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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by 길철현 2017. 2. 4.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다.

이렇게 한 줄을 적고 보니 온갖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든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는 말이 있는데 그 말도 이 상황에 어울릴 듯하다.

생각이 답을 찾았다고 생각되는 지점, 한 점 어두운 구석이 없이 환해지는 지점,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어떤 말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가 있긴 하겠지만, 구체적인 상황 앞에서 다시 총체적인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물론 많은 경우 판단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상황이 압도하는 힘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의 운명일 것이다.

예전에 플라톤의 글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예가 하나 있다. 내용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연상을 좇아가 본다.

경험이 많은 의사가 있다고 하자. 의서에 따른 처방과 자신의 판단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자를 선택할 경우에는 의사는 환자가 잘못 되더라도 책임의 소지가 없다. 하지만 의사는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것이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환자가 나을 때는 큰 칭송을 받겠지만 만일 환자가 잘못 된다면 의사가 전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상황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패러다임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정해진 절차'나 '규약'을 따르지 않은 데에서 발생한다고 해야겠지만.)


이야기는 늘 그렇듯이 또 옆길로 새고 말았다. 이해해 주기 바란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못박은 사람은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정직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목전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혹은 자신의 파멸을 불러올 지도 모르는데, 정직할 수 있는가? 손 쉬운 예로, 칼을 든 살인귀가 내 앞에 서서 작은 방에 숨어 있는 내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를 물을 때, 정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겠는가? 물론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못 박은 사람도 그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까지 정직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직은 어느 선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인가?


문제는 이 뿐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정직하고 안 하고의 문제보다도 '목숨'의 부지가 더 관건인 경우도 있다. 이청준의 중편소설 [소문의 벽]을 보면 육이오 당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했던 한 인물이 나오는데,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가며 점령을 하던 지역에 살던 그에게 닥쳐온 시련은, 밤중에 군인이 불쑥 나타나 전지를 쏘면서(플래시를 비추면서)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시 상황이라도 민간인인 그에게 그런 질문으로 즉결재판을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겠지만, 보다 시급한 문제는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지 너머의 그 대상에게 잘못 대답을 했다가는 그대로 죽을 수 있다는 상황이 주는 공포감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더 한 번 밀고 나가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에 대한 애착이 있을 때의 문제이리라. 삶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나, 어떤 큰 깨달음을 얻어서 범인들처럼 목숨에 연연해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또 다르게 다가오리라.


하지만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는 의식하든 하지 않든 어느 정도는 부정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마음의 부채도 되고 하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자기 합리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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