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우거진 연천(漣川) 마을엔
한글 공부 소리 박넝굴보다 더 낭자하고
아오라지 나루는 새 서울의 나루여서
야반 준령 오십리 길도 멀지 않았다.
나루는 기망(旣望)의 달빛이 백사를 깔고
묘망(渺茫)한 금반(金盤) 우에 은장기를 두고
나룻배는 한 척인데
서울 손은 천에도 또 몇몇천
기다려도 기다려도 못 건너는 나루에
삼칠제의 새 소식이 새 소식을 부르니
나루지기 할아버지의 늙은 볼에도 웃음이 돌며
휘연히 아오라지의 긴긴 밤도 밝어오는 것이었다.
1946년 "우리문학"에 실림.
기망(旣望) : 음력으로 매달 열엿샛날.
묘망(渺茫) : 넓고 멀어서 바라보기에 아득함.
금반(金盤) : 황금으로 만든 쟁반 따위.
삼칠제 : 수확한 곡식의 3할은 지주가 가지고 나머지 7할을 소작인이 가지던 제도.
휘연히 : 훤한 듯하게
- 이 시인의 '동절'과 마찬가지로 이 시에도 어려운 한자가 몇 있다. 한자야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데, 뜻풀이로는 이 시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조사를 하다가 한계전의 "한국 현대시 해설"[관동출판사]에 이 시에 대한 설명이 실려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주문을 했기에 책이 도착한 후에 개인적인 감상을 적을까 하다가, 내가 파악한 것과 한계전의 설명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여 일단 현시점에서 내가 파악한 것을 적어보기로 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목이다. '두 갈래 이상의 물이 한데 모이는 물목'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인 아우라지(여기서는 '아오라지'라고 표기. 합수목이라는 단어도 비슷한 의미이다)는 현재는 주로 정선의 아우라지 강을 가리키지만, 사실 그런 곳이 한두 곳은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는 연천이라는 지명과 맞물리면서 한탄강과 영평천이 만나는 곳과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아우라지라는 명칭이 지금도 남아 있는 한탄강과 영평천이 만나는 곳이 좀 더 유력할 듯).
이 시가 발표된 것이 해방 후이기 때문에 '한글 공부,' '새 서울' 등은 해방 후의 변화와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자 신선한 비유는 3연의 '금반 우에 은장기를' 둔다는 표현이다(묘망이라는 한자가 독해를 좀 방해하긴 하지만). 깊은 밤 강 위의 윤슬을 '은장기'에 비유한 시적 상상력은 은장기라는 것이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실제로는 접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담하면서 충격적이다.
손님이 많아 바쁠 뿐만 아니라, 삼칠제로 수익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개편되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사전적 정의에 따라 소작이 소작인에게 유리하게 되었다는 말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좋은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연은 해방 후 우리 민족이 갖는 기대, 희망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해석이 어렵지 않을까 했으나 존존하게? 분석을 해보니 그렇게 어려운 내용의 시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무엇보다도 윤슬을 '금반 우에 은장기'로 비유한 부분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시인은 좌익 경향에서 일제 말기에는 노골적인 친일시를 쓰기도 했는데, 월북하여 숙청을 당하지 않고 왕성한 활동을 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 한계전의 책이 도착하여 해설을 읽고 몇 마디 덧붙여 본다. 일단 전체적인 파악에서 크게 벗어난 부분은 없다. 삼칠제는 구체적으로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12일 북한에서 결정한 소작료율을 가리킨다.' (연천 지방은 38선 이북이므로 당시 소련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계전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시를 정리하고 있다.
차분한 서술적 어조와 향토적인 분위기, 정돈된 시형을 통해 해방된 조국에서 민중들의 벅찬 기대감을 표현한 이 시는 당대의 민심의 현실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바탕으로 하고 잇다는 점에서 현실을 담아내고자 한 해방기 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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