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재인폭포는 그 풍광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폭포가 품고 있는 전설 또한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매력적이어서 지난 30년 동안 이곳을 지속적으로 찾았다. 이곳에서 나는 시도 쓰고, 또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산문으로도 썼다. 이번에는 전설에 얽힌 세 인물의 입을 빌어 쓴 이야기 시들을 한 번 묶어 보았다.
[재인폭포 전설문]
재인폭포는 주위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고 깊으며, 한탄강 상류에 인접한 관광지로서 연천이 자랑하는 명승지의 하나이다.
이 폭포는 이 고장의 줄타기에 뛰어났던 재인(才人)의 한과 그 부인의 절개에 관한 전설이 깃든 곳으로, 그 높이는 18.5m나 되며, 밑에는 넓고 깊은 연못을 이루어 피서지로서 특히 이름 높다.
폭포의 주위에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가을 단풍 또한 매우 아름답다.
옛날 고을 원님이 절색의 미모를 가진 재인의 아내를 탐한 나머지, 재인으로 하여금 이 폭포 위에서 줄을 타는 재주를 보이게 한 뒤 줄을 끊어 죽였다. 그리고 재인의 아내에게 수청을 들게 했으나, 이때 그 아내는 원님의 코를 물어뜯은 뒤 혀를 깨물고 마침내 자결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에 절개 굳은 코문이(재인의 부인)가 살았다 하여 ‘코문리’로 부르게 되었고, 후일 어음의 변화로 ‘고문리(古文里)’라 다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 재인 아내의 말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불러 보지만
이제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으로 가버렸지요
아니면 억울하고 원통한 심정에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나요?
그래도 자꾸만 왜, 하던 그 목소리 들릴 듯하고
길쌈을 하는 내 손을 은근히 잡아줄 것만 같네요
서방님, 서방님은 정말 어디에 있는가요?
서방님과 저는 어릴 적부터 한 마을에서 자라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지요
양반님네들처럼 남녀유별이란 말도 몰랐고요
서방님은 갖바치의 아들
저는 백정의 딸
사람들은 천 것이라고 멸시했지만
배곯지 않은 것만해도 다행이었어요
게다가 동무들과 어울려
봄이면 진달래 개나리 피는 산으로
또 여름 들판 강가에서 놀던 어린 시절엔
웃음소리가 넘쳐 흐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서방님은 어릴 적부터 재주가 많았지요
소리면 소리 탈춤이면 탈춤 못하는 게 없었고
줄타기는 연천현에서는 그야말로 제일이었지요
머리도 비상하여 어깨너머로 언문을 배워
저에게도 가르쳐 주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버렸으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 아버지와 서방님의 아버님도 친한 사이였기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언약도 없었지만
서방님의 나이 스물
제 나이 열여덟에 자연스레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서방님은 인근 부자들 놀이에 불려 다니며
자신의 재주를 팔았고
그 재주 값으로 받은 삯으로
우리 두 식구 먹고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죠
보릿고개에 산에서 칡뿌리를 캐 먹거나
터무니없는 고리로 양식을 빌려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의 형편은
그나마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서방님은 우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으나
제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저 또한 타들어 가는 속으로
금슬 좋은 우리 부부를 시기하는 잡귀를 달래느라
새벽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 앞에 정한수를 떠놓고
치성을 올리기도 했지요
아쉬운 대로 그렇게 서방님과 저
한 평생을 보낼 수 있었다면
천하디 천한 우리에게도 이 삶은 견딜만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지체도 높고 학식도 높은
거기다 풍채도 좋은 신관사또는
부인에다 첩까지 두고서
왜 저를 탐하는 것일까요?
저를 탐하다 못해 서방님까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만 했나요?
배운 것 없는 천 것이라도
그게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안타까운 사고라고 하지만
전 알아요, 누가 고의로 끊지 않고서야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는 걸요
법이 법을 어겼으니
누구에게 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나요?
세상이 진창처럼 더러우니
저도 적당히 더러워져
끼니나 챙기며 이 생을 건너야 하나요?
서방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서방님하고 나지막이 부르면
금방에라도 왜, 하는 서방님의 목소리 들릴 듯한데
서방님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저에게도 이 삶은 더 이상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네요
2. 현감의 독백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일장춘몽만 같다
사태가 그토록 걷잡을 수 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아니 막무가내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마냥
그렇게 되고만 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혹은 내 탓이 아니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서에 이르기를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잡을 수 없다고 했던가?
모든 일은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소산인가?
인간 동물로 살아가는 무늬인가?
뭍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이제는 무심하다
우리 집안은 조부와 선친 대에 이르러
명망이 약간 수그러들긴 했어도
충청도 지방에서는 모르는 이 없는 권문세가
십육 대 조부께서는
조선의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
조부와 선친은 관운이 없으셨는지
대과에 거듭 낙방하시자
집안과 향리의 일을 살피시며
장자인 나에게 기대를 걸었지
삼강오륜을 인륜의 근본으로 강조하던 선친은
내가 몇 번의 고배 끝에 대과에 급제하자
내 두 어깨에 가문의 중흥을 매다셨어
선친과 나는 요직이 아니더라도
중앙의 자리를 노려보기도 했으나
위태로운 성적으론
연천현만 해도 언감생심이었어
지방 한촌이긴 해도
한성에서 그리 멀지 않고
인근 철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평야가 꽤 넓어 벼 소출도 좋은 편이라
삼사 년 무탈하게 잘 다스리면
중앙 요직으로 불러주겠다던
오촌 당숙 도승지의 언질이 없었어도
작은 지방이긴 하나
직접 백성들의 안위를 살핀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슴 벅찬 일이었지
선정을 베풀겠다는 내 야심 찬 포부는
축하 연회에서부터 이미
술 취한 내 발걸음처럼 비틀거리기 시작했어
새로 부임한 사또를 위해
이 지역 토호들이 마련해 준 연회에는
재주가 많다 해서 재인이라 불리는 사내가
지금껏 본 여느 줄꾼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입에서 감탄 소리가 절로 나왔지
사람들은 저마다 재인의 솜씨에 칭찬을 더하다가
그다음 재인 아내의 미모를 두고 갑론을박
양귀비가 울고 갈 얼굴이요
초선과 서시는 이름도 못 내민다는 둥
난 그냥 한성 기녀들은 보지도 못한
촌로들의 한담으로 귀를 흘렸지만
내심 그 자태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어
지방 현감이 말단직이긴 해도
이런저런 공사가 다망하여
세월은 쏜 화살처럼 휙휙 지나가는데
그날,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날,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날,
고을 시찰을 나갔다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지 종종걸음 치는
그 여인과 맞닥뜨리고 만 것이야
맞은편에서 스쳐가는 그녀를 잠시 본 것뿐이지만
누구의 설명이 없어도 난
그녀가 재인의 아내라는 걸
촌로들이 침 튀기며 칭찬하던 여인이란 걸
한눈에 알아차렸지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예리한 칼날처럼
내 가슴 한켠을 베고 지나간 그런 느낌이랄까?
매혹이라는 단어의 뜻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상처 난 가슴을?
천민이라고 해도 그녀, 엄연히 남의 부인이요
나에게도 부인이 있고
기방에서 눈 맞아 데려온 소정이도 있는데
부질없는 욕망이요
잊어야 할 꿈이더라
떨쳐도 떨쳐도 다시 와 붙는 욕망이요
잊어도 잊어도 살아나는 꿈이더라
사서삼경에서 이르는 신독의 예를
주문처럼 외워도
나 그만 군자의 도리를 놓치고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던가?
자꾸만 공무를 놓치고
시름이 깊어가면서 몸도 시름시름이라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을 토로했던가?
귀 밝고 눈 밝은 형방이
(그의 모친이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급전을 주어 좋은 약재를 구하게 해 주었는데)
그녀에게 다리를 놓아주려 애썼는데
워낙 은밀하고 은밀해야 할 일이라
도무지 한 치의 진척도 없던 터
형방의 충성심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내 간절함이 그 도를 넘고 말았던가?
형방은 재인의 재주를 부추겨
폭포를 둘러싼 절벽 양쪽에다 밧줄을 묶고
그 위를 건너게 했던 것이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누구도 그 전말을 정확히 모르는데
혹자는 형방이 몰래 그 밧줄을 끊었다고 하고
혹자는 재인이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여
하늘 높이 솟구치는 현란한 재주를 보이다가
그만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내가 내 코를 꿸 수는 없는 노릇
사고인 양 적당히 무마하고 말았지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으니
이제 때만 기다리면 되는 법
천한 신분에 뭐 그리 대단한 절개가 있겠는가?
서방마저 떠난 지금 호구지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상대로 그녀는 순순히 나의 부름에 응했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자태는
호롱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을 베고 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어
내 마음은 거친 바다처럼 출렁이면서도
있어야 할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내 술잔에 술을 따를 때
그리고 내 곁으로 다가와 앉을 때
내 가슴의 상처는 점점 커지면서
또 점점 아물어 갔지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삶의 모든 의미가 거기에 있음을 보았어
그리고 그녀가 내 코를 있는 힘껏 물어뜯어
반 이상이나 떨어져 나갈 때
이상한 말이지만
난 비로소 그녀와 한 몸이 된 느낌이었어
나 이제 떨어져 나간 코를 하고
조선팔도를 유리걸식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경서에 이르듯 시위를 떠난 화살은
누구도 멈출 수 없으니
바람도 없는데
벚꽃잎이 눈처럼 하얗게 떨어져 내리던 날
먼 산에는 아지랑이 피던 춘삼월의 그날
그녀가 한 줄기 서늘한 바람으로
내 가슴 한켠을 베고 간 것을
난 후회하지 않아,
정녕코
3. 재인의 말
간밤 내리던 비 그쳐
하늘은 높푸르고
폭포는 맑고 힘차게 흰빛으로 부서진다
줄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허나, 줄 위에 한 번이라도 올라본 이라면
이 수십 길 협곡에 줄을 건다는 건
미친 짓거리라 주저 없이 말하리라
형방은 무슨 도깨비 바람이 불었는지
사또의 생신 축하연이랍시고
이곳을 건너라 하는구나
아니 되오, 아니 되오, 아니 되오
입안에 맴도는 말을 혀끝에 올렸다가는
그야말로 치도곤을 면치 못하리라
각시와 야반도주라도 할까
혼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버릴까
짧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도
뾰족한 답이 없구나
우리네 인생살이는 아무리 곱씹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누군가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외치며
난리를 일으키기도 했다지만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고 말았는가
위로는 주상전하로부터
아래로 이 작은 고을의 퇴락한 양반까지
반상의 구분이 서릿발 같은데
우리네 백정은 신분은 양인이라도
실제로는 천인 중의 천인이라
세 살배기 앞에서도 감히 고개를 못 드누나
동록개*라는 말이 공연히 나왔겠는가
아내는 자식이 없다고 슬퍼하지만
자식이 있어 집안에 웃음소리 울음소리 부산하고
노년에는 기대고 싶기도 하지만
이 개만도 못한 나의 설움을
물려주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다행이구나
올라야 한다면 오르는 것이 줄꾼의 운명
하늘님께 이 목숨을 맡기고
지난 이십 년 익히고 익힌 기술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집중해야 하리라
벼랑 끝에 선 물처럼
이 줄 바깥은 모두 허공이라
줄이 건네는 말에 온 정신을 기울이면
발바닥으로부터 나아갈 길이 또렷해지리라
*이 이름은 동네 개만큼 천하다는 의미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백정의 신분으로 자신의 집을 집강소로 내놓은 '동록개'라는 인물에서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