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인명 및 지명의 한글 표기는 명확하지 않음. 원어로 그대로 둔 것도 있음.
1853년
전해 같은 날 같은 이름으로 사산한 아들의 출생을 뒤이어, 3월 30일 빈센트 Willem 반 고흐는 태어났다. 그는 테오도루스(Theodorus) 반 고흐(1822--1885)와 아내 안나 코르넬리아(처녀명 카르벤투스, 1819--1907)와의 사이에서 난 여섯 아이 중 맏이였다. 네덜란드 신교 지역의 목사인 테오도루스와 헤이그 왕실 제본사의 딸인 코르넬리아는 1851년에 결혼했다. 빈센트는 북 브라반트(네덜란드)에 있는 브레다(Breda)로부터 약 50마일 떨어진 Groot-Zundert(흐롯-춘데르트?)의 목사관에서 태어났다.
1857년
5월 1일 빈센트의 동생 테오도루스(테오)가 태어났다. 이 두 형제는 일생 동안 대단히 가까웠으며, 진정한 형제애로 위기를 헤쳐 나가 시련의 시기를 이겨내었다.
1861년--1864년
빈센트는 1861년 1월부터 1864년 9월까지 춘데르트 마을 학교를 다닌다.
1864년
10월 1일 빈센트는 체벤베르겐(Zevenbergen)에 있는 얀 프로빌리(Jan Provily) 사립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1866년 8월 31일까지 다닌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배우고, 처음으로 드로잉에 손을 댄다.
1866년--1868년
1866년 9월부터 1868년 3월까지 빈센트는 틸부르크(Tilburg)에 위치한 빌헬름 2세 국립 기숙학교에서 수업을 받는다.
1868년
빈센트의 학교 교육은 1868년 3월에 끝나고, 그는 흐롯-춘데르트의 집으로 돌아와 1869년 7월까지 머무른다. 이러한 정황이 경제적인 이유인지 학생으로서 빈센트의 성취도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인지는 확실치 않다.
1869년
8월 1일 빈센트는 삼촌 빈센트가 헤이그에 설립한 파리의 미술상 “구필과 시에”의 지부 견습사원이 된다. 삼촌 덕분에 빈센트는(그리고 그 다음에는 동생 테오가 브뤼셀 지부에서) 다양한 미술 작품과 개별 미술가들을 알게 된다. H. G. 테르스테그(Tersteeg)의 감독아래, 빈센트는 그림과 사진, 동판화, 석판화, 에칭, 복제품 판매를 보조한다. 이 작품들은 주로 프랑스 바르비종(Barbizon) 화파와 네덜란드의 헤이그 화파의 것이었다. 빈센트는 독서를 상당히 많이 하고, 헤이그의 미술관들을 관람한다.
1871년
아버지가 브라반트에 있는 Helvoirt로 교구를 옮기게 되어 1월말에 전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를 간다.
1872년
빈센트는 Helvoirt에서 가족과 휴가를 보낸다. 그는 테오를 자주 보고, 테오는 8월에 헤이그로 그를 방문하러 온다. 그들의 일생 동안의 서신 왕래가 시작된다. 이 서신 왕래는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현재 우리가 빈센트의 미학과 다른 감정 및 믿음을 찾아볼 수 있는 주된 원천이다.
1873년
1월: 삼촌 빈센트가 테오를 “구필과 시에” 브뤼셀 지점에 취직시켜, 테오는 거기서 미술업을 배운다.
5월: 빈센트는 “구필과 시에” 런던 지점으로 전임된다. 먼저 그는 부모님을 찾아뵙고, 파리에서 며칠을 보낸다. 루브르와 다른 미술관, 갤러리들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6월: 빈센트는 런던에서 일을 시작하여 1874년 10월까지 근무한다. 그는 어설러 로이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녀의 딸인 유지니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이미 비밀 약혼을 한 상태였으므로, 그의 구혼은 강한 거부만을 불러왔다. 빈세트는 극단적으로 우울한 상태에 빠진다.
11월: 테오는 “구필과 시에” 헤이그 지점으로 전임된다.
1874년
여름: 빈센트는 Helvoirt에서 부모님과 몇 주간의 휴가를 보낸다. 테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기소침함을 해명하기 위해서 유지니와의 관계에서 겪었던 실망감을 부모님에게 말한다. 칠월 중순에 그는 여동생 안나와 런던으로 돌아와 새로 방을 얻는다. 그는 고독하게 살면서 자신의 일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고 대신에 독서에 빠진다. 주로 종교적인 글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성경을 네덜란드 어에서 다른 나라 말들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10월--12월: 삼촌이 빈센트를 “구필과 시에” 본점으로 전임시켜 런던에서의 아픈 기억을 털어 내고 또 장소의 변화가 조카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 계획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 빈센트는 연말에 런던으로 돌아간다.
1875년
5월: 빈센트는 영구적으로 “구필과 시에” 본점으로 전임된다. 하지만 그는 일을 게을리 하고 동료나 고객에게 똑같이 인기가 없었다. 성경 공부가 강박증이 된다. 그는 박물관과 갤러리를 찾고, 특히 카미유 코로(1796--1875)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에 열을 올린다.
10월: 빈센트의 아버지가 브레다 부근 에텐 교구로 옮겨간다.
12월: 빈센트는 파리 “구필과 시에”의 상사들로부터 허락도 받지 않고 에텐에서 부모님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1876년
4월: “구필과 시에”가 “부소와 발라동”의 손에 넘어간다. 빈센트는 부소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4월 1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화랑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해고당하기를 바란다. 실제로 회사 이익에 피해를 끼칠 정도로 행동한다. 그는 영국의 람스게이트로 여행한다. 거기서 윌리엄 포트 스톡스가 운영하는 조그만 사립학교에 자리를 얻는다. 빈센트는 프랑스어와 독어, 산수를 가르치는 보조 교사였다. 봉급은 따로 없고 숙식만 제공 받는다.
7월--12월: 스톡스 목사의 학교가 런던에서 보다 가까운 곳으로 옮겨가, 빈센트도 도시 교외 노동자 거주 지구인 아일워스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한다. 그는 허트포드셔 웰윈의 여자 기숙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여동생 안나를 방문한다. 빈센트는 T. 슬레이드 존스 목사 밑에서 교사와 목사로서의 새로운 직무를 하게 된다. 감리교 목사인 그도 빈센트에게 박봉만 지급한다. 빈센트는 11월에 첫 번째 설교를 하고는 매우 흥분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일생을 빈자들을 위한 복음 일에 헌신할 것을 제안한다. 빈센트는 미술에도 흥미를 가져, 햄턴 코트 팔리스를 여러 번 방문하고 홀바인과 렘브란트, 이탈리아 르네상스, 네덜란드 17세기 미술 등을 감상한다. 크리스마스를 부모님과 에텐에서 보내는데, 부모님은 그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에 크게 놀라 런던으로 돌아가지 말 것을 종용한다.
1877년
1월--4월
그의 이름을 가진 삼촌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빈센트는 도르드레히트의 서점, “Blusse & 반 브람”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곡물상을 하는 Rijkens 집에 하숙을 한다. 이 하숙집에 있던 P. C. 괼리츠라는 젊은 선생이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빈센트는 쓸쓸한 삶을 지속하면서도 교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때로는 다른 교파에 참석하기도 한다. 성경을 계속해서 번역하고, 박물관과 갤러리를 찾고, 때때로 드로잉도 한다.
5월: 친구인 괼리츠의 도움으로, 빈센트는 자신이 종교적 사명을 타고 났다고 아버지를 설득하고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신학부 입학시험을 준비한다. 당시 해군 공창의 감독관으로 홀아비였던 삼촌 요하네스(또는 얀, 1817--1855)와 함께 보낸다. 어머니의 여동생 카트리나 제라르디나 카르벤투스와 결혼한 이모부 J. P. 스트리커 목사가 멘데스 다 코스타 박사를 주선하여 그에게서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배우고, 또 박사의 조카에게서 수학을 배운다. 빈센트는 독서를 많이 하고 미술관을 찾는다. 특히 Trippenhuis(나중에 Rijksmeseum으로 바뀜)를 자주 찾는다. 또한 드로잉도 많이 한다. 하지만 막상 공부는 어려웠다. 그는 한 동안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에 즐거움을 찾지만, 그것이 자신의 복음 사명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포기한다.
1878년
7월: 빈센트는 에텐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그리고 당시 방문중이던 아일워스 시절의 존스 목사와 함께 브뤼셀로 가 3개월 과정의 평전도사 수업을 받는다.
8월--10월: 빈센트는 Laeken(브뤼셀 근교) 복음 대학에서 수습 과정을 밟으며 이 기간에 드로잉을 재개한다. 하지만 최종 시험 결과 그는 평전도사 직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나, 에텐으로 돌아간다.
12월: 종교적 사명감을 충족시키는 다른 길을 모색하다가, 빈센트는 벨기에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쥬(몽스와 프랑스 국경 사이에 위치)로 간다. 이 산업 지역의 근로 및 주거 환경은 아주 열악했다. 빈센트는 자신도 가난 속에서 살며 병자들을 방문하고 광부들에게 성경을 읽어 준다.
1879년
1월--7월: 브뤼셀의 복음 대학은 빈센트에게 평전도사로 보리나쥬의 바스메스에서 6개월 동안 일하도록 한다. 그는 광부들의 끔찍한 생활에 동참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헛간에서 살며 짚북데기만 깔고 잔다. 그들을 위해 열심히 헌신한다. 탄갱에서의 폭발사고 후, 또 파업 동안에 병자와 부상자를 돌본다. 교회의 상급자들은 그가 사회적 헌신에 너무 광적으로 열중하는 것이 거슬려서, 그에게 설교 능력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위임을 취소한다.
8월: 빈센트는 브뤼셀까지 도보로 걸어가 복음 대학의 피에터센에게 충고를 구한다. 그는 자신이 스케치한 광부들의 모습을 피에터센(그 역시도 아마추어 미술가였다)에게 보여준다. 빈센트는 광산 지역인 퀴에메스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아무런 보수도 없이 1880년 7월까지 지속한다. 그 자신도 가난 속에 살고 있었지만, 그는 곤궁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성심성의를 다한다. 독서도 하고(찰스 디킨스,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등을 읽음) 광부들을 그리기도 한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다. 이 시기는 빈센트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로, 이후의 삶을 좌우하는 그런 시기였다. 테오가 그의 이러한 선택에 반대해 한 동안 그는 동생과의 서신 왕래마저도 중단한다.
1880년
이 해 초에 돈도 먹을 것도 없이 빈센트는 프랑스의 쿠리에까지 70킬로미터를 걸어간다. 그가 존경하는 화가 쥘 브르통(1827--1906)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브르통의 집을 보기만 하고 감히 들어가지는 못한다. 가난에 찌든 베짜는 마을도 본다.
7월: 빈센트는 당시 “구필과 시에” 파리 본점에서 근무하고 있던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테오는 자신의 봉급에서 일정액을 빈센트에게 보내기 시작하는데, 죽을 때까지 이것이 빈센트의 생계비였다. 빈센트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고통스런 불확실성을 묘사한다.
8월--9월: 빈센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광산촌의 생활상을 그리는 데 전력을 다한다. 테오도 형에게 용기를 주고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복제화를 보내준다. 빈센트는 이것을 모사한다.
10월: 빈센트는 브뤼셀로 가,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새로운 경력에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해부학과 원근법 드로잉을 배운다. 그는 밀레와 오노레 도미에(1808--1892)의 작품에 경탄한다. 11월에 그는 네덜란드 화가인 G. A. 리더 반 라파드(1858--1892)를 만나 친구 사이가 되어 빈센트는 한 동안 라파드의 화실에서 작업한다. 빈센트는 1881년 4월까지 브뤼셀에 머문다.
1881년
4월: 빈센트는 테오를 보러 에텐으로 가서 두 사람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장래를 의논한다. 그는 에텐에 머물면서 주로 풍경을 그리면서 그 밖의 물상에도 손을 댄다. 라파드가 그와 2주를 보낸다. 두 사람은 미술을 토론하면서 오랫동안 산보를 하곤 한다.
여름: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이종사촌 코넬리아 아드리아나 보스-스트리커(케이로 알려짐, 암스테르담의 스트리커 목사의 딸)이 그녀의 아들 얀과 함께 에텐 목사관에 머문다. 그녀와 얀은 빈센트가 드로잉을 하러 나갈 때 동반하곤 한다. 빈센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직 남편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그의 구애를 거절하고 계획보다 빨리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다. 빈센트는 헤이그로 가, 많은 젊은 미술가들에게 도움을 주고 헤이그 화파의 진정한 창시자로 평가되는 테르스테흐에게 자신의 미술 이력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또 그가 경탄해 마지않는 화가인 안톤 마우베(1838--1888)를 방문한다. 마우베는 그에게 수채화 물감 한 상자를 주면서 채색화를 해볼 것을 권고한다.
가을: 빈센트는 케이에게 구혼하기 위해서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빈센트는 그녀의 부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촛불에다 손을 댄다. 다행히도 그는 왼손을 갖다 대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오른 손은 다치지 않았다.
11월--12월: 빈센트는 헤이그의 마우베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린다. 여전히 그의 마음은 케이에 사로잡혀 있고 종교적 입장도 극단적이라 부모님과의 관계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사랑과 아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종교적으로는 정통파이고, 거기다 보수적이며 고집 센 아버지와 격렬한 다툼을 벌인다. 이런 종류의 다툼은 이미 빈센트에게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불러왔다. 이번에 그는 아버지가 주는 돈마저 거부하고 연말에 암울한 기분으로 부모님의 집을 떠난다.
1882년
1월: 빈센트는 헤이그로 이주 해 마우베 집 근처에 산다. 마우베는 그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돈도 빌려 준다. 테오는 계속해서 매달치 생활비를 보내주는데, 테르스테흐는 이에 반대한다. 마우베와의 관계가 소원해진다, 부분적으로는 빈센트가 석고 모델을 보고 작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창녀에다, 임신까지 한 클라시나 마리아 후닉 Clasina Maria Hoornik(시엥으로 알려짐)을 만난다. 한 동안 그들은 함께 살고 시엥은 때로 그의 모델 역할을 해준다. 그 동안에 그는 그녀의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돌본다.
3월: 비록 마우베를 향한 찬사의 마음은 줄지 않았지만 빈센트는 그와의 관계를 끊는다. 다른 화가들과의 관계도 이 시점에 위기에 처한다. 유일하게 그의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한 화가는 얀 헨드릭 바이센브루흐(1824--1903) 뿐이었다. 빈센트는 ‘자연’에서 소재를 따와 상당히 많은 드로잉을 한다. 때로는 게오르그 헨드릭 브라이트너가 동참하기도 한다.
6월: 빈센트는 헤이그의 한 병원에서 3주 동안 임질 치료를 받는다. 아버지와 테르스테흐가 그를 방문한다. 그는 시엥과 결혼을 원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반대를 한다. 그녀를 라이덴으로 데려가 출산하도록 하고, 4명의 가족이 살 집을 구한다.
여름: 빈센트는 마우베를 다시 만난다. 2년 동안 드로잉과 수채화를 한 후, 유화의 매력을 발견하고 색채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씨앗”이라고 여기는 예비적 습작에 몰두하며, 이것이 완성된 그림, 즉 “수확”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테오는 생계비뿐만 아니라 그림 도구 비용도 지불한다. 처음에 빈센트는 주로 풍경을 그린다. 그는 마우베,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밀레, 또 요제프 이스라엘(1824--1911), 아돌프 몽티셀리(1824--1866), 피에르 퓌비 드 샤반(1824--1898)의 두드러진 영향아래 발전해간다. 빈센트의 아버지가 누에넨의 교구를 받아들여 가족이 거기로 이사 간다.
가을: 이 해 나머지 기간 동안(그리고 1883년 6월까지) 빈센트는 헤이그에 머물면서 자연의 풍경을 드로잉하고 그린다. 겨울 동안 스케치와 보통 사람의 초상화를 한다. 그의 모델은 양로원의 사람들과 시엥, 새로 태어난 아이였다. 또 그는 석판화에 관심을 갖는다. 화가 H. J. 반 데 벨레(1852--1930)를 만나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봄에 슈베닝겐의 사구(砂丘)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는 계속해서 탐욕스럽게 책을 읽는다. 그의 독서에는 “하퍼스 위클리”와 “그래픽”같은 정기간행물도 포함되어 있다.
1883년
9월--11월: 테오와의 대화와 서신 왕래를 통해 빈센트는 가정생활과 미술가로서의 앞으로의 발전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는 1년 이상 함께 지낸 시엥과 헤어지기로 고통스런 결단을 내린다. 다시 한 번 외톨이가 된 그는 북 홀란드의 드렌테 지방으로 가 처음에는 호게벤의 습지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너벅선을 타고 Nieuw 암스테르담으로 가서는 오랜 도보 여행을 한다. 막스 리베만(1847--1935)과, 빈센트의 친우들 마우베, 라파드, 벨레처럼 그도 이 어두운 토탄빛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빈센트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 지방 농부들을 그린다. 리베만이 1870년대 초의 여름을 대부분을 보낸 쯔벨로 마을을 방문하여 그곳의 오래된 교회를 그린다. 그는 또 석판화에도 손을 댄다.
12월: 빈센트는 고독을 오래 견딜 수가 없어서 당시 부모님이 있던 누에넨으로 온다. 누에넨은 카톨릭 신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1885년 11월까지 머무른다. 이곳에 머무르는 2년 동안 그는 거의 2백여점의 그림과, 수다한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표현력이 넘치며 주로 어두운 색과 흙색을 사용한 것이었다. 빈센트는 졸라와 들라크루아의 미학서, 그리고 또 다른 프랑스 화가인 유젠 프로망탱(1820--1876)을 읽는다. 그는 색채와 음악--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피아노와 노래 수업을 받는다. 부모님은 그의 너저분한 옷차림새와 비상식적인 행동을 눈감아 줌으로써 그를 도우려 애쓴다. 방해받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목사관 바깥채에 화실을 만든다. 한동안 그는 또 영국 등지에서의 일러스트레이터 직업을 구해볼까 하는 고민도 한다.
1884년
1월: 빈센트의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게 되어 장기간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빈센트는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돌보고, 어머니를 위해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개신교 교회 드로잉을 한다.
5월: 빈센트는 카톨릭 예배당지기의 집에 방을 두 개 세 내 거기다 화실을 꾸민다. 친우 라파드가 와 이틀 동안 지낸다.
8월: 이웃의 딸인 마곳 베게만이 빈센트가 야외로 그림 그리로 나갈 때 동행한다. 계속해서 그를 따르다가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털어 놓고, 약간의 주저 끝에 빈센트도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 거의 십 년이나 되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양가 부모들은 강력하게 반대한다. 빈센트의 부모는 그가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갈지를 추궁하고, 마곳 베게만의 어머니는 그녀의 다른 네 딸이 버려질까 두려워한다. 마곳이 음독자살을 시도해 빈세트를 우울케 한다.
8월--9월: 빈센트는 아인드호벤 금세공사인 찰스 헤르만스 집 식당에 걸 여섯 장의 장식용 그림을 디자인한다.
10월: 라파드가 누에넨을 재차 방문해 10일간 머문다.
10월--11월: 빈센트는 아인트호벤에서 온 아마추어 화가들에게 그림 수업을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제혁업자인 안톤 C. 케세마케스(1846--1926)로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은 산보도 하고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한다.
12월: 여태까지, 풍경과 일에 몰두하고 있는 농부, 베짜는 사람 등이 그의 작품의 주종이었다. 이제 그는 모델 초상화에 손을 대고, 겨울 동안에 50점의 흉상 습작을 계획한다.
1885년
빈센트의 아버지 테오도루스가 3월 26일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최근의 두 사람 사이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심한 충격을 받는다. 여동생 안나와의 다툼 후에 샤프라스 예배당지기의 집에 있는 자신의 화실로 거처를 옮긴다. 처음으로 그의 작품 중 몇 점이 파리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4월--5월: 비좁고 불빛도 제대로 비치지 않는 곳에서 농부와 집 내부의 수다한 습작을 거친 끝에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다. 이 작품이 그의 네덜란드 시기의 주요 작품이다. 그는 앞서 제작한 그림을 석판화로 떠 라파드에게 보낸다. 라파트가 이 작품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빈센트는 너무나 화가 나서 두 사람의 우정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5년 이상이나 지속된 두 사람의 서신 왕래도 점차로 막을 내린다.
8월: 헤이그의 화상 Leurs가 처음으로 진열창 두 곳에다 빈센트의 작품을 전시한다.
9월: 누에넨의 카톨릭 사제가 마을 사람들이 빈센트의 모델이 되는 것을 금한다. 그가 최근에 그린 농가의 젊은 처녀가 임신한 것이 그의 탓이라는 비난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빈센트는 감자와, 동(銅) 주전자, 새둥지 등을 소재로 주로 정물화에 몰두한다.
10월: 친우 케세마케스와 함께 빈센트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3일 동안을 레익스 미술관 Rijksmuseum에 헌신한다. 그는 특히 모국 화가인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다.
11월: 빈센트는 색채론, 에드몽(1822--1896)과 쥘 드 공쿠르(1830--1870)의 글을 탐독한다. 월말에 그는 안트베르펜(앤트워프)으로 이사해 1886년 2월까지 화방 위의 방을 세낸다. 그는 다른 미술가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며 자신의 그림을 팔려고 애쓴다. 미술관에서 특히 페터 폴 루벤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그 결과로 좀 더 강렬하고, 밝은 색채를 사용하려 애쓴다. 더 이상 양홍색과 군청색을 피하지 않고 에메랄드 빛 초록에도 가치를 두기 시작한다. 그는 안트베르펜 성당과 시장, 그리고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단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다. 선창을 거닐다가 일본 목판화를 몇 점 발견하고는 자기 방에다 걸어 둔다. 이 목판화들은 나중에 자신의 예술에 주제들을 제공해 준다.
1886년
1월: 빈센트는 미술 학교(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여 회화와 드로잉 수업을 받는다. 그렇지만, 수업의 기초가 되는 아카데믹한 원칙들을 거부하여 그 결과로 불화가 따른다. 그럼에도 고급 단계 승급 시험을 본다. 안트베르펜의 오래된 교회인 성 앤드루스의 특히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에 매료된다.
2월: 과로, 영양 부족, 지나친 흡연 등으로 빈센트는 이달 내내 몸져눕는다. 2월말 그는 파리로 옮겨 코르몽(1845--1924)에게 사사받기로 결심한다.
3월: 테오에게 알리지 않고, 그는 이달 초에 파리에 도착해서는 루브르에서 동생을 만나기로 한다. 테오는 “부소와 발라동” 소속으로 몽마르트르 가에 있는 조그마한 갤러리를 운영 중이었다. 그는 빈센트에게 자신의 방 하나를 내주지만 형의 괴팍한 성격과 경제적 압박감이 나중에 문제로 발전한다. 그 와중에 안트베르펜 아카데미에서는 빈센트의 작품을 낙방시키고 그를 초보 단계로 떨어뜨린다. 빈센트를 침울하게 만든 일격이었다.
4월--5월: 빈센트는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면서 동료 미술가, 존 러셀(1858--1931),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 에밀 베르나르(1868--1941)를 만난다. 그와 베르나르는 첫 만남의 기념물로 나중에 서로의 그림을 주고받는다. 테오는 빈센트에게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리,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폴 시냐크, 게오르게 쇠라 등 인상파 화가들과 작품을 소개한다. 이들의 영향으로 빈센트는 자신의 정물화와 꽃 그림에 보다 밝고 활기찬 색조를 사용한다. 피사로(1831--1903)와, 그의 아들 뤼시엥(1863--1944)과 가깝게 지낸다.
5월: 어머니와 동생 윌이 누에넨에서 브레다로 이사를 간다. 빈센트가 남긴 대략 70여점의 작품이 고물상에게 팔린다. 몇 점은 노래 한 곡에 넘어가기도 하고 아예 태워버린 것도 있다.
6월: 빈센트와 테오는 몽마르트르 르피크 가 54번지로 이주하여 빈센트는 거기에 화실을 꾸민다. 파리 정경을 점묘화법으로 그리는데, 몇몇 작품은 집 유리창 밖으로 내다 본 풍경(p222)이다. 쥘리엥 ‘페어’ 탕기의 화방을 자주 드나든다. 탕기(1825--1894)는 그에게 다른 미술가들을 소개시켜 준다.
겨울: 빈센트와 폴 고갱(1848--1903)이 친구가 된다. 고갱은 브리타니의 퐁-아벤에서 파리로 나왔다. 빈센트의 복잡한 성격으로 그와 테오 사이에 위기가 온다. 신경 쇠약이 있던 테오는 여동생 윌에게 함께 사는 생활이 “거의 견딜 수 없다”라고 쓴다. 나중에 두 형제의 관계는 좋아진다.
1887년
봄: 탕기가 초상화 두 점을 의뢰한다. 빈센트는 베르나르와 함께 아시니에르의 세느 강 둑에서 야외 작업을 한다. 베르나르, 고갱과의 열띤 토론 중에 빈센트는 인상파가 회화 진보의 정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그는 유명한 자화상(p2)을 그리고, 겔러리 벵에서 일본 채색 목판화를 몇 점 산 뒤, 자신이 직접 일본화(p284)를 세 점 그린다. 클리시 가에 있는 카페 탱부랭을 자주 찾는다. 카페 여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와 잠시 동안 연애를 즐긴다. 그녀는 코로와 드가의 모델이었으며, 빈센트도 이 때 그녀의 초상화(p206)를 그린다. 그와 베르나르, 고갱, 툴루즈-로트레크가 이 카페에서 전시회를 갖고, 빈센트는 벽을 일본 목판화로 장식한다. 이들은 자신들을 테오의 갤러리에 전시된 그랑 불레바르(Grand Boulevard: 대로) 화가들(모네, 시슬리, 피사로, 드가, 쇠라)와 구별하기위해, 프티 불레바르(Petit Boulevard: 소로) 화가들이라고 명명한다.
여름: 빈센트는 수다한 그림을 점묘화법으로 그린다. 이 중에는 레스토랑 내부(p238)도 포함되어 있다.
11월--12월: 빈센트는 점묘화파의 시초인 쇠라를 만난다. 앙드레 앙투안(1858--1943)의 초청으로 새로 건립한 테아트르 리브르의 리허설 실에서 쇠라, 시냐크와 전시를 한다.
1888년
2월: 테오와 함께 빈센트는 쇠라의 화실을 방문한다. 그리고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간다. 파리에 체류한 2년 동안 그는 2백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아를 행에는 아마도 툴루즈-로트레크의 고무가 큰 작용을 한 듯하다. 처음에 그는 카렐 호텔에 방을 얻는다. 밝은 남국의 빛과 색채의 따뜻함에 도취된다. 하지만 도착 당시 아를은 날씨가 매섭고 눈이 남아있어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p309--11).
3월: 빈센트의 꿈은 경제적 걱정을 끝낼 수 있는 미술가 공동체였다. 두 달 동안 덴마크 화가 크리스티안 무리에-페터슨(1858--1945, 나중에 그는 얼마 동안 파리에서 테오와 함께 지낸다)이 그의 유일한 동료였다. 빈센트는 일본 풍경을 상기시키는 활짝 핀 꽃과 나무 그림을 다수 그린다. 예비적인 습작품 용으로 그는 종종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독일 대가들이 한 때 이용했던 원근법의 일종을 이용한다. 마우베의 부음을 듣고, 자신의 ‘활짝 핀 분홍 복숭아 나무’(p318)에 ‘마우베를 추도하며’라는 말을 명기한다. 빈센트 작품 세 점이 파리의 독립화가전(the Salon des Artistes Independants)에 전시된다.
4월: 아를 경기장에서 투우 시즌이 시작되어 빈센트는 군중들의 색채에서 현란함을 느낀다. 네덜란드와의 고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몽마르트르 정경 몇 점을 헤이그에 있는 “모던 뮤지엄”에 헌정한다. 나무들이 만개한 동안에 지칠 줄 모르고 살구, 오얏, 벚나무 과수원에서 작업을 한다. 간헐적으로 유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잉크화를 그리기도 한다. 러셀의 친구이기도 한 미국인 화가 도지 맥나이트(1860--1950)가 근처 퐁비에이유 마을에서 찾아온다. 빈세트는 복통과 치통으로 일 주일간 휴식을 취한다.
5월: 빈세트는 플라스 라마르틴의 “노란 집” 오른 편을 세낸다. 방이 네 개로 한 달에 15프랑이었다. 거기서 그는 미술가 공동체라는 자신의 꿈을 고갱이나 맥나이트 등과 실현하기를 기대한다. 침대를 구입하고 가구점에 할부로 지불하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숙박료와 관련해 카렐 호텔에서 불협화음이 일어나자 빈센트는 요세프와 마리에 지누가 운영하는 역 카페로 옮겨간다. 그들은 친구가 되고 “노란 집”이 준비가 끝날 때까지 거기서 머문다. 이 주 이상의 휴식을 마치고 그는 계속해서 풍경화를 그려 나가는데, 그 중에는 유명한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p343)"의 두 번째 그림이 있다. 몇 번에 걸쳐 그는 근처 몽마주르 수도원 유적의 유화와 잉크 드로잉 크레이트(상자)를 기차로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 보낸다.
6월: 빈센트는 생트-마리에-드-라-메르로 여행한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지중해 여행이었다. 머무는 동안 그리고 돌아와서 해변에 놓인 배(p352)들을 그린다. 빈센트는 주아브 소위인 폴-외젠 밀리에를 만난다. 밀리에는 드로잉 교습을 받으며, 빈센트와 산책을 하기도 하고, 그의 모델(p426)도 되어 준다.
맥나이트는 빈센트에게 벨기에 작가이자 화가인 유젠 보크(1855--1941)를 소개시켜 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자신의 “일련의 그림”을 설명하는 글을 쓴다. 흰색과 분홍색의 과수원, 노란 밀밭(‘프로방스의 추수’, ‘씨 뿌리는 사람’), 푸른색의 바다 정경, 포도 넝굴밭과 가을 정경, 이 모두를 합치면 전체 색채에 걸치는 것이었다. 비와 추위가 들판 햇빛 속에서의 그의 고된 작업을 방해한다. 빈센트는 고갱이 마침내 아를로 그와 합류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7월: 빈센트는 몽마주르 유적지로 여행하여 풍경화와 잉크 드로잉을 상당수 그린다. 그와 보크(간헐적으로 근처 퐁비에이유에 살던)는 서로 방문하곤 한다. 피에르 로티(1850--1923)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고 일본의 예술과 문화를 연구, 이러한 일련의 결과로 “앉아 있는 소녀 La Mousme, Sitting(p389)”를 제작한다. 7월 28일, 그의 이름을 가진 삼촌, 1869년에서 1876년까지 헤이그와 런던, 파리의 “구필과 시에” 상회에 빈센트를 취직시켜 주었던 화상(畵商)이 브레다 근처 프린센하게에서 죽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진 상태였으며, 빈센트 삼촌은 테오에게 정이 더 가 그에게 얼마간의 유산을 남긴다.
8월: 빈센트는 큰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소크라테스와 흡사한 우편배달부 요세프 룰랭과 친교를 맺고, 그의 초상화를 몇 점 그린다(p392, 468, 488). 또 카마르귀 출신의 농부 파시엥스 에스칼리에(p402)도 그리고 대형 드로잉 작업에도 착수한다. 주아브 군인 밀리에를 통해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36점의 그림을 보낸다. 그는 이제 화실을 장식할 일련의 해바라기를 그리고, 꽃의 타오르는 노란색과 고딕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의 효과를 비교한다. 론 강 둑에서 배로부터 모래를 하역하는 작업을 관찰하고 그 정경을 드로잉하고 유화로 그린다(p412).
9월: 빈센트는 자주 밤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사람들에 따르면 낮에 잠을 자고, 화판과 모자 테두리에 초를 고정시키고 그렸다고 한다. “아를 플라스 라마르틴의 밤 카페(p428--29)"는 이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의 비정상적인 색채 배치는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보크가 다시 방문하고, 빈센트는 그를 향한 애정과 찬사를 초상화에 담는다. 모델이 부족한 탓에 그는 또 다른 자화상(p396)을 그리고, 고갱에게 헌사한다. 물감이 다 떨어지면 드로잉을 했다. “노란 집(p423)”으로 이주한다. 그는 침대 두 개, 탁자 하나, 의자 몇 개, 그 밖의 약간의 집안 필수품을 장만한다.
10월: 빈센트는 보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와 주아브 군인 밀리에의 초상화를 자신의 침실에 걸어두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푸른 포도밭(p415)"과 그 밖의 다양한 가을 정원 정경으로 방들을 장식한다. 시간을 끈 교신과 부분적으로는 병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 주저 뒤에, 고갱은 빈센트의 반복된 요청에 따라 브리타니의 퐁-아벤을 떠나 10월 23일 아를에 도착한다. 빈센트는 두 사람이 서로 예술적인 자극과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고갱과 함께 살기를 고대해 왔다. 고갱은 자신의 “네 명의 브레통 여인” 판매 대금으로 테오로부터 500프랑을 받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빈센트는 고갱이 한 때 선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란다. 이 사실은 고갱을 더욱 존경하고 믿게 만든다.
11월: 빈센트와 고갱은 공동으로 요리하고 먹고 그림을 그린다. 종종(특히 날씨가 나쁠 때면) 두 사람은 기억으로부터 그렸다. 저녁 산보 후에 빈센트는 “붉은 포도밭(p450)”을, 고갱은 “포도밭의 여인들”을 그린다. 마담 지누가 “라를레지엔느(p454)"의 모델이 된다. 파리의 “부소와 발라동” 상회에서 테오는 고갱의 작품을 좋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데 성공한다. 빈센트는 이러한 고무적인 일에 고갱의 기쁨을 나눈다. 드가는 테오가 파리에서 전시한 고갱의 브리타니 그림들을 칭찬한다.
12월: 빈센트는 고갱과 함께 몽펠리에의 뮤제 파브르를 방문한다. 두 사람은 들라크우아와 구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작품을 다수 보는데, 그 중 쿠르베의 “안녕하시오, 쿠르베 씨! Bonjour, Monsieur Courbet!”는 이후의 고갱의 그림에 영감을 준다. 빈센트는 두 사람의 차후의 토론을 “과도한 긴장”이라고 묘사한다. 두 사람은 태양 아래서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유일한 예외는 예술이었다. 대립되는 견해는 변함없이 다툼으로 이어진다. 단지 이 개월 동안에 이 불일치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심각한 쇠퇴를 불러온다. 고갱에 따르면, 12월 23일, 빈센트는 면도날을 들고 그를 뒤따랐다. 고갱은 서둘러 집을 떠나고 호텔에서 밤을 보낸다. 밤 동안에 빈센트는 순간적인 정신이상의 발작으로 자신의 왼쪽 귓불을 자른다. 그는 그것을 신문에 싸서 근처 사창가의 창녀인 라셀에게 선물한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은 다친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병원으로 데려간다. 펠릭스 레이(1867--1932) 의사가 그를 돌본다. 고갱은 아를을 떠나고 테오에게 형의 상태를 알린다. 테오는 즉시 아를로 와서 개신교의 살레 목사에게 빈센트를 돌봐줄 것을 요청한다. 마담 지누도 병원으로 빈센트를 방문한다. 간질, 알코올 중독, 정신분열증 등이 빈센트의 발작의 원인으로 추측되었다. 며칠 동안 그는 아주 심각한 상태였으나 회복하기 시작한다.
1889년
1월: 병원에서 편지를 쓴다. 테오에게는 자신이 좋아졌다고 알리고 고갱에게는 따뜻한 인사를 보낸다. 1월 7일 “노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누이 윌에게 안심시키는 편지를 쓰지만 이 당시에도 그는 여전히 불면증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테오는 친구인 Andries 봉거 Bonger의 누이 요한나 봉거 Jo-Johanna Gesina Bonger(1862--1925)와 약혼한다. 빈센트는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을 보여주는 두 장의 자화상(p478--484)과 병원에서 자신을 돌봐준 데 대한 감사로 의사 레이의 초상화(p480)를 그린다. 자주 문병을 오던 룰랭이 안타깝게도 마르세이유로 전근 간다. 빈센트는 “자장가” La Berceuse(481--3)를 여러 번 그린다.
2월: 빈센트는 불면증과 환각, 또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려한다는 미망으로 고통을 받고, 다시 병원에 입원한다. 간헐적으로 “노란 집”에서 작업을 한다.
3월: 그들 자신을 아를의 anthropophages(식인종)이라고 칭한 아를 주민 32명이 시장에게 빈센트를 입원시키라고 청원한다. 그에게 fou roux(빨간 머리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여진다. 경찰은 그림과 함께 그의 집을 폐쇄한다. 시냐크가 Cassis로 이주하기 전에 문병 온다. 빈센트는 시냐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그림을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시냐크는 테오에게 편지를 써 빈센트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해 보인다고 알린다.
4월: 빈센트는 결국 “노란 집”의 자신의 방으로부터 나온다. 홍수가 나 집 내부와 그가 남겨둔 유화와 습작들을 망쳤던 것이다. 그는 레이 의사 소유의 두 개의 작은 방으로 이주하고 지누 가족이 역 카페에 그의 가구를 보관해 준다. 테오는 암스테르담에서 요한나 봉거와 결혼한다. 빈센트는 되풀이되는 허약함과 무기력으로 고통 받고 얼마 동안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나으리라고 느낀다.
5월: 빈센트는 테오에게 철도로 두 상자 분의 그림을 보낸다. 그는 몇 작품은 실패작이고, 또 몇 작품은 손상되어서 테오에게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몽마주르에서 그런 것처럼 잉크 드로잉을 재개한다. 다소 회복되었다고 느끼지만, 5월 8일, 빈센트는 얼마 동안 그를 돌봐주던 Salle 목사와 함께 아를에서 채 20마일 떨어지지 않은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생 폴-드-모솔 정신병 요양원에 입원한다. 테오의 지불로 방을 두 개 세낸다. 자그마한 그의 거실은 회록색 벽지와 해록색 커튼, 낡아빠진 안락의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살이 쳐진 유리창으로 빈센트는 밀밭으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볼 수 있었다. 정원이 내다보이는 두 번째 방은 작업실이다. 빈센트의 병을 간질로 진단한 의사 페이롱 Theophile Peyron(1827--1895)의 허락으로 그는 보조원 풀레 Georges Poulet의 감독 아래 옥외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빈센트는 요양원의 별로 돌보지 않은 정원의 정경을 여러 장 그리면서 두려움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수면과 식사가 좋아진다.
6월: 테오는 빈센트 아를 그림의 색채에 넘치는 생명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형이 상징주의 화가의 형태 사용을 표현하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닌가 두려워한다. 하지만 빈센트는 자신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작업은 기꺼운 일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제 요양원을 벗어나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풍경과 올리브 숲과, 밝은 노란빛 밀밭과, 삼나무를 그린다. 빈번히 그는 자신의 제재들을 유화로 그릴뿐만 아니라 드로잉도 한다. 그렇지만 한 번은 그가 마을로 들어갔었을 때 새로운 인상의 충격이 그를 무기력하고 아프게 한다.
7월: 긴 휴지 후에, 빈센트는 어머니에게 다시 한 번 편지를 쓴다. 그는 풍경과, 들판, 올리브 나무와 나무의 은회빛 잎사귀, 백리향과 다른 향그러운 식물들이 자라는 언덕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는 고향의 이끼 낀 헛간과, 누에넨의 관목과 마디풀과 너도밤나무 울타리와, 헤더와 자작나무를 그리워한다. 그는 자신의 부탁으로 테오가 보내 준 판본으로 셰익스피어를 상당히 많이 읽는다. 수(首) 보조원 Charles-Elzeard Trabuc(539)과 함께 남겨 진 그림을 찾으러 아를에 간다. 실망스럽게도 Salles 목사나 의사 레이는 만나지 못한다. 얼마 안 되어 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6주 동안 요양소에 감금된다.
8월: 빈센트는 파리의 조르쥬 프티 Georges Petit 갤러리에서 열린 모네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작품 전시회 카탈로그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발작 중에 독성 물감을 삼키려고 했기 때문에 얼마 동안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작업실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빈센트는 급박하게 일할 필요를 느낀다. 작업이 그에게는 회복의 길이었고, 강요된 게으름은 고문이었다. 8월 하순에야 그는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 받는다. 막내 남동생 코르넬리우스 Cornelius(Cor로 알려진)가 사우스햄턴 Southampton을 경유하여 트랜스발 Transvaal(남아프리카)로 여행한다.
9월: 빈센트는 독립화가 전 Salon des Independants에 “론 강의 별밤(431)”과 “붓꽃(505)”을 전시한다. 이 전시회에는 두 작품 이상 전시할 수가 없었는데, 툴루즈-로트레크, 쇠라, 시냐크 등도 작품을 전시하였다. 빈센트는 파리나 브리타니 등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옛 친구와 자신이 산 곳을 방문하기를 원하지만, 아직 자신이 그렇게 할 정도로 회복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한 동안 그는 사로잡힌 사람처럼 일한다. 그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젤 앞에 서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작업하는 것은 여전히 두려워한다. 그는 옛 작품들을 다양하게 복제하거나 새롭게 해석하여 그리고,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복제화를 보고 그리기도 한다.
10월: 피사로는 테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빈센트가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폴 가세(1828--1909)가 그를 돌봐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빈센트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풍경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요양원 정원과 Alpilles 산, 그리고 그가 특히나 어렵다고 생각한 올리브 나무와 삼나무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렸다. 또 환자의 초상화도 그린다(564). 네덜란드 화가이자 비평가인 이작손 Joseph Jacob Issacson은 De Portefeuille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 “19세기가 다시 인식하기 시작한 장엄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형태와 색채로 담아내는 자는 누구인가? 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칠흑 같은 밤의 깊이에서 혼자서 투쟁하는 외로운 개척자. 그의 이름 빈센트는 후손까지 이어지리라. 미래에는 이 영웅적인 네덜란드 인에 대해 더 많은 말이 있으리라.” 빈센트는 이 글이 과찬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으리라고 느낀다.
11월: 다시 한 번 빈센트는 “저녁(567)”, “양치는 여인(583)”, “씨 뿌리는 사람(566)”밀레 작품의 인쇄본에서 영감을 얻는다. 자신의 복제화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번역”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베르나르나 고갱과 유사해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안공의 힘차고 자발적인 스타일을 추구한다. 다시 Salles 목사와 지누 가족을 방문하면서 며칠을 아를에서 보낸다. 벨기에 미술가 단체 Les XX의 비서인 Octave Maus(1856--1919)가 브뤼셀의 전시회에 폴 세잔, 르누아르, 시냐크, 시슬레, 툴루즈-로트레크 등과 함께 빈센트의 작품도 초대한다. 빈센트는 “추수하는 사람(547)”과 자화상을 포함해 6점을 선정한다. 그는 고갱과 베르나르가 성경의 장면을 사진처럼 재생한 것을 보고는 마구 욕을 퍼붓는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지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또 가능한 것, 논리적인 것, 진실된 것을 추구하고, 자연과 모델로부터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지, 추상적인 것을 생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친우들에게 재고해보라고 강요한다.
12월: 빈센트는 테오에게 세 상자 분의 그림을 보낸다. 그 중 일부는 당시 Leiden으로 이사 중이던 어머니와 누이 윌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 자신이나 작품에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따른다. 이 작품은 또 올리브 나무와 바람에 휘날린 소나무이다. 페르 탕기 Tanguy가 자신의 파리 가게에 빈센트의 그림 몇 점을 전시한다. 이 달 말에, 조용히 작업을 하는 가운데 또 발작이 찾아와 물감을 삼켜 자신을 독해하려 한다. 이번 발작은 심각한 것으로 일 주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의사 페이롱은 유화 물감을 없애고, 한 동안 그는 드로잉만 허락받는다.
1890년
1월: 누이 윌이 해산을 한 달 앞둔 테오의 아내 요한나를 돌보기 위해 파리에 온다. 빈센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프로방스의 생생한 인상을 전해주려 삼나무와 산들을 더 그리기를 원한다.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미술가 A. M. 로제 Lauzet(1865-1898)는 빈센트가 이미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 내었다고 확언한다. “프로방스는 정말 이 그림 그대로이다!” 이 당시 빈센트는 작업실에서 밀레와 도미에, 귀스타브 도레(1832--1883)의 작품을 복제하고 있었다. 1월 18일 빈센트의 작품 6점이 포함된 Les XX 전시회가 브뤼셀에서 그 문을 연다. 툴루즈-로트레크는 빈센트의 작품을 폄하한 한 화가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네덜란드 밖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기사가 미술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에 의해 메퀴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에 실린다. 오랫동안 앓아누워 있던 빈센트는 마담 지누를 방문하러 아를에 갔다가, 이틀 후 발작이 다시 일어나 한 주일 동안 계속된다. 1월 31일 테오의 아내 요한나가 아들을 낳는다. 큰아버지이자 대부인 빈센트를 따라서 빈센트 Willem으로 명명된 이 아이는 88세까지 사는 장수를 누릴 운이었다.
2월: 빈센트는 “꽃피는 아몬드 나무(615)”를 조카에게 선사한다. 테오는 보크 Eugene Boch의 누이인 Anne Boch가 브뤼셀에서 그의 그림 “붉은 포도밭(450)”을 4백 프랑에 샀다고 알린다. 이것이 아마도 빈센트가 판 유일한 유화일 것이다. 2월 22일, 빈센트는 다시 마담 지누에게 새로 그린 "아를 여인 L'Arlesienne(616)"을 선물하러 아를을 찾는데, 발작이 일어나 두 달이나 고통을 받는다. 보조원 두 명이 그 다음날 생-레미로 마차에 실고 와야만 했다.
3월: 빈센트는 파리의 독립화가 전 Salon des Independants에 열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테오와 요한나는 피사로를 포함,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대신해서 축하를 받는다. 고갱이 편지로 쾌유를 빌고 그림을 교환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테오가 처음으로 의사 가세를 만난다. 가세는 빈센트의 병증에 대한 테오의 설명을 듣고, 빈센트가 오베르로 온다면 회복 가능성은 밝다고 느낀다.
4월: 병 중에, 빈센트는 고향 브라반트의 기억을 맴돈다. 그는 기억으로부터 고향의 정경, 예를 들면 이끼 낀 이엉을 인 초가, 폭풍에 휩쓸린 하늘 아래 가을 저녁의 너도밤나무 울타리, 눈 덮인 들판에서 순무를 캐는 여인들 등을 유화로도 옮기고, 또 다수의 드로잉도 한다. 모네도 빈센트의 그림이 탁월하다고 느낀다. “전시회 작품 중 최고다.”
5월: 테오는 생-레미의 페이롱의사와 오베르의 가세 의사에게 편지를 써 빈센트를 옮길 준비를 한다. 빈센트는 혼자서 파리로 가 테오와 그의 가족을 만난다. 제수(弟嫂)는 건강한 혈색에, 떡 벌어진 어깨를 한 몸집 좋은 남자를 만난다. 미소 띤 얼굴이지만 굳건해 보이는 그는 얼마 동안 고질적인 기침으로 고생하던 테오보다 건강해 보였다. “감자 먹는 사람들(96)”, “론 강 위의 별밤(431)”, “꽃피는 아몬드 나무(615)” 등 빈센트 최고의 작품 중 몇 점은 테오 아파트의 벽에 걸려 있었다. 두 형제는 빈센트의 그림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탕기를 방문하고, 메소니에 Ernest Meissonier(1815--1891)의 분리주의자 살롱에 들른다. 하지만 파리는 빈센트에게는 너무 시끄럽고 들 뜬 곳이었다. 3일 후 그는 약 20마일 떨어진 오베르-쉬르-우아즈로 향한다. 처음에 그는 생-오뱅 Saint-Aubin 호텔에 여장을 풀지만, 마을 회관 맞은편에 있는 라부 Ravoux 부부가 운영하는 조그만 카페로 옮긴다. 빈센트는 요상한 이엉을 인 지붕과 전원적이고 그림 같은 정취를 풍기는 이 곳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의사 가세--테오가 빈센트를 위해 오베르를 선택한 것은 그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인데--는 매주 3일 씩 파리에서 진료를 하고, 그림도 그리고, 게다가 인상파 화가 몇몇과는 친구이기도 한다. 곧 빈센트와 의사(빈센트의 예술에 찬탄하는), 의사의 딸 마거리트 Marguerite(20살), 아들 폴은 친하게 된다. 빈센트는 곧 분주히 풍경과, 마을 정경, 포도밭, 가세 의사의 집과 정원, 초상화 등을 유화와 드로잉에 담는다. 그에게 남겨 진 이 두 달 동안에 그는 80점 이상을 그린다.
6월: 가세 의사는 파리의 갤러리로 테오를 찾는다. 그는 빈센트가 완전히 회복했으며 더 이상의 발작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그는 테오와 가족을 그 다음 주 일요일 오베르로 초대한다. 빈센트는 샤퐁발 Chaponval 역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 아기 조카를 안고, 뜰 주변의 개와 토끼와 닭 같은 동물들을 보여준다. 가세의 정원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 정말로 즐거운 하루였다. 빈센트는 지칠 줄 모르고 작품을 쏟아 낸다. 정원과 풍경, 밀밭과 양귀비밭, 오베르 교회, 가세 의사, 딸 마거리트, 라부의 딸, 농촌 소녀의 초상화 등등. 네덜란드 화가 Anton Matthias Herschig(1867--1939)가 오베르로 와 빈센트의 방 옆에 묵는다. 고갱은 편지로 그들이 열대에서 함께 작업실을 세울 생각을 하면서 나눴던 아를에서의 대화를 상기시킨다. 고갱은 지금 동료 화가 Paul Serusier(1864--1927)와 Jacob Meyer de Haan(1852--1895)와 함께 브리타니의 아름다운 어촌, 르 풀뒤 Le Pouldu에서 기거하면서 작업 중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희망은 마다가스카르로 가서 거기서 단순한 자연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실제로, 고갱은 1891년 타히티로 첫 번째 항해를 했다). 빈센트는 에칭에도 성공적으로 착수한다. 그는 가세 의사의 인쇄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는데, 가세 의사의 초상화(653)를 만드는데 이용한다. 그는 “프로방스 회상”이라 명명한 일련의 풍경 에칭을 계획한다.
7월: 7월 6일 아침, 빈센트를 테오를 보러 파리로 간다. 그런데 동생은 자신의 일과, 재정 상태, 살 곳 등의 문제로 극단적으로 근심에 쌓여 있었다. 게다가 아기마저 아프다. 집은 문제 투성이었다. 빈센트는 간신히 툴루즈-로트레크과 미술 평론가 오리에를 만나지만, 지치고 불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오베르로 돌아온다. 그는 테오에게 자신이 단지 동생의 짐이 될 뿐이며, 그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니 슬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고 편지를 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폭풍우에 휩쓸린 하늘 아래의 밀밭(678)과 도비니의 정원(673, 683) 등의 대판(大判) 그림을 그려나간다. 어머니와 누이 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지난해보다 훨씬 안정적이라고 쓴다. 7월 23일 그는 테오에게 4장의 그림에 대한 스케치와 Hirschig와 자신이 쓸 물감 주문서가 동봉된 마지막 편지를 쓴다. 7월 27일 어스름이 깔릴 무렵 산책을 나갔다가, 느지막이 돌아와서는, 방으로 들어간다. 라부 부부는 그가 아픈 것을 알고는 마을 의사인 마제리와 의사 가세를 부른다. 빈센트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음을 자인한다. 의사들은 붕대를 감지만 총알을 뺄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Hirschig는 테오에게 전하는 가세 의사의 편지를 가지고 파리로 간다. 테오는 오베르로 즉시 온다. 빈센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하루 종일 침대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7월 29일, 그는 죽는다. 침대 맡에 있던 테오는 그의 마지막 말이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였다고 전한다. 가세 의사는 죽어 가는 그의 모습을 드로잉 한다. 다음 날, 이미 닫혀 진 빈센트의 관이 라부 여관 그의 방에, 그의 화가, 화대, 화구와 함께 놓여진다. 관은 달리아와, 빈센트가 그렇게 사랑했던 해바라기 등으로 덮여진다. 그의 마지막 그림들은 벽에 걸려 있다. 오베르의 카톨릭 사제가 자살의 경우라 지역 공동 영구차를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빈센트는 옆 마을에서 빌린 영구차로 운반된다. 그는 광활한 하늘 밑 밀밭 곁에 있는 오베르 묘지에 매장되었다. 테오, 가세 의사를 비롯하여 A. M. Lauzet, Charles Laval(1862-1904), 루시엥 피사로 등 파리의 친구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페르 탕기와 봉거 Andries Bonger도 참석한다. 교회 예배가 제안 되었지만 취소되고, 가세 의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가운데도 무덤가에서 빈센트가 이룬 것, 그의 고귀한 목표, 그를 향한 자신의 커다란 애정 등을 말한다. “그는 정직한 인간이고 위대한 화가였습니다. 그에게는 두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성과 예술.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술이 중요했지요. 그는 그 속에서 살아갈 겁니다.”
8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테오는 몽마르트 자신의 집에서 빈센트 회고전을 연다
1891년
빈센트가 죽자 테오도 파손된 인간이었다. 그는 형을 끔찍이도 사랑했고, 두 사람이 함께 성취할 일에 커다란 희망을 가졌다.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네덜란드로 옮겨지지만, 1월 25일 위트레흐트에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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