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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이야기

박홍규, 내 친구 빈센트 [고흐 관련 서적 감상] Gogh

by 길철현 2016. 4. 10.


*박홍규, 내 친구 빈센트, 소나무 (000120)


외국인의 저술이 아닌 한국인이 쓴, 그것도 미술사가가 아닌 법학자가 쓴 고흐의 평전이라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 더군다나 아주 개인적인 화가로 알려진 고흐를 시대의 산물, 부르주아 시대의 모순이 나은 비극적 인물의 전형으로 보려는 저자의 의도에도 상당히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고흐를 잘 알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는 이 책이 지닌 약점이 책을 읽어 나갈수록 두드러졌다.


우선 ‘이 책은 더욱 더 편지 그 자체에 근거하여 빈센트 스스로 자서전을 쓴 것처럼 그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지니는 모순성이다. ‘편지’라는 것은 잘 알려진 대로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인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것으로 육백 오십 여통에 달하는 것인데, 고흐가 쓴 편지가 자서전으로 볼 수 있을만큼 그의 생활의 상당 부분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나, 자서전을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서전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자서전을 쓰고 있는 필자가 객관성을 유지하겠다고 공언을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는 허언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자신의 일에 어떻게 객관적일 수가 있겠는가? 객관성은 오히려 전기에서 유지되기가 쉽다. 이 책 저자의 이런 모순적 태도는, 반 고흐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과 함께, 책 후반부,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에 가서는 고갱을 폄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사실 저자는 오히려 객관성을 유지했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고흐를 옹호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이 아쉽다.


그 다음으로 지적해야 할 부분은, 이 책이 지닌 커다란 취약점이자, 이 글의 저자가 고흐의 평전을 적는 시점에서 좀 더 엄밀함과 면밀함을 지니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데, 고흐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몇 가지 착오와 부주의이다. 저자는 상당히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고흐의 이름을 네덜란드 식으로 부른다면 ‘핀센트 판 홋호’이고, 고흐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의 이름이 보통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외제니라는 걸 밝힘으로써, 자신이 고흐의 전기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전기적 사실의 부정확성은 글을 읽어 나감에 따라 군데 군데 눈에 띈다.


1)고흐가 암스테르담에서 목사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1877년), 이 때 이모부의 딸인 코르넬리아(흔히 K로 알려진)를 만난 것은 사실이나, 이때 K가 ‘어린 자식을 잃고 덩달아 남편까지 잃어버렸다는 것(p84)’은 착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K가 남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1881년 경의 일이고, 내가 아는 바로는 아들은 죽은 일이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이 책의 기술은 애매하다.


빈센트는 등에 상처가 날 정도로 막대기로 때려가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날씨가 추운 겨울 밤에도 밖에서 한뎃잠을 자면서 15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빈센트는 어머니의 친척인 목사의 딸 코르넬리아를 만났다. 어린 자식을 잃고 덩달아 남편까지 잃어버린 그녀는 슬픔에 젖은 ‘검은 옷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빈센트는 다시 우울증에 빠졌다. (p84)


슬픔에 젖은 ‘검은 옷의 여인’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후일 고흐가 그녀를 사랑한 것은 사실이나, 이때 그녀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가 쓴 편지에도 그런 언급은 전혀 없거니와, 어빙 스톤이 쓴 전기 소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Lust for Life]를 보아도 이 당시에는 그녀 남편이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고흐가 나중에 이 이종 사촌인 코르넬리아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이 글의 저자는 자신의 ‘오론 손을 석유 램프 불 위에 올렸다’고 썼으나, Walther와 Metzger가 쓴 책의 연대기에 따르면 ‘왼 손을 촛불 위에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2)그 다음으로 고흐에게 큰 영향을 끼친 마우베 혹은 모브(Mauve)는 고흐의 종형이 아니라 사촌 여동생의 남편인데도 cousin을 사촌으로 그냥 옮기곤 하는 번역상의 미숙함을 이 책에서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은 더욱 말이 맞지 않는다.


헤이그에서 그는 종형인 화가 모브를 찾았다. 이미 이즈라엘즈, 마리즈, 메스닥과 함께 헤이그파의 거장이었던 그는 1872년 빈센트의 질녀와 결혼하여 그 전부터 빈센트와 친했다. (p106)


빈센트 반 고흐는 반 고흐 집안의 맏이로 이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그의 질녀가 어떻게 결혼할 나이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친척 관계에 대한 명칭이 구체적이고 그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의 언어 습관과, cousin,    uncle, aunt 등으로 사촌, 육촌 뻘인지 아니면 삼촌 오촌 뻘인지만 나타내는 구미 언어 습관의 차이를 번역할 때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오류에 따라 생긴 혼란인 듯 한데, 이 책의 저자는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자처하면서도 기본적인 사실에서 오류를 보이고 있다.


3)또 고흐가 귀를 자른 것도 그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데, 이 부분의 기술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쪽 귀를 거의 완전하게 도려낸 것이었다(p187)’라고 적고 있으나, 여러 책에서는 귓불 부분만을 자른 것으로 적고 있다(Walther와 Metzer 책의 연대기에는 ‘일시적인 정신 착란 상태에서 왼쪽 귓불을 잘랐다’라고 적혀 있다).


4)고흐에 관해 인구에 회자 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생전에 그림을 단 한 점밖에 팔지 못했다’라는 것인데, 이 글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해 여러 모로 착오를 보이고 있다. 첫째 그의 그림이 팔린 시점은 그가 생-레미의 정신 병원에 있던 시절 인데, 저자는 오베르-쉬르-우아즈에 도착한 뒤로 적고 있으며(p209), 그 팔린 그림도 친우인 Eugene Boch의 여동생이자 화가인 Anne Boch가 구입한 ‘붉은 포도밭’인데, ‘해바라기’(p228)라고 잘못 적고 있다.


5)고흐의 생전에 그에 대해 주목한 미술 평론가로는 Joseph Jacob Issacson과 알베르 오리에가 있는데, 저자는 이것도 다음과 같이 잘못 적고 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센트를 극도로 찬양하는 글이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다. 그것은 빈센트 생전에 그에 대해 쓰여진 유일한 글이기도 했다. (p202)


이상이 이 책에서 내가 찾아낸 큼지막한 오류들이다. 이런 부분들은 전문적인 연구라든지,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좀 제대로 된 연대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이므로, 이 글의 저자는 공언과는 달리 이러한 평전 저작에 있어서 기초란 할 수 있는 전기적 사실의 수집, 비교 분석을 소홀히 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밖에도 이 책은 편집 면에서도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잔은 이 책 안에서 앞에서는 세잔, 뒤에 가서는 세잔느로 다르게 기술되고 있으며, ‘랑글르와 다리’는 랑글르와, 랭그레로 각각 다르게 적혀 있다. 맞든 틀리든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런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이 부분은 저자의 몫이라기보다는 편집자의 몫인데, 책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야 할 것이다.


저자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고 객관적으로 고흐의 일대기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 만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생기는 경우에는, 고흐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결말은 설득력을 지니기가 힘들다. 저자는 ‘그가 목숨을 끊을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글로서 고흐의 자살을 부인하려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의 자살을 부인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좀 더 근거를 많이 제시해야 했으리라.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볼 때 저자의 의도는 객관적이었는지 몰라도, 저자의 주장과 일방적인 시각이 책 전체에 퍼져 있으며, 고흐 예술의 본질이랄까, 그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가지는 의의 등에 대해서는 전혀 설득력 있게 전개시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시각이 두드러지며, 그 아마추어적인 시각으로 전문가의 시각을 비난하는 곳도 종종 눈에 띈다. 의도는 좋았으나 역량과 연구가 뒷받침 되지 않은 미숙한 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