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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여행이야기

왕궁리 유적[전북 익산시 궁성로 666](20231130)박물관/왕궁리 오층석탑/ 고도리 석조여래 입상

by 길철현 2023. 12. 25.

 

[소개](안내문) 사적 408호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을 건립하여 운영하다가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을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왕궁 터에서는 궁장(궁의 담장),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 공방, 정원과 후원, 화장실, 부엌 등이 확인되었으며, '수부'(首府) 도장을 찍은 기화, 토기, 중국 청자 조각, 금과 유리 제품, 조경석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두산백과) 백제 후기 궁궐의 구조와 기능, 축조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전북 익산 용화산 남측 끝자락의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삼국사기》, 《관세음응험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전라도읍지》, 《금마지》 등의 문헌에 마한 또는 백제 무왕, 보덕국 안승 또는 후백제 견훤의 왕궁이 있었다는 각기 다른 기록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하지만 1989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백제 후기 무왕(재위 600∼641) 때 조성된 궁성의 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정기간 궁으로 사용되다 백제 말~신라 초에 그 터에 탑, 금당(부처를 모신 공간), 강당으로 구성된 사찰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을 둘러쌌던 직사각형 담장은 동서 약 230m, 남북 약 495m로 총 길이 1,454m에 달한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담장으로, 잔존 부분의 최고 높이 1.2m, 폭 3m 내외이다. 내부 공간은 동서 방향으로 뻗은 축대를 쌓아 구획하였는데,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된 구조이다. 전반부에 대형건물, 후반부에 후원·공방·대형 화장실 등이, 전반부와 후반부 경계에 정원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찰 유적은 전반부에서 발견되었다.

대형건물터는 정면 7칸(31m), 측면 4칸(15m) 크기로, 왕이 정사를 보거나 의례·연회를 행할 때 사용한 정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후원은 유적 내 북동쪽 구릉에 있었다. 복잡하고 정교한 수리체계를 갖춘 후원으로, 길이 485m, 폭 2.7~7.2m의 대형수로와 길고 짧은 6개의 곡수로(구불구불한 수로), 4개의 집수시설을 갖추어 물의 저장·공급, 수량조절, 배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원은 조경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사각연못 형태로, 후원의 수리시설과 연결되어 있으며 후원 영역으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도 하였다. 대형 화장실 3곳 중 하나는 길이 10.8m, 폭 1.7m, 깊이 3.4m 크기였다. 공방은 궁에서 사용한 도구 등을 만들던 곳으로, 공방터에서는 금·동·유리 제품과 도가니·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수십 개의 건물터와 부엌터, 가마터, 배수로 등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사찰터에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으며, 금당터와 강당터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왕의 거처와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수부()’라 새겨진 기와를 비롯해 수막새, 토기, 자기, 인장기와, 유리·금·철 제품, 등잔 등 약 1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대관사()와 유사한 사찰명인 대관궁사(), 대관관사(), 관궁사() 등의 이름이 새겨진 기와도 출토되었다.

1998년 9월 1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7월에는 송산리고분군, 부소산성, 정림사지, 미륵사지 등 공주·부여·익산 지역 7개 문화유산과 함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있다.

 

[탐방기] 백제 역사에서 익산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는 국사 시간에 배운 적이 없었다. 그 까닭은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산은 이곳 출신이었던 무왕 시기 부여와 함께 수도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 현재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이다. 때마침 전날 텔레비전에서는 지방 방송국에서 백제의 익산과 관련된  방송을 보여주었다. 아침 시간에 이곳을 찾았다. 전날 다소 무리한 산행으로 허리도 아프고 날씨도 추워서 박물관부터 둘러보았다. 작년 2월에 익산을 찾았을 때 미륵사지 석탑은 찾아보았는데 이곳은 찾지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층석탑을 보고 싶었다. 

 

[박물관] 

수부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이곳이 수도였음을 입증하는 유물이라고.
이야기와 함께 왕궁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현해 낸 이 설치물은 감동적이었다.
옛날에는 용변을 보고 어떻게 뒤처리를 했는가 궁금했는데 나무 막대기를 이용했다고.
중국에서 건너온 돌. 어린석(물고기 비늘을 닮았다고 해서).

 

[왕궁리 유적] 다 둘러보지는 못하고 오층 석탑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 석탑은 백제 시대가 아니라 고려 전기의 작품이다. 규모도 크고,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맞아 균형미가 뛰어나 보인다.

 

[소개](두산백과) 1997년 1월 1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에 있는 석탑이다. 1기단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수리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높이 8.5m이다. 기단부에 탱주(撑柱)가 2개 있는 사각형 석탑이며 옥신(屋身)과 옥개석은 모두 여러 개의 석재(石材)로 구성되었다. 옥신부는 4우주(四隅柱)와 탱주가 각출된 중간석 등 모두 8개로 되었고, 2층은 4면 1석으로 4개, 3층 이상은 2개의 석재로 조립하였다.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개석과 받침이 각각 다른 돌이고 받침은 3단씩이다. 개석은 1층부터 3층까지 8석, 4층과 5층은 4석으로 구성되었다.

1965년 해체·수리하면서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유물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립 시기는 옛 백제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 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이 왕궁리 오층석탑을 노래한 두 편의 시도 걸려 있었다. 

'숨경리'는 '숨결이'를 잘못 적은 것.

 

이병초 - 나비의 꿈 왕궁리 오측석탑에서

 

잔디밭에 떠오른 흰나비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오늘도 깔끄막이다

그늘 속인데도 날은 무덥고

뙤약볕을 지키고 서있는 

네 표정엔 바람 한 점 묻지 않았다

 

미륵산에 등을 보인 석탑의 시간이 허허롭기만 했으랴

백성을 먹여 살린 만경들판의 숨소리가

왕궁리에만 닿았으랴

고조선 준왕의 목소리 너머  반짝이는 춘포항의 황포 돛대며

꿈을 못 이룬 마동의 숨결이 죽창 든 농민군의 함성소리만 못했으랴

 

오래 된 기억에 마음 설레는

황홀한 갈증을 놔먹이며

수천 년 세월을 잊었으리

소정방 부대와 김유신 김춘추 부대에

떼죽음 당한 백제 유민들의 원혼을 몸에 두르고

석탑은 찬찬히 본적지도 지웠으리

지울수록 뼈에 사무치는

평등세상이, 마한과 백제의 무너진 꿈이

두어 점 흰나비로 떠올랐으리 

 

 

깔끄막  벼랑의 방언(전남)

준왕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의 왕

춘포항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에 있었던 나루? 

마동 익산 지명. 전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 (아니면 무왕의 어릴 적 이름인 서동을 이렇게 쓴 것인가?)

 

 

소세양 - 눈 온 뒤 왕궁탑을 바라보며

 

눈 속에 옛 왕궁탑이 

하늘 높이 솟아 있구나

선인의 손바닥인가 생각해 보니

다만 이슬 받는 쟁반이 없고

또 화표주인가 의심해 보니

요동의 학은 어느 때 돌아오려나

만일 기이한 절경을 보태고자 한다면

온 누리에 가득한 둥그런 달빛이어라

 

화표주 망주석. 무덤에 세운 표지 역할을 하는 돌기둥.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소개]

 

왕궁리 유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조여래입상이 있어서 이곳도 찾아보았다. 장승을 연상시키는 이 입상들은 두 개가 200여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 흥미를 자극했다.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태로 세워져 있는 두 개의 입상. 무엇을 염원하는 것일까? 

안도현 - 익산고도리석불입상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나왔지

바위 속은 환햇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