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호수행

청지[청제, 청저수지, 청못, 경북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37-1](20260509) 영천 청제비

by 길철현 2026. 6. 2.

 

[안내문]


[소개] 경부고속도로가 저수지의 상류 부분을 가로지르는 영천의 청지(청제)는 저수지 자체나 주변 풍광보다는 그 역사적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의 고대 저수지로는 보통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상주 공검지를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 이중 제천 의림지는 현재에도 남아서 저수지(관광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청지는 이 저수지들 다음으로 신라시대에 축조되었는데, 고대의 저수지들 중 유일하게 그 축조 과정과 동원된 인력의 수를 기록한 청제비가 남아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굉장한 의의를 지닌다. 제방을 쌓을 때 동원된 인력이 7,000명에 이른다는 기록은 이 저수지처럼 규모가 그리 크지 않더라도(물론 지금의 저수지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수지의 축조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인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국가적 사업이라는 것을 잘 짐작하게 한다.  

 

영천을 잘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이 저수지를 찾아보았다. 저수지에는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순환펌프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제방은 이 저수지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풀이 무성한 것이 잘 정비가 되어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 청제비는 2025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이 안내문의 첫 문장은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청제비가 신라 시대의 청제비와 조선 시대의 청제중립비를 통칭하는 명칭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청제비 앞면
청제비 뒷면
청제 중립비 앞면
청제중립비 뒷면

 

여수로
제방 일부 구간은 풀이 너무 무성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방 아래
수질 정화 장치?
여수로는 암반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영천 청제비

 

[제미나이]

 

영천 청제비(永川 菁堤碑)는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저수지인 '청못(청제)'의 축조 및 수리 역사를 기록한 비석입니다. 오랜 기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가, 고대 수리시설 및 토목 기술과 신라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5년 국보로 승격되었습니다.

청제비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자연석판에 글을 새긴 2기의 비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기의 기록(축조·수리·중립)을 담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비석 (양면비)

하나의 돌 앞면과 뒷면에 각각 신라 시대의 축조 및 수리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 앞면: 청제축조비 (536년, 신라 법흥왕 23년)

  • 시기: 병진년(536년) 작성을 뜻하는 '병진명'이라고도 부릅니다.
  • 내용: '대오(大塢, 청제의 옛 이름)'라는 저수지 제방을 처음 쌓은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 주요 기록: 저수지의 규모와 함께 공사를 위해 무려 7,000명의 역부(노동력)를 동원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공사를 지휘하고 책임졌던 관리들의 이름과 관등명이 차례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라 정부가 지방의 수리관개시설 정비와 노동력 징발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 보여주는 핵심 자료입니다.

📜 뒷면: 청제수리비 (798년, 신라 원성왕 14년)

  • 시기: 당나라 연호를 따서 '정원명'이라고도 부릅니다.
  • 내용: 처음 축조된 지 약 260년이 지나 파손된 제방을 다시 고쳐 쌓은 기록입니다.
  • 주요 기록: 임금(원성왕)이 관리들을 파견하여 무려 14,800여 명의 일꾼을 동원해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진행했다는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2. 두 번째 비석

📜 청제중립비 (1688년, 조선 숙종 14년)

  • 내용: 조선 시대에 이르러 땅에 묻혀 있거나 무너져 있던 신라 시대의 청제비를 찾아내어, 저수지를 다시 수축하고 비석을 새로 바르게 세웠다(중립)는 사실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 영천 청제비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

  • 독보적인 연대 확인: 동아시아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고대 저수지 중, 축조와 수리 연대를 이처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비석 기록입니다.
  • 수리 기술의 발전: 제방을 뜻하는 명칭이 고대 신라의 '오(塢, 보 형태)'에서 통일신라의 '제(堤, 댐 형태)'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토목 기술의 발전을 증명합니다.
  • 언어학적 가치: 비문 속에 배수용 나무통을 뜻하는 '빼굴리(排掘里)' 같은 신라어(또는 당시 영천 지역의 방언)가 이두 형태로 표현되어 있어 고대 국어 연구에도 매우 중요하게 쓰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고학사전]

 

경상북도(慶尙南道) 영천시(永川市) 도남동(道南洞)에 소재하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저수지로서 사용되고 있는 청못을 축조, 수축(修築)하고 난 뒤 그를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이 비는 1968년 12월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삼산학술조사단(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의 높이는 대략 1.3m, 너비는 0.93m, 두께는 약 0.45m로서 적갈색의 화강암을 약간 가공하였으나 현 상태의 비면은 그리 고르지 못한 편이다. 글자는 앞뒤 양면에 새겨져 있지만 특이하게도 앞·뒤 두 면의 작성연대가 달라 흔히 영천 청제비라고 통칭하지만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원래 청못을 축조하고 난 뒤 병진(丙辰)의 간지가 있는 비문을 새겼는데 이를 흔히 '병진명청제비'라 부른다. 비에 사용된 자체(字體)나 외형, 내용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이전의 비문임은 확실하나 그 절대연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근거가 없어 단정하기가 어렵다. 5세기로 소급하여 신라 최고(最古)의 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경위(京位)가 보이는 점, 그 어미에 제(第, 혹은 帝) 자가 붙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법흥왕 23년(536)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뒷면은 당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인 정원(貞元) 14년(신라 元聖王 14년, 798년)이란 절대연대가 붙어 있는 명문인데, 이때에 파손된 청못을 고치고 난 후 기존에 세워져 있던 비를 활용하여 작성한 것으로 '정원명청제비'라고 불린다. 이 청제비와는 별도로 조선시대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청제비가 두 동강이 나서 매몰되어 있던 것을 찾아내어서 세웠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영천청제비는 거의 이동되지 않고 원래 세워졌던 곳에서 발견된 듯한데 현재에는 비각과 함께 보호막이 돌려져 보호되고 있으나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 위치해 있는 탓에 관리가 허술하여 발견 당시에 비하여 크게 훼손된 상태이다. 특히 지형상 배수가 잘 되지 않아 비가 올 경우 빗물이 비면을 타고 오르는 등 보존에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병진명청제비(丙辰銘菁堤碑)에 사용된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고졸(古拙)한 해서체(楷書體)로 마모가 심할 뿐만 아니라 이체자(異體字)가 많아 비슷한 시기의 다른 비문에 비해 판독에 이견(異見)이 많다. 전체 10행으로 행마다 글자 수가 달라 적은 행은 9자, 가장 많은 행은 12자로 전체 107자 정도로 추정된다.

비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1행에서 4행까지로, 비를 세운 연월일과 함께 저수지의 이름과 길이, 너비, 높이 등 저수지의 규모와 이를 축조하는 데 동원된 인력의 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후반부는 인력을 동원하는 데 책임을 맡은 인명을 열거한 부분으로 사인(使人)을 비롯한 직명과 함께 대사(大舍), 소사(小舍), 대오(大烏), 소오(小烏) 등의 경위를 가진 왕경인, 간지(干支)를 가진 지방 유력자의 이름 등이 보인다. 이 병진명은 법흥왕대에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목적으로 국가적 사업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던 제방(堤防)의 축조 등 문헌기록상에 보이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물증하여 주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그밖에 역역(力役)동원의 방법과 규모, 길이의 단위로 사용된 득(得)의 용례, 경위의 표기 방법, 외위(外位)인 간지의 존재, 이체자의 사용 등은 당시 신라사의 이해를 높이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정원명청제비(貞元銘菁堤碑)의 서체는 행서(行書)가 약간 가미된 해서체로서, 병진명과는 달리 몇몇 까다로운 이체자를 제외하면 판독에 대한 논란은 별로 없다. 전체 12행으로 매 글자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행마다 글자 수가 적은 행은 4자에서 많은 행은 16자로 큰 편차를 보인다. 비문의 단락을 세분하면 저수지인 보(洑)를 수리한 시점과 배경, 저수지의 규모, 작업한 기간, 노동력 동원의 조직과 규모 및 그 범위, 작업 책임자의 인명열거 부분 등으로 구분된다. 이 저수지와 관련된 역역동원에 대해서는 군현제적(郡縣制的)인 것으로 보는 견해, 녹읍(祿邑)이나 왕실직속지(王室直屬地)로 파악하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영천청제비에 대해서는 통일 이전과 이후의 역역동원의 형태나 범위 조직의 양상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 보다 많은 연구가 계속돼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청제비 [永川 菁堤碑] (고고학사전, 2001. 12.)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대 저수지 4곳 [제미나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커 역사책이나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고대 저수지들을 흔히 '삼한 시대(또는 고대)의 3대·4대 수리시설'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 저수지들은 단순히 물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벼농사(수리 관개)의 핵심 기지이자 당대 최고 토목 기술의 집약체였습니다. 대표적인 고대 저수지 4곳의 이름과 역사적 내용을 정리해 드립니다.


1. 김제 벽골제 (金堤 碧骨堤) — 우리나라 고대 저수지의 효시

  •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 축조 시기: 백제 비류왕 27년(기원후 330년) 축조 추정
  • 내용 및 역사적 가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인공 저수지입니다. 제방(둑)의 길이만 무려 약 3.3km~3.8km에 달하며, 당시 백제의 고도로 발달한 토목·측량 기술을 증명하는 유적입니다.
    • 물을 조절하던 5개의 거대한 석조 수문(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등)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 우리가 흔히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을 일컫는 '호남(湖南) 지방'이라는 말의 '호(湖)'가 바로 이 벽골제를 뜻할 만큼 역사적 상징성이 큽니다.

2. 제천 의림지 (堤川 義林池) — 현재도 기능을 유지하는 유일한 저수지

  • 위치: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 축조 시기: 삼한시대(진한) 축조설,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 축조설 등 존재
  • 내용 및 역사적 가치: 벽골제나 수산제가 세월이 흘러 논으로 변한 것과 달리, 의림지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제로 물을 가두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유일한 고대 저수지입니다.
    • 계곡의 물을 막아 만든 산곡형 저수지로, 주변의 오래된 소나무 숲(제림)과 어우러져 경관이 매우 뛰어납니다. (현재 명승 제20호로 지정)
    • 충청도 지역을 뜻하는 '호서(湖西) 지방'이라는 말의 '호(湖)'가 바로 이 의림지의 서쪽을 의미합니다.

3. 밀양 수산제 (密陽 守山堤) — 영남 지역 벼농사의 중심지

  • 위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 축조 시기: 삼한 시대 내지 원삼국 시대 추정
  • 내용 및 역사적 가치: 낙동강 지류의 범람을 막고 주변 만평 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흙으로 쌓은 거대한 제방입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제방 길이가 1km가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 임진왜란 이후 보수되지 못해 점차 황폐해졌고 현재는 대부분 농경지(논)로 변했으나, 과거 자연 암반을 깎아 만든 수산제 수문(경상남도 기념물)이 발견되어 고대 수리 기술의 흔적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 최근에는 고대 농경 문화를 기념하는 수산제 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4. 상주 공검지 (尙州 恭儉池) — 전설과 민요가 깃든 '공갈못'

  • 위치: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 축조 시기: 삼한 시대 내지 기원전 1세기 가야 시대 추정
  • 내용 및 역사적 가치: 고대 영남 지방 최대의 곡창지대였던 상주 지역의 젖줄 역할을 했던 저수지입니다. 흔히 '공갈못'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 둑을 쌓을 때 자꾸 무너지자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어 제방을 완성했다는 슬픈 구전 설화가 전해집니다. (학술 조사 결과 흙을 단단히 다져 쌓는 고대 고난도 토목 기술인 '판축 공법'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연꽃이 가득 피어나 장관을 이루었던 곳으로, 고대 저수지 중 유일하게 연밥을 따며 부르던 노래인 「채연요(採蓮謠)」라는 민요를 탄생시킨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는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 채연요 내용  :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처녀야 연밥줄밥 내따주께/ 이내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따기 늦어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