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베르나르 미셸, 고흐의 인간적인 얼굴, 김남주 옮김, 이끌리오
고흐에 대한 책은 끊임없이 출간되고 또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만큼 그는 이제는 신화적인 인물로 자리잡은 듯이 보인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정신병과 광기와 인정받지 못한 화가로서의 비참함 등에 대해서 한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최근에 나온 국내 저자가 쓴 두 권의 저서와는 달리, 프랑스 작가인 미셸이 쓴 이 책은 고흐가 1888년 12월 23일 밤, 귀를 자른 사건부터 그의 죽음까지, 그러니까 채 2년이 안 되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같은 프랑스 감독 모리스 피알레가 만든 [반 고흐]가 고흐의 오베르 시절, 그의 생애의 마지막 두 달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마음에 드는 것은 저자의 정확한 고증이다. 저자 자신이 프랑스에 살고 있다는 지역적인 유리한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고흐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 책 자체가 다루는 시기가 짧고, 책의 분량도 많지 않아서, 우리는 고흐 생애의 일부밖에 접할 수 없지만, 저자 자신의 다소 개성적인 시각을 보여주면서도, 사실적인 면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책을 신뢰하게 만든다.
고흐의 병증은 유전적인 요소와 압상트로 인한 알콜 중독 등의 원인을 내세우는데, 특히 압상트 중독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읽을 만하다. 그리고 예술품 창작에 있어서의 천재성과 광기의 모종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천착에도 흥미가 간다. 거기다 도스토옙스키와 고흐의 유사성--그것은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순교의 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에 관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빈센트가 인간의 비참에 통달한 이들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비극에 대한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예견자들과 더불어 그들은 20세기의 비극을 예고한다. 관념과 한담과 괴벽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그토록 희망적이고 떠벌려진 진보라는 것이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 인간 조건의 불안정성을 결코 완화시킬 수 없다는 것, 오직 인간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울러 이 두 간질 환자는 믿음의 형제들이기도 하다. 불가지론자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수용소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단 한 권, [성서]뿐이었다. 욥의 반항과 고독에 상응하는 고통의 밑바닥에서도 그는 확고하게 믿음을 지킨다. “그리스도보다 완벽하고 연민에 넘치고 심오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그는 쓴다. 한편 빈센트는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어린 시절 가졌던 신앙의 세세한 것들은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유일하게 . . . 영원한 삶, 영원한 시간, 죽음의 허무, 고요와 헌신의 존재 이유를 확실하게 선언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은 그대로 간직했다. “이 전대미문의 예술가는 . . . 인간의 두뇌라는 우둔한 도구로 ‘살아있는 인간’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147-8)
미셸이 고흐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부분은 다소 상식적이기 때문에 밋밋한 면도 없지 않으나, 예술을 지망하는 사람들로서는 금과옥조는 아니더라도,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라고 본다.
우리의 고통과 세상의 온갖 비참함에 대해 “우리는 오직 우리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예술 창조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아닌가. 우리의 그림은 곧 우리의 말이다. 그림만이 우리를 위해 우리에 대해 말해준다. 아름다운 그림만을 추구하는 화가도 없고 작가 역시 단지 출간하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기 위한 언어인가?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예술가 자신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림이나 글이나 조각이나 음악으로 표현된 말은 때때로 암시적이다. 예를 들어 고통을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린 인물들과 풍경들 속에 들어 있다”고 빈센트는 쓴다. 그것은 “비극적인 고통”이다. “진주가 굴의 상처에서 나온 것처럼 . . . 문체는 가장 깊은 고통에서 나온 이상 돌기물”이라는 플로베르의 이미지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고통의 순간 그 사실을 회상한다. “고통 한가운데에서 그 진주에 대한 비유가 내게 떠올랐다.” (218-9)
한 마디 끝으로 덧붙인다면, 고흐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고흐와 실제 고흐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음도, 이 책은 확인하게 해주었다.
<발췌>
*슬픔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야. (119)
*도스토예프스키와 빈센트가 인간의 비참에 통달한 이들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비극에 대한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예견자들과 더불어 그들은 20세기의 비극을 예고한다. 관념과 한담과 괴벽을 믿지 않았던 그들은 그토록 희망적이고 떠벌려진 진보라는 것이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 인간 조건의 불안정성을 결코 완화시킬 수 없다는 것, 오직 인간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아울러 이 두 간질 환자는 믿음의 형제들이기도 하다. 불가지론자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수용소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단 한 권, [성서]뿐이었다. 욥의 반항과 고독에 상응하는 고통의 밑바닥에서도 그는 확고하게 믿음을 지킨다. “그리스도보다 완벽하고 연민에 넘치고 심오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그는 쓴다. 한편 빈센트는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어린 시절 가졌던 신앙의 세세한 것들은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유일하게 . . . 영원한 삶, 영원한 시간, 죽음의 허무, 고요와 헌신의 존재 이유를 확실하게 선언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은 그대로 간직했다. “이 전대미문의 예술가는 . . . 인간의 두뇌라는 우둔한 도구로 ‘살아있는 인간’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147-8)
*빈센트에게는 광기 이외에 또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그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두 가지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글이었는데 두 가지 모두 그에게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발작 직후 그가 쓴 문장은 얼핏 보기에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비틀거리는, 부서진, 가라앉은, 길 잃은, 절망한, 끔찍한’이란 핵심 단어들은 그의 치밀하고 눈부신 붓질만큼이나 강렬하고 웅변적이다. 거기에서 예술과 그림, 화가의 삶에 대한 증언, 창조에 동반된 고통과 작품의 탄생에 대한 멋진 고찰이 나온다. 지적이고 호기심 많고 교양 있는 빈센트는 인본주의라는 전체성 속에서 일상과 그림을 통찰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의 병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해야 할 것을 많은 이들이 “그 덕택으로”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추론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판단이다. 빈센트 자신이 “인간과 작품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지만 그 관계를 규정짓기는 어려우며, 많은 사람들은 그 점에서 오류를 범한다”고 단언하지 않았던가. (212)
*우리의 고통과 세상의 온갖 비참함에 대해 “우리는 오직 우리의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예술 창조에 대한 적절한 정의가 아닌가. 우리의 그림은 곧 우리의 말이다. 그림만이 우리를 위해 우리에 대해 말해준다. 아름다운 그림만을 추구하는 화가도 없고 작가 역시 단지 출간하기 위해 한 권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하기 위한 언어인가?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예술가 자신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림이나 글이나 조각이나 음악으로 표현된 말은 때때로 암시적이다. 예를 들어 고통을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그린 인물들과 풍경들 속에 들어 있다”고 빈센트는 쓴다. 그것은 “비극적인 고통”이다. “진주가 굴의 상처에서 나온 것처럼 . . . 문체는 가장 깊은 고통에서 나온 이상 돌기물”이라는 플로베르의 이미지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고통의 순간 그 사실을 회상한다. “고통 한가운데에서 그 진주에 대한 비유가 내게 떠올랐다.” “실제로 누구나 오직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리고, 쓰고, 조각하고, 만들고, 건축하고 창조하는 것뿐”이라고 후에 앙토냉 아르토는 쓴다.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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