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길호, 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학고재) (2001년 1월 26일)
이 책은 국내의 고흐 애호가 내지는 연구가가 책의 형태로 써낸 것으로는, 내가 아는 바로는, 두 번째이다. 특히 이 책을 펴낸 민길호는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상징적 언어와 표현]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나와 있어서, 지난 번 박홍규가 펴낸 [내 친구 빈센트]를 읽었을 때의 실망감--즉 저자의 일방적인 시각만이 앞서고, 고흐 예술의 본질이랄까, 그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가지는 의의 등을 전혀 설득력있게 보여주지 못한 점, 거기다, 평전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전기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확인 작업의 미비 등--을 상당 부분 불식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접했다. (거기다 개인적으로는 마침 [인상파와 근대미술]이라는 제목으로 덕수궁에서 오르세 미술관 한국전이 개관하던 날 고흐의 그림 두 점을 처음으로 접하고, 그 때의 그 벅찬 그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교보 문고에 들렀다가, 우연찮게 구입하게 된 책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책 제목부터가 고흐를 내부에서부터 끌어올려 보겠다는 필자의 의도가 드러나는 그런 것이라, 더욱 나를 사로잡았는지 모르겠다. 민길호가 시도하고 있는 이런 양식은 일단 ‘자서전 형식을 차용한 전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나 저자가 고흐와 혼연일체가 되어, 고흐의 정신을 부각시켜 보여주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고흐의 경우에는 1872년부터 그가 죽은 1890년까지 18년 동안 동생에게 보낸 650 여통의 편지가 있으므로(이 밖에 동료 화가, 여동생 등에게 보낸 편지도 다수 있다), 이 편지들을 근간으로 다른 여러 자료들을 규합하여 쓴다면, 자서전 형식으로 글을 쓰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듯 했다. 거기다, 필자는 미술대학을 나왔으며, 화가이기도 하니까 고흐의 그림에 대해서 나같은 아마추어는 볼 수 없는 부분들까지도 환히 밝혀줄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 같은 기대는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부터 혼란스러움에 빠지고, 그래서 한 동안 이 책을 내버려 두었다.
반 고흐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미워하리만큼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의 삶과 그가 남긴 그림들은 종교로써 설명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종교 화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서 시작되며 하나님을 보기 위해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집념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6)
이 진술은 고흐의 편지(The Complete Letters of Vincent Van Gogh)를 다 읽고 난 나의 생각과 상치될 뿐만 아니라, 고흐의 전기 소설로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는 어빙 스톤(Irving Stone)의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Lust for Life)에서 보여주고 있는 고흐의 사상적인 변화와도 배치된다. 고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차적인 자료는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이므로, 일단 고흐의 종교관 내지는 신에 대한 생각을 언급한 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I should like to read more widely, but I must not; in fact, I need not wish it so much, for all things are in the word of Christ--more perfect and more beautiful than in any other book. (Vol 1, 144)
But I always think that the best way to know God is to love many things. Love a friend, a wife, something--whatever you like--you will be on the way to knowing more about Him; that is what I say to myself. But one must love with a lofty and serious intimate sympathy, with strength, with intelligence; and one must always try to know deeper, better and more. That leads to God, that leads to unwavering faith. (Vol 1, 198)
이 편지들은 고흐가 화가가 되기 전 목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을 무렵에 동생에게 보낸 것이다. 이 당시 고흐의 생각은 이 책의 필자가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흐가 말년에 보낸 편지를 볼 때에는 이 책의 필자의 주장이 더 이상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I feel more and more that we must not judge of God from this world, it's just a study that didn't come off.
What can you do with a study that has gone wrong? --if you are fond of the artist, you do not find much to criticize--you hold your tongue. But you have a right to ask for something better. We should have to see other works by the same hand though; this world was evidently slapped together in a hurry on one of his bad days, when the artist didn't know what he was doing or didn't have his wits about him. All the same,
according to what the legend says, this good old God took a terrible lot of trouble over this world-study of
his. (Vol II, 572)
Oh, my dear brother, sometimes I know so well what I want. I can very well do without God both in my life
and in my painting, but I cannot, ill as I am, do without something which is greater than I, which is my life--
the power to create. (Vol III, 25)
We know life so little that it is very little in our power to distinguish right from wrong, just from unjust, and
to say that one is unfortunate because one suffers, which has not been proved. (Vol III, 191)
편지에서 발췌한 위의 세 인용문을 볼 때, 고흐가 청년 시절에 지녔던 종교관 내지는 기독교적 신관을 그대로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흐의 그림을 “종교로써 설명”해보려는 시도 자체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만약 그러한 시도가 고흐의 그림을 고흐 자신의 사상이나 의도가 아니라 이 책의 필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이나 세계관으로 주관적으로 해석해버리고만 것이라면, 그것은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글의 필자는 고흐의 그림에 고흐의 목소리를 빌어 해석을 나가는 중에 “주님”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주님”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고흐를 ‘기독교 신자’로 오인하게 만들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고흐를 생각할 때 그가 종교적인 인물이었다는 것, 또 그의 집안에 대대로 목사가 있었으며, 아버지도 목사였다는 점과, 그가 아버지가 부임해 있는 “누에넨”이라는 곳에서 그림을 그릴 당시, 아버지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아,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좀 더 신중한 사려와 근거 제시가 있어야 하겠지만, 어쨌거나, 고흐를 유신론자로,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 신자로 파악해 버리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이 책의 필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종교관 및 세계관을 주관적으로 무리하게 고흐에게 접목시킨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이 아닌가 한다.
그 다음으로 [내 친구 빈센트]에서와 똑같이 이 책에도 평전으로서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 책은 어처구니 없게도 모우베(Mauve, 보통은 마우베라고 부름)를 고흐의 외삼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마우베와 고흐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마우베는 고흐의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다. 외삼촌이 아니라는 증거로 분명한 것은 고흐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이 카르벤투스이므로, 모우베라는 성과는 맞지 않는다(보충; [Van Gogh in England]라는 책에서 마우베와 고흐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Anoton Mauve(1838-88)는 고흐의 이종 사촌 동생인 Jet Carbentus(1856-94)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마우베는 고흐의 이종 사촌 매부가 되는 셈이다.)
둘째, 고흐는 1884년부터 누에넨에서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 그는 이웃집 여자인 마르호트
(Margot, 마르고트라고도 함)와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 때의 정황이 이 책의 저자가 그리고 있듯이 그토록 낭만적이었는지는 의심이 간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조할만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단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 고흐의 제수가 적은 짧은 [회고록]을 볼 때 이 때의 사랑은 마르호트 쪽의 일방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With one of his mother's visitors, the youngest of three sisters who lived next door to the vicarage, he had
soon got into a more intimate relation; she was much older than he and neither beautiful nor gifted, but she
had an active mind and a kind heart. She often visited the poor with Vincent; they walked much togeter, and on her part at least the friendship soon changed into love. As to Vincent, though his lettears do not give the
impression of any passionate feeling for her(the fact is, he wrote very little about it), yet he seemed to have been inclined to marry her. (Vol I, XXXVI)
그리고, 어빙 스톤의 전기 소설에서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마르호트 쪽의 일방적인 사랑과, 고흐의 인간적인 애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였다는 민길호의 주장에는 선뜻 공감하기가 힘이 든다. 이러한 의심은 필자가 참고 문헌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강해진다. 필자는 무엇을 토대로 이 책을 짜나갔을까? 아무것도 없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참고 목록을 첨부하지 않았을까?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찾아보기’도 없애야 하지 않을까?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필자는 그것이 가장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셋째,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다가 다친 곳은 발목(51)이 아니라 대퇴골(Vol II, 256)이다.
그리고, 그림 해설 중 [자화상](도 44)에 대한 설명은 아마도 저자의 착각이라고 생각이 드는 데,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는 제가 진실한 불자임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라’에서 목걸이는 속옷의 단추라고 봐야할 것이다. 당시 남자들이 목걸이를 했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고흐가 목걸이와 같은 장식품을 몸에 걸쳤다고 보기도 힘들며, 그림 상에서도 적갈색의 둥근 물건은 단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고흐의 그림과 사상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서라기 보다는, 필자의 주관이 많이 개입된 나이브하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깊이가 얇은 글이다. 이 책이 보여준 성과라고 한다면, 고흐의 해석에는 주관이 많이 개입 했음에도, 연대기랄까, 사건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격적인 고흐 연구서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한국인이 고흐에 대해서 쓴 글이라는 점, 또 화가이자 미술학도인 사람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비판적인 안목으로 일독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발췌한 부분]
*저는 일 생 동안 36번에 걸쳐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유화로 그린 수치인데, 연필로 그린 것은 세어보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더 많은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느낄 때마다 예외없이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화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저를 수없이 발견하고는 당황해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래도 그 자체가 저였기에 알면서도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프지만 그러한 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희망과 기쁨으로 그렇게 그렸습니다.) (124)
*그[쇠라]는 저와 비슷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말입니다. (136)
*저는 태어나서 죽는 그날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때는 예수님이고 어떤 때는 부처님도 되었습니다. 그는 고정된 이미지를 갖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때와 장소에 따라 항상 누구와도 같이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과 사를 관장하시고 연결하여 주시는 절대자임을 믿습니다. (173)
*저는 그[고갱]의 그림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의 단순한 표현력,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 등은 제가 좋아하고 배워야 할 점이었습니다. 반면 너무 장식적인 면에 치우치는 경향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도가 지나친 상징적인 표현에는 동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도 제 그림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 그림에 내재해 있는 심오한 정신적 상징적 의미에 대해 항상 경의를 표했습니다. 특히 그는 저의 해바라기꽃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하여 걸핏하면 한 점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교환하자고도 했습니다. (195)
*“이제 우리는 형이 영원한 안식을 취한 것에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할 때이지만 아직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나는 형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 같다. 어쩌면 미소를 지으며 죽어가는 사람의 불가사의가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싶구나. 형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희생당하면서 그 고통에 어떠한 숭고한 값어치를 두고 그것들과 싸우며, 그렇게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292--3, 테오가 여동생 리스에게 보낸 1890년 8월 5일자 편지)
*아파트 유작전을 즐길 여유도 없이 테오는 심각한 병증상을 보였습니다. 처음엔 기침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정신착란을 일으켰습니다. 현기증 증세를 느끼며 별안간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가까스로 위기는 면했으나 그 정신착란은 빈센트의 증세와 똑같은 것으로 매우 심각하였습니다. 파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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