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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독서일기95-00

박서원,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동아일보사, 98년 [2000년]

by 길철현 2016. 12. 1.

- 박서원,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동아일보사, 98



<질곡의 삶, 성찰의 요구>

 

이런 류의 책, 다시 말해 고전이 아닌 개인적인 에세이에는 주목을 해본 적인 없는 내가 박서원의 책을 고른 것은, 헌책방에서 이긴 하지만, 무슨 연유일까? 일단은 그녀의 기면증이라는 병이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은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인정하기 싫지만, 그 바로 밑에는 그녀의 미모에 대한 관심이리라. 미녀의 내부를 살펴본 다는 것, 미녀를 벗긴다는 것, 그것만큼 남자를 자극하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각설하자.

김정란은 이 책을 감정적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칭찬하고 있긴 하지만(‘이 책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피이며, 살이며, 절규, 그리고 말의 힘으로 끓여낸 영혼의 찌개백반이다.’(259)), 내가 보기엔 그다지 깊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내가 여자혹은 여성에 대해서 그만큼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쳐 말해야 하리라. 남자인 내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잣대로 이 책을 읽은 소감은 그다지 깊이를 느끼기는 힘이 들었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겪은 삶의 질곡을 박서원은 더욱 더 뼈저리게 체험했으며, 그리고 놀랍게도(그래서 그녀는 리비스의 말을 빌자면 하나의 sport’이다) 그녀는 그 삶의 질곡을 꿰뚫고 나왔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질곡 속에 있으며, 누구나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 질곡을 뛰어넘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과거와 현재의 상태가 남자에게 좀 더(아니면 철저하게)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해서, 그것에 너무 분개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여기서 내 언어는 또 주관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크면 클수록, 이상을 향한 몸부림은 가열찬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내가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그런 종류의 것이다. 여기서 섣불리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박서언이 시인이고 또 정식 문학을 수업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산문 쓰기가 어찌보면 아직은 서투른 면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이 책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술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글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라는 것은, 그녀가 글을 어떻게 기술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은, 원론적인 이야기이다. 그녀의 글은 많은 부분 그녀의 삶을 캐리커쳐하고 있다는 의심을 준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녀의 병증도 생생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문장들을 보면 그러한 생생한 묘사에 필요한 긴 호흡이 없다. 내가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은 이 부분이다.

나는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그녀의 삶 중에서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법대 교수와의 사랑이야기뿐이니까, 어떤 평가를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정란처럼 그녀를 너무 치켜세우는 것도(거기에 어떤 상업적인 의도가 있든 없든 간에. 아니면 추천의 글이란 그런 궤적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을 수는 없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이 책은 박서원 자신에게는 통절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은 그런 것이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구체성과 깊이에서 부족하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그녀의 삶이 걷잡을 수 없는 질곡이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남성 페니스의 폭력이 있다는 점도 망각해서는 안 될 듯하다. 그녀의 시를 읽어본 뒤라면 그녀에 대한 인상이 뒤바뀔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서른 아홉에 쓴 이 에세이에는 삶의 성찰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그리고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역사성이라는 것까지도 덧붙여서) 하는 생각이 내내 따라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