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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니체·푸코

고병권 -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2009).

by 길철현 2023. 9. 14.

- 읽고 나서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대학교 때, 아니면 군대 시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로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던 듯하다. 그 뒤로 다시 시도를 했으나 끝내지는 못했고, 대신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고병권은 흥미롭게 니체의 사상과 "차라투스트라"를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니체의 글은 뭔가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답답함에 사이다 같은 말을 해준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지나친 탈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떨쳐 버릴 수 없다. 

 

다시 책을 차분히 읽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발췌

1부. 니체와 차라투스트라

25) 니체는 . . .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사람이며 입법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사용할 개념을 창조하고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철학적 노동자들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창조한 개념들을 정리하는 사람이고, 기존에 창조된 가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교육시키는 데 그치는 사람이다. 

27) 니체는 당시 부르주아 문화를 죽음의 문화로 기술하면서 그 핵심에 기독교가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가 죽음을 설교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이 세계'가 죄로 가득 차 있고 천국은 오직 '저 세계'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삶이란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그 이유를 오직 우리가 지은 죄 탓으로 돌린다. 우리가 그들의 함정에 말려들어 삶에 대해 불행한 느낌을 크게 가질수록 우리는 더 큰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삶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죽은 후에 벌어진다는 심판이나 지옥 같은 공상적 이야기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데 쓰는, 이른바 '삶을 배신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보편적 선악의 잣대로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움츠려 들게 하는 도덕주의자들이나, 영원한 보편적 진리를 들먹이며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변화들의 가치를 무시하는 철학자들도 생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이다. 니체는 근대 유럽인들이 자기 삶에 필요한 가치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도덕도 진리도 하나의 보편적 명령으로서 부과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도덕과 진리를 모두가 떠받들고 있다. 삶을 비난하는 기독교, 삶과 무관하게 정립된 보편적인 도덕과 진리. 이 점에서 근대 서구 문화는 구체적 체험으로서 삶을 다루는 문화가 아니었다. 문화 자체가 현실적 힘들에 대한 체험을 기초로 세워지지 않고, 공상적인 힘들을 현실에서 체험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세워졌다. 맑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천상의 힘으로 지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40) 그의 울증과 조증의 교대가 1879년까지는 울증이 조금 우세한 만성적 형태로 발전되어 온 반면, 1880년부터는 조증이 우세한 만성적 형태로 돌변하고 있다. (로제, "니체 신드롬")

43)  나는 내 생애에서 병 속에서 시달리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보다 더 큰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이 사람을 보라")

45)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풍요로운 삶을 위한 적극적 자극으로 수용할 수 있다. ("이 사람을 보라")

52) 발라디에 - 니체는 "개인이 계속되는 변화를 통해 하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생성시킨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것은 여러 번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났던 디오니소스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원회귀에 대한 암시!

52) 영원회귀는 힘들의 과잉 상태. 힘들의 놀이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생성시킨 체험의 결과물로 보인다. "나는 항상 나로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내가 되어 있는 방식으로 그랬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그러나 이때 '동일한 것'은 힘들의 과잉을 원하는 권력의지[긍정]뿐이며, 반복의 결과는 항상 '차이'와 '다양성'으로 나타난다. 

53) 세계와 삶을 긍정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병이 나타나지 않는다. 병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치유의 필요성도 제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무엇을 반복하게 되는가? 고통과 치유의 반복을 끝낸 후, 그는 놀이의 반복, 유희의 반복을 시작한다. 

62) "나의 작품 중에 "차라투스트라"는 나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이 사람을 보라" 서문).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 부른 것은 그 책이 인류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63) 이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더이상 신이나 진리, 도덕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스스로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운명을 일깨워 주러 온 '복음의 사자'다.

67)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가 도덕적 세계의 탄생을 의미한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적 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자 자기극복이며, 새로운 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70) 그는 영국 작가 로렌스 스턴을 칭찬하면서 그 작품의 위대함이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는 데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74) 책을 읽으며 영혼을 소진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를 자기 방식대로 소화하면서 매혹을 느끼고 그것을 삶에 유용하게 쓰는 사람, 심지어 그것을 전혀 읽지 않았음에도 삶을 잘 가꿀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독자일 것이다. 

79) 나치주의자들은 니체를 자신들의 이론적 선구자로 받아들였다. 죽은 지 30년도 더 되어 자기가 그토록 싫어했던 독일의 파시스트들에 의해 우상으로 숭배된 걸 알았다면 무덤 속 니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83) 니체의 계보학은 가치의 발생과 유래를 추적함으로써 기원과 목적을 신성화하기 위해 가해진 폭력과 위선을 드러내고 그 동안 잊혀져 온 사건들을 해방시킨다. 

88) 중요한 것은 누구의 생각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만드는 것이며, 누구의 삶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01) 니체는 기독교 신을 무찌른 것이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정직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누가 어떤 위협을 가해도 정직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과학의 시대에는 기독교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101) 신의 죽음은 만물을 존재하게 해주는 어떤 초월적 실체의 사라짐이자, 선악이나 미추를 판단케 해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02) 형이상학자들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경험 세계('이 세계', 현상계)와는 달리 영원불변하고 순수한 초경험적 세계, 초자연적 세계('저 세계', '실재계')가 있다고 믿으며, 참된 진리나 아름다움이 바로 그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버전들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그렇고, 칸트가 말하는 '물 자체의 세계'가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겠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기독교의 사고 방식과도 닮았다. 기독교도들도 죄 않은 '이 세계'와 천국이 있는 '저 세계'의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108) 그리스도가 전하려 했던 기쁜 소식이야말로 [니체] 자신이 말하는 '신의 죽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115) 더 이상 초월적인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환하게 웃을 때, 신의 죽음이 찾아오며, 그때의 죽음은 인간에겐 가장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122) 실제 역사를 보면 선악에 관한 수천 개의 도덕적 기준이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끔찍한 전쟁들의 대부분이 선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133)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선사하는 덕에 대하여')

138) 에피쿠로스 - 삶에 신경 좀 쓰라

"그대 살았으면 죽지 않았고,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거늘 죽음이 뭐 그리 두려운가." "혹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쳐다보다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망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행운의 선물임을 기억하라." 

162) 니체는 행동 뒤에 행위자를 두는 우리 습관을 지적한다. 니체는 이 습관이 언어의 유혹(특히 주어를 쓰려는 유혹)과 관련되었다고 말한다. "언어 속에 이성의 근본적 오류가 들어 있다"("도덕의 계보학"). 가령 '번개가 친다'는 말을 보자. 사람들은 '번개'와 '섬광'을 구분해서, 번개와 구분될 수 없는 '섬광'을 "번개라는 주체의 활동인 향" 묘사한다. '비가 내린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비라는 주체가 따로 있어 '내릴까 말까'를 선택한 게 아닌데도 우리는 마치 그런 것처럼 말하고 있다. 

175) 노예가 인간의 존엄이니 노동의 존엄이 하는 개념들을 필요로 하고, 또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자극받는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 시대인가! . . . 이제 노예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로, 이른바 "만인의 동등한 권리" 또는 "인간의 기본권",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권리, 또는 노동의 존엄과 같이, 예리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한다. 그들은 어떤 단계, 어떤 수준에서도 "존엄"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 . . 개인적 생존을 위해 생식하고 노동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야 비로소 존엄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 국가')

185) 국가가 어떻게 이들 많은 - 너무나도 - 많은 - 자들을 꼬드기는지를 보라! 어떻게 국가가 그들을 삼켜서 씹고 되씹는지를! "이 땅에서 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나는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손가락이다." 국가라는 괴물은 이렇게 외쳐댄다. 순진하고 귀가 얇은 자와 근시안인 자만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다! [많은 영웅들도 무름을 꿇었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193) 니체는 페미니스트들을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증에 걸니 여성이자, 남성에 대한 원한의 화신들로 간주한다. 

223) 정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장까지 속일 수는 없다. 

237)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인적 노력을 하는 개인은 필연적으로 신을 모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극의 탄생"). 

295)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통한다. 

302) 인간은 신보다 오래된 신앙을 지녔고, 그 신앙으로 신조차 창안했다. 신이 백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이유는 바로 신의 창조자인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311) "다윈의 진화론은 헤겔 철학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즐거운 지식")

329)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 수많은 부품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놀랄 만큼의 많은 것이 필요해. . . . 그것들 전부가 내 일부이고 나라는 의식 그 자체를 만들어내지. . . . 하지만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어느 한계로 제약해. ("공각기동대")

330) 그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완결된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한다는 점에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의 작품 -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람 샌디")

 

3부 "차라투스트라"의 구성과 스타일

338) 반복이라는 형식 자체는 동일해 보이지만 반복이 있을 때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는 반복을 거칠 때마다 건강한 신체로 변신해 간다. 또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면서 고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된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것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의미하며, 세계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41)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축제로 만들지 못한다. 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잘 죽는 법도 배워야 한다. 떠날 때를 놓쳐 지나치게 늙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51) 너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위선에 찬 개의 일종이다. 국가도 너처럼 연기와 울부짖음으로 말한다. 사람들의 믿음을 끌어내기 위해 국가도 너처럼 복화술을 쓴다. ('크나큰 사건에 대하여')

386) "'신'은 생의 반대 개념이며 해롭고 유독한 개념이다. '영혼'이나 '정신', '불멸의 영혼'이란 개념은 신체를 경멸하고 병들게 한다. 그것은 생에 있어 중요한 많은 것들, 가령 영양, 주거, 정신적 식사, 질병의 치료, 청결, 기후 등의 문제를 섬뜩할 정도로 경솔히 다룬다. 건강 대신에 '영혼의 구원'을 외치는 것은 조울증적 광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을 보라")

410) 그[하이데거]는 '신의 죽음'이나 '가치 상실'로 표현되는 유럽의 허무주의에 대한 니체의 진단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니체의 처방에는 반대한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니체의 전략은 오히려 허무주의를 완성시킬 것이다.

411) 하이데거는 유럽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니체의 전략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위기의 절정이자 완성이라고 말한다(현대 과학기술의 병폐는 이것의 적나라한 표현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가르칠 것은 자기극복과 강화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감사와 경외심이라고 주장한다(박찬국,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과 존재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