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Hersey, A Bell for Adano, Bantam--12월 30일 (번역 및 재독을 끝내고)
쉽고 재미있는 소설이라 별다른 큰 어려움없이 두 달여만에 무사히 번역을 끝마쳤다. 원고를 다시 읽고 정리하는 작업만 남았다.
헌 책방에서 우연히 구한 책 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었던 것이 Harper Lee의 [To kill a mocking bird]였는데, 이 책도 우연찮은 기회에 구하게 되었다(이 책을 구입했던 서점이 포르노 테입이나 도색 잡지를 몰래 팔던 그런 곳으로, 외국 서적과 기타 다른 서적의 판매는 허울이었다는 점이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컬 하다). 94년 이 책을 구할 당시 Hersey라는 이름과, 이 책의 제목 정도는 [미국 문학사]를 읽으면서 머리에 입력시켜 둔 상태였던 듯하다. 그리고 95년 7월 달에 일 주일 정도에 걸쳐 이 책을 읽었는데 당시 느낌이 상당히 좋아서, 11월에 번역에 착수해는데 계속하지 못하고 50여페이지 정도를 하다가 중단했었다. 요번에는 직전에 [고흐의 편지]라는 길고 힘겨운 번역을 마친 뒤라 탄력이 붙어 있는 상태였고, 또 책 자체도 어렵거나 따분하지 않아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마칠 수가 있었다.
허시의 소설 중에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은 [양자강의 푸른 눈 Single Pebble]과 [히로시마]뿐이지만, 상당히 많은 작품을 쓴 작가로, 자신의 직업이 기자였던 탓에 작품이 르뽀 문학(보도)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처음 이 작품을 읽은 감상은 적지 않았는지 남아 있지 않았지만, 대체로 두 가지 점이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상당히 미국적이고, 상당히 휴머니즘적이다. 거기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상당히 코믹하다는 것이었다. 사십 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산업 사회의 영향이 지방에까지 완연하게 퍼져나가지 않는 상태라는 것과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듯 순박하다는 느낌, 혹은 더 나아가 약삭 빠르지 않고 어리석다는 느낌까지도 받게 되고, 그러한 것이 읽는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알게 모르게 미국의 패권주의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예수적인 인물로 자신의 희생함으로써 타인들을 구한다는 순교자적인 기독교 정신에 충실하고 있지만, 그 반면으로 볼 때 그는 미국이 표상하는 것, 미국 건국 당시의 민주주의 이념이라든지 그런 것을 이탈리아라는 유서 깊은 나라에다 깊은 고찰 없이 이식시키려는 태도(물론 이 당시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와, 군정이라는 상황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독재자라는 점 등도 간과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이 작품이 미국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고, 조폴로와 아다노 읍민 사이의 관계가 상하 관계라는 점(다시 말해 미국이 이탈리아에 가르치고 베푸는 입장이라는 점) 등은 해방 이후 미국과 우리 나라의 관계에서 미국이 취했던 태도와 흡사하기 때문에, 역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소설에서 중심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런 점이 아니라, 비록 단순화되긴 했지만,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해 보려는 조폴로 소령의 의지, 더 나아가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한다. 삶은 이 소설에 그려진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은 어떻게 보면 명료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 이상을 추구할 용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조폴로 소령에게는 그러한 용기가 있었다. 그 용기의 결과가 그 개인으로서는 좌절로 끝났지만, 아다노라는 마을에서는 그가 새로 단 종처럼 사라지지 않을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작품은 단순하고 간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화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이 읽는 사람 개개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건 나로서는 상당히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명료하게(그 와중에 현실이 너무 단순화된 약점은 있지만) 그려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않았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