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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학작품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Henry James. The Turn of the Screw)[150207]

by 길철현 2016. 12. 17.

*Henry James. The Turn of the Screw. Shina-sa [150207]

 

[1058]

이 작품은 흥미를 유발하는 면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의 지력을 시험하고, 해석의 축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헛갈리게 하는, 자칫 잘못 이 작품이 전개하는 미로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헤맬 수 있는 그런 작품이다.

작품의 초반부 전개 방식은 당대에 유행하던 수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과 똑같은 방식의 전개양식을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라는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보여주는 것. 물론 이 작품에서 글을 쓴 당사자는 가정교사이고 그녀는 실제로는 작품 내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실에 의심이라는 잣대를 가져다 댄다면, 이 여자 자체가 더글라스의 허구적 구성물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심한 처사이고, 일단은 그녀가 더글라스의 누이의 가정교사로 그보다 열 살 연상이며, 그녀가 기술하는 내용은 4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 보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가정교사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목사의 막내딸이다)에 부모님이 죽은 남매를 가르치게 되는데, 그녀는 이 남매의 삼촌, 그러니까 이들의 후견인이자, 그 집의 주인인 남자에게 첫 눈에 매혹된 그런 상태이다. (이 남자는 아이들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시골집이 아니라 런던에서 따로 살고 있으며,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그런 상태이다.)

이 집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방향에서 볼 것인가, 하는 것이 이 작품 해석의 요체가 될 것인데,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는 가정교사가 이 일에 대해서 기록한 글밖에 없기 때문에, 그 글 속에서 드러나는 허점들을 찾는 수밖에 없다. 먼저 가정교사가 당면하게 되는 것은 모순적인 상황이다. 아이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똑똑하며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오빠인 마일즈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상태이고, 또 그녀가 오기 이전에 있던 사람들 중 죽은 인물들인 Jessel(가정교사)Quint(하인)의 유령과 통교를 하고 있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이 집의 가장 높은 가정부인 Grose 부인의 말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이였고, 두 사람은 모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은 상황이었다. Grose 부인이 그들을 사악하다고 보고 있는 것의 연장선상에서 또 유령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 결합해서 가정교사는 이 두 악령이 아이들을 악으로 몰아가고 있다고(아니 좀 과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을 악령으로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는 배경에는 이 집안에 진정한 책임자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집안을 이끌어나가야 할 인물인 주인이 자신의 책임을 가정교사에게 전가해 버림으로써 그 일을 감당할 역량이 잘 되지 않는 가정교사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상상의 세계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유령이라는 것이 현대처럼 거의 정신병적인 환각으로 파악되지는 않았을 이 시기(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자료조사가 필요하겠지만)에 그녀가 그러한 상상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령의 목도는 어쨌거나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그녀에게만 일어났고, 이 점은 호숫가에서 그녀가 제셀의 유령을 볼 때, 그로스 부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장면에서 명백해진다.

그리고 많은 부분, 그녀의 생각들은 객관적인 근거가 아니라 자신의 어떻게 보면 비정상적인 통찰에서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그녀의 가정들) 그녀의 생각에 (온전한) 정당성을 부여하기에는 많은 의심이 따른다. 그녀 자신이 공언한 대로 그녀의 정신 상태는 주인에 매혹된 점 때문에 많이 흔들리고 있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녀가 악령들의 침해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 또 그 일이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힘겨운 일이라는 점이 갖는 진정성에는 의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작품의 다른 한 축이라는 것이 아이들일지라도 인간의 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은 분명하다.

 

제임스의 이 작품은 좋은 논문거리이다. 제임스의 이 작품에도 콘래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19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고 있다. 한 사람의 화자를 통해 일직선적으로 사건이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단순한 작품이지만, 상황을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가정교사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은 상당히 현대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일즈가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마는 것으로 작품을 마무리함으로써, 제임스는 상당히 비관적인 세계관을 노정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가정교사, 혹은 제임스 자신이 이 작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삶과 죽음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것임을 경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이 작품으로 페이퍼를 하나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