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Scott Fitzgerald, The Great Gatsby, Penguin (120320)
<텍스트>
1. F. Scott Fitzgerald. The Great Gatsby. Penguin.
2.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욱동 옮김. 민음사. (참조)
3.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참조)
4. The Great Gatsby. (1974년 영화). 감독-Jack Clayton
5. The Great Gatsby. (2001년 TV 영화). 감독-Robert Markowitz
●[위대한 개츠비] 두 개의 시각
1. 기억들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피츠제럴드의 이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으로 읽어보려고 시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88년도 1월이었다. 당시 나는 평택에 있는 미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영어 실력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영어 원문으로 읽으려는 나의 시도는 “1장”을 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책을 뽑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공책에다 적어 두었다.
영어의 한계를 넘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다. 사람은 단순해 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너무나 재어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재어보는데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린다.
이 때 나는 아마도 부대 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읽으려고 했던 듯하다. 현재 가지고 있는 책은 88년 5월 16일 <자유서적>이라는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자유서적>이 어느 책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서울의 한 헌책방임에는 틀림없다. 당시의 독서 수첩과 일기장을 보면 그 날 혹은 그 전날 <광릉>에 갔다가 시작을 시도한 것으로 나오고 그때 <광릉>을 처음 갔을 때의 인상은 아직도 그런 대로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광릉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세조의 묘가 일반 사람의 묘보다 약간 큰 정도에 지나지 않아 한 나라의 왕의 묘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점이다). 지금 짐작으로는 그 당시 자주 찾았던 서울역 부근의 헌책방들 중의 한 곳이 아닌가 한데.
두 번째로 이 책을 든 것은 제대를 몇 달 앞 둔 다음 해 1월이었다(선임병장이 되면서부터 시간적으로 꽤 여유가 있었다). 이 책에 재도전 하면서 공책에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전공 공부를 이제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국문학과 영문학, 둘 사이에 끼여 고민하고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본다면 영문학의 필요성을, 플라톤의 말--다른 하나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자기 경험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라는--처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두 번째 도전인데 끝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힘겹긴 했으나 이 책을 한 달 9일 걸려서 다 읽었는데, 안타깝게도 읽고 난 뒤에 감상은 한 자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한 달 내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연대 영문과 4학년생들과 2대 2 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이 책이 어려웠다”고 하자, 그녀들이 공히 “개츠비는 읽기 어렵지 않은 책”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내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다(그것이 아니라면 새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미팅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책을 집어 든 이유가 아마도 그 여학생들이 쉽다고 한 책을 못 읽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는지도.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은 읽어야 자기의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의 친구가 되려면 아직 한 번은 더 읽어야 하는 셈이다. 이번에는 대학원 지도교수님의 퀴즈 출제 관계로 방학 중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 학기에 청강하는 <미국 현대 소설>에서도 또 이 작품을 첫 작품으로 다루어 수업 시간에 2주에 걸쳐 중요한 부분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읽으면서 느낀 것은 무엇보다 처음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내용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아무런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었고, 또 이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오이디푸스적이라는 점이다. 이번에 작품을 읽을 때는 정신없이 탁구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 읽는 것이 잘 되지는 않아서 제대로 집중을 못한 듯하기도 한데 이 작품이 괜찮은 작품이라는 것만은--그렇다고 카프카나 도스토예프스키, 조이스 정도의 깊이를 지녔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감지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은 나에게 상당한 울림을 주었는데 그 하나는 피츠제럴드가 닉 캐러웨이(Nick Carraway)라는 화자를 통해 “개츠비”라는 인물, 즉 미국인의 꿈이라는 신화에 조종을 울린 인물을 창조해 내는데 성공을 했다는 것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개츠비”가 오이디푸스 시기의 어려움 가운데 상징적으로 죽은 자아의 일부라는 인상으로 다가오는 면도 컸다.
이 작품을 영화화하여--영화를 통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부각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성공을 거둔다는 것은--물론 시각적으로 미국의 1910년대 말 혹은 20년대 초를 이미지화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만--어렵지 않나 하는데, 이번에 작품을 읽고 배우면서, 1974년도에 나온 영화와 2001년에 나온 영화도 같이 보았다. 영화는 1차 세계 대전 직후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성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개방의 바람이 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공허한 미국 사회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글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글이 아니라, 이번에 작품을 접하고 난 다음에 갖게 된 두 가지 인상--바로 위에서 지적을 한 것처럼--하나는 일반적으로 이 작품을 보는 시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적 접근 혹은 내 자신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된 차원에서의 시각을 적어보는 장이 될 것이다.
2. 미국인의 꿈의 실상
이번 학기에 나로서는 다소 낯설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미국 문학--세부전공이 미국문학이 아니라 근대영문학이고 그 중에서 19세기 영국소설을 가장 집중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을 가르치게 되면서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 즉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이 광대한 신대륙을 마주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딜레마 혹은 이중성이었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콜럼버스의 도착으로 기왕의 원주민을 거의 말살시키고 유럽의 식민지로 다시 출발하게 된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럽의 전통이라는 것이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전개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유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을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새롭게 출발을 할 수도 없었다. 연속하면서도 단절을 시도하고, 단절하면서도 연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의 운명이었는데, 단절 혹은 새로운 출발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미국적인 독특한 신화 중에 가장 큰 것이 “미국의 꿈”(An American Dream)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한 마디로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열려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를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 바로 18세기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Autobiograph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난하고 이름없는 가문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후 세상에서의 부와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었다. 지속적으로 좋은 운이 내 인생의 노년까지 나를 따라왔으므로, 나의 후손들은 내가 이용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그 수단들을 알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From the poverty and obscurity in which I was born and in which I passed my earliest years, I have raised myself to a state of affluence and some degree of celebrity in the world. As constant good fortune has accomplished me even to an advanced period of life, my posterity will perhaps be desirous of learning the means, which I employed, and which, thanks to Providence, so well succeeded with me. (16)
출신 성분이 아니라 개인적인 덕성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성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이 “미국의 꿈”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에게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는 보수적인 측면도 있다. 거기다 개인적 삶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가 물질적인 부의 성취 쪽으로 편중되고 마는,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가볍게 여기는 측면 또한 있다.
어쨌거나 피츠제럴드의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미국의 꿈”의 신화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같은 해(1925년)에 발표된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미국의 비극](An American Tragedy)과 함께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지금까지의 내용은 천승걸의 「미국의 꿈과 미국 문학의 전통」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바꿔 말해 보자면 가난 때문에 자신의 첫 사랑의 여인인 데이지(Daisy)와 결혼을 하지 못했던 개츠비가, 그녀와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막대한 부를 손에 넣지만 예기지 못한 죽음으로 인해 파국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물질적 부의 소유 정도라는 것은 원래부터 “미국의 꿈”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측면에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본주의라는 것이 미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리로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부자--예전의 귀족계층과 흡사하지만 그들도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실은 장사 등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일반 시민의 자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와 서민층을 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데이지와 탐 뷰캐넌(Tom Buchanan), 조던(Jordan), 그리고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전자라면, 개츠비와 윌슨(Wilson) 부부는 후자에 속한다. 개츠비는 그가 꿈꾸어 왔던 상류사회로의 진입--작품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금주법을 역이용한 밀주의 판매를 통해, 또는 다른 불법적인 사업을 통해서--에 성공한 듯이 보이는 인물이고, 조지(George) 윌슨의 아내인 머틀(Myrtle)은 탐의 정부 노릇을 하며 그를 통해 계층 상승을 꿈꾼다. 개츠비와 머틀의 신분 상승의 꿈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남녀라는 성적인 차이가 사회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머틀의 꿈이 신분 상승이라는 측면에서 머무르는 것과는 달리 개츠비의 꿈은 그 대상이 데이지에서 바뀔 수 없다는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개츠비의 특이성은 데이지라는 여성--그녀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이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만을 추구하는 히스클리프를 상기시키기도 하고, 또 낭만적 사랑의 한 표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개츠비의 특이성이 이 작품을 “미국의 꿈”의 신화가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있는 징표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 문제는 뒤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글은 이 시점에서 미완성의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Winter Dreams"를 읽을 것인가? 읽어보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Fitzgerald라는 이름에서 Gatsby를 찾을 수 있다. ge--tz--Fi)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고 이러다가 강의 준비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강의 준비를 먼저하고 생각을 좀 더 전개시켜 나가보도록 하자. 오늘 꼭 다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 여유를 갖고 차분히 생각을 밀고 나가보도록 하자.)
구체적으로 작품으로 들어가 본다면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자신의 꿈을 향해 끝까지 달려간 개츠비의 꿈이
가난한 서부 출신의 청년인 제이(J) 개츠비--그의 본명은 제임스 개츠(James Gatz)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름까지 바꾸었다--는 자신의 첫 사랑인 데이지(Daisy)--지금은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를 다시 찾아오기 위해 그녀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부를 손에 넣는다. 작품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가 부를 넣는 과정에는 당시의 금주법을 역이용한 밀주 판매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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