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시 및 감상/한국현대시

이찬 -- 동절(冬節)

by 길철현 2025. 1. 4.

하늘은 가없이 푸르고 멀고

봄 아닌 하늘엔 한 개 나는 새의 가벼운 나래도 없고

 

눈덮인 연산이 젊은 과수처럼 옹조그리고만 앉어

안타까운 날과 날을 바람은 미친 듯 오르락내리락

 

그 서슬에 집웅이 떨고 나무나무 황철나무도 떨고

양지바른 추녀 밑 청승맞게 턱 괴인 괭이수염도 떨고

 

스산한 계절!

말없는 나의 강은 무슨 생각에 잠기었느냐

 

네 좋아하는 구성진 물방아의 콧노래도 오늘엔 없고

네 즐기는 재롱둥이 애기풀의 고운 춤도 오늘엔 없고

 

흐르고 흐른 천리 연변

두팔 벌려 반기는 그 고운 꽃바위들의 기억도 다시 찾을 수 없는 꿈

 

오늘도 너의 음울한 주거 요요(寥寥)한 변두리엔

덧없는 조석을 몰아 지나가는 세월의 허허한 공음(蛩音)만 울려드나니

 

아하 말이 없어도 나는 아노라

고고(孤苦)한 너의 가슴 터지려는 너의 가슴

 

가막까치 우짖는 소연(騷然)한 이 저녁

내일날의 봄을 못 믿는 서러운 네 지혜도 나는 아노라.

 

"밀양". 1940. 

 

- 전체적으로 겨울의 추위와 스산함을 묘사하고 있는 이 시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낯선 한자어와 그 대상이 막연한 '너'로 인해 독해가 좀 막히는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구체적인 사물들의 묘사는 겨울의 엄혹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의 어려움을 실감하게 한다. 

 

옹조그리다 : 옹송그리다의 사투리인 듯. 옹송그리다: 춥거나 두려워 몸을 궁상맞게 몹시 옹그리다. 옹그리다: 몸 따위를   움츠러들이다. 

집웅 : 지붕

연변(沿邊) : 국경, 강, 철도, 도로 따위를 끼고 따라가는 언저리 일대.

요요(寥寥) : 고요하고 쓸쓸함, 매우 적고 드묾.

공음(蛩音) : 사람의 발자국 소리.

고고(孤苦) : 외롭고 가난함.

소연(騷然) : 시끄럽고 수선함. 수선: 남의 정신을 부산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말이나 짓.

'한국시 및 감상 > 한국현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영랑 --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1) 2025.01.07
이찬 -- 아오라지 나루  (0) 2025.01.06
박세영 -- 산제비  (1) 2025.01.03
권 환 -- 한역(寒驛)  (0) 2025.01.01
손세실리아 - 얼음 호수  (0)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