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발아래로
늘씬한 갈색빛의
중급 크기의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지
혹은
바퀴벌레도 갑자기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인지
잠시 정거해 있다
오, 나의 철천지원수
내 아파트의 암세포
책상 위의 두루마리 휴지를 좀 뜯어
조심스럽게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는
찰라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검은 손길을 눈치챈
바퀴벌레가
복잡하게 엉킨 전선들 사이로
사용하지 않는 스캐너 밑으로
나의 찍기 공격을 피하며
요지조리 잘도 도망을 간다
무위로 돌아간 몇 번의 공격
그리고
오디오 받침대 밑에 안착한 바퀴벌레
이번 전투는 나의 패배로 끝이 났구나
그런데 이 바퀴벌레는
더욱 깊숙한 자신의 보금자리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입구에서
나를 조롱하고 있다
그래 마음껏 승리를 만끽하거라
언젠가 네가 다시 나와 방 한가운데서 대면하는 날
그날이 너의 제삿날이리라
밑져야 본전의 심정으로
집게손가락으로 그놈의 더듬이라도 눌러야 분이 풀릴 듯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높이 이 센티미더가 될까 말까한 공간 아래에서
그놈은 나의 누르기 공격을 정통으로 받고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헤롱
죄인을 밖으로 끌어낸 다음
휴지로 말고 정말이지 아작을 낸 다음
쓰레기통에다 투하
바퀴벌레 역사서에서는
너의 죽음을
까불다가 개죽음을 당했다고 기록할 것인가
몇 년 째 계속 되고 있는
바퀴벌레 군단과 나와의 전투
눈도 못 떴을 아기부터
날기도 하는 성충까지
일 밀리미터의 자비심도 없이
학살하고 학살하고 또 학살했건만
백방으로 독약을 살포하고
끈끈이 덫을 설치했건만
오 놀라워라
몇 억 년을 이어온 바퀴벌레의 강인한 생명력
나는 늘상 전투에서 승리하면서도
결국 이 바퀴벌레와의 전쟁에서
완전 격퇴는 있을 수 없음을
나의 일생이
바퀴벌레와의 처절한 전투로 점철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꼭지가 돌면 정말 아파트를 불 사지를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바퀴벌레에 대한 나의 분노를 기록한 유서 한 장 남기고
못 다 푼 원한을 후세에서 풀어주길 요청하며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패배를 솔직히 자인하고
이 아파트를 떠나
바퀴벌레 청정지역으로 이사를 가버릴까
(이사 비용을 바퀴벌레들이 지불해 준다면
그럴 용의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면 그때 나는 또
바퀴벌레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까
무료한 시간에는
바퀴벌레와의 전투의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아쉬워할 것인가
난 바퀴벌레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2012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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