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성, [식탁 위의 얼굴들] (문학과 지성사)990601
[읽기는 며칠 전에 다 읽었지만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못 쓰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펜을 들었다.(6/6)]
전체적으로 내가 공감하기 힘들었다. 몇 몇 군데 멋있는 말들--이를 테면, ‘내가 도착한 곳은 내가 출발한 곳(어느 날 아침),’ ‘눈동자를 기울이면 녹물이 쏟아진다(누가 누구를 거부할 수 있을까)’ 등등--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언어의 유희 쪽으로 흘러간 냄새가 짙다. 사실 언어는 약속이므로, 언어는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 약속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 버린다면, 무의미해진다. 돈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언어를 쓰는 곳에서는 한국어가 전혀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가 가진 힘, 진정성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이철성의 시에는 그 약속을 너무 쉽게 위반하고 있지는 않은가?
소년은 말한다
“산 위를 떠가는 나의 구름아!”
그러나 청년은
시커먼 비를 뿌리는 구름을 쳐다본다.
소년은 청년에게 말한다.
“구름은
구름 저 너머의 세계에서 왔지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인다.
청년은 말한다.
“벽은 책상이고
책상은 숟가락이고
숟가락은 반찬통과 함께
하늘을 날아간다.”
소년은 깜짝 놀란다.
그리곤 쓰러져 있던 우산을 챙겨들고
성급히 그곳을 떠난다.
‘소년과 청년’이라 이름 붙여진 첫 시를 옮겨 보았다. 소년과 청년은 대조되는 인물이다. 소년은 아직도 꿈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고, 청년은 현실?을 알아버린 인물이다. 소년은 구름을 보고 “산위를 떠나는 나의 구름아!”라고 말한다. ‘나의 구름아’라는 말이 흥미롭다. 소년은 구름을 왜 자기 것이라고 여겼을까? 그런데 청년은 구름을 ‘시커먼 비를 뿌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작가의 인식 또한 그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시커먼 비는 아름다울 수 없는, 맞으면, 맞는 사람 또한 시커멓게 되고 말 그러한 비이다. 한 마디로 말해 나쁜 것이다. 소년은 여전히 구름을 환상이나 꿈을 간직한 그런 것으로 보고 “구름은/ 구름 저 너머의 세계에서 왔지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청년의 그 다음 말이다. “벽은 책상이고/ 책상은 숟가락이고/ 숟가락은 반찬통과 함께/ 하늘을 날아간다.” 전혀 말이 안 되는 말을, 정확한 어법으로 청년은 말하고 있다. 당연히 소년은 깜짝 놀라고, 그래서 ‘쓰러져 있던 우산을 챙겨들고/ 성급히 그곳을 떠난다.’ 과연 이 시가 시적으로 성공했는가? 우리에게 뭔가 울림을 주는가? 하는 점은 의심스럽다. 소년과 청년의 대조, 청년이 내뱉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이 말을 좀 더 생각해 본다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이름이 뒤섞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게 무엇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다만 이렇게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은 놀랍다.
‘거울 1 --느낌’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이 시는 흥미롭다. 이 시는 이상의 ‘거울’을 떠올리게 하면서, 그 시에게 희화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거울 속의 존재가 자신의 다른 면인지 어떤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지만, 1연의 시상 전개가 재미있다. 하지만 이것이 2연 이후로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으며, 이철성의 시세계는 내가 봐온 시세계와는 이질적이라서, 차라리, 후반부에 보이는 초기시들이 오히려 솔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이철성의 시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언어 약속을 너무 쉽게 위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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