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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영국 문학작품 해설

버지니아 울프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중 <폭풍의 언덕> 부분

by 길철현 2025. 1. 31.

 

<폭풍의 언덕>은 <제인 에어>보다 이해하기 힘든 책인데, 그것은 에밀리(Emily)가 샬롯(Charlotte)보다 위대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샬롯은 눈부실 정도로 거침없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나는 사랑한다”, “증오한다”, “고통에 몸부림친다라고 쏟아 붓는다. 그녀의 경험은 보다 강렬하긴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같은 수준에 있다. 그러나 󰡔폭풍의 언덕󰡕에는 (I)”가 없다. 가정교사도, 가정교사를 채용하는 주인도 없다. 사랑이 있긴 하지만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다. 에밀리에게 영감을 준 것은 좀 더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충동은 자신의 고통이나 상처가 아니다. 그녀는 세상이 거대한 혼돈으로 쪼개어진 것을 감지하고는 그 세상을 한 권의 책 속에서 결합하고자 하는 힘을 자기 안에서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이 거대한 야심은 소설 전반에 걸쳐 느껴진다--반쯤 좌절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신념을 바탕으로 한 분투. 그녀가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나는 사랑한다라거나 증오한다가 아니라 우리, 전 인류는 또, 너희, 영원한 힘은 ‧‧‧‧‧‧문장은 미결인 채로 남아있다.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에밀리가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던 것을 말해 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that she can make us feel what she had it in her to say at all). 그것은 캐서린 언쇼(Catherine Earnshaw)의 어딘지 명료하지 않은 말 가운데 전율처럼 다가온다. “모두 사라지고 만 남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살아 갈 거야. 그런데 모두가 남고 그만 없어져 버린다면, 우주는 아주 낯선 것이 되고 말겠지. 내가 그 일부라고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9).” ('If all perished and he remained, I should still continue to be; and if all else remained and he were annihilated, the universe would turn to a mighty stranger; I should not seem part of it.') 사자(死者)의 면전에서 그것은 다시 터져 나온다. “저는 이승의 고통도 지옥의 불길도 깨뜨릴 수 없는 안식을 본답니다. 거기다 끝없고 어두운 그림자 하나 없는 내세가 피부에 와닿아요--고인들이 들어간 영원의 세계가 말이지요. 그곳에선 생명은 무한히 지속되고 사랑은 공감과 기쁨으로 충만하죠(16). (I see a repose that neither earth nor hell can break, and I feel an assurance of the endless and shadowless hereafter --the eternity they have entered-- where life is boundless in its duration, and love is sympathy and joy in its fulness.') 이 책이 우리 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성의 환영(the apparitions of human nature) 아래 놓여있는 힘을 이런 식으로 암시하고 또 그 환영을 위대함으로 고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밀리 브론테 자신으로서는 얼마 안 되는 싯귀를 읊조리고, 절규하고, 신념을 표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에서 이 일을 한꺼번에 해낸다. 아마도 그녀의 시가 소설보다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 그렇긴 하지만 그녀는 시인인 동시에 소설가였다. 힘은 더 들면서도 멋은 덜한 일을 떠맡아야만 했다. 그녀는 다른 문제점을 직면하고, 외부적인 것의 메커니즘을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더 나아가 농장과 집들을 알아볼 수 있을 형태로 쌓아올리는 동시에 그녀와는 떨어져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의 말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호언(豪言)이나 광시곡이 아니라, 한 소녀가 나무를 타고 놀면서 혼자 옛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황무지의 양떼가 풀을 뜯는 것을 보는 가운데, 또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을 스치고 지나는 소리를 듣는 가운데 정서의 이러한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기묘하고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농가의 삶이 우리 눈앞에 전개된다. 우리는 자꾸만 "폭풍의 언덕을 실제 농가와 비교해 보고 히스클리프(Heathcliff)를 실제 인물과 비교해 보고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우리 두 눈으로 본 남녀와는 거의 닮은 점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진실이나 통찰력이나 정서의 미세한 음영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우리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에서 천재 여동생이 보았을 오빠를 본다. 그런 인물은 존재할 수 없다, 라고 말하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그보다 생생하게 존재성을 가진 소년이 있는가? 캐서린(Catherine) 모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또 그들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고 그들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은 영국 소설에서 가장 사랑스런 여성들이다. 마치 에밀리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인간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찢어버리고는, 작열하는 삶으로 이 인식하기 힘든 투명성을(these unrecognisable transparence) 채움으로써 그들이 현실을 초월하게끔 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힘은, 그래서, 모든 힘 가운데 가장 보기 드문 것이다. 그녀는 현상의 굴레로부터 삶을 해방시키고, 몇 번의 손놀림으로 실체가 필요 없는 얼굴을 가진 영혼(the spirit of a face)을 가리킬 수 있었다. 또 황야를 노래함으로써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번역 : 길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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