한 선풍기

by 길철현 2023. 9. 14.

무생물도 죽을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자살할 수도 있는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밤을 이어 새벽까지 내리는 날

평소처럼 일찍 깬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여름 무더위를 그나마 견디게 해 주던

선풍기가, 

알게 모르게 정이 든 친구 같은 이 친구가

갑자기, 별안간, 불현듯, 얼떨결에, 창졸간에, 

정말 황망하게도,

자신의 목을 똑 부러뜨리며

급사하고 만 것이다

두 동강 난 선풍기는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었는데

굵은 힘줄 같은 선 하나가

상체의 추락을 버팅기고 있을 따름

무생물의 자살,

그중에서도 선풍기의 자살은 정말 듣보잡인데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초여름부터 끝나지 않는 늦여름까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더니만

임무를 다 마쳤음을 직감하고는 

그만 자진하고 만 것인가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늦더위가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렇게 기적처럼 부활할 수도 있고

올해보다 더 더울 듯한 내년 여름도 있는데

선풍기는 친구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버린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선풍기의 결단 또한 돌이킬 수 없으니

잘 가거라, 친구야

수리비가 과도하면 

안타깝게도 기적 같은 부활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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