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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여는 말

엄마와의 대화

by 길철현 2017. 1. 19.

 

어머니가 설을 쇠러 일찌감치 고향인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쉰두 살 미혼의 아들은 일흔아홉인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상을 받는다. 밥을 먹고 한가한 시간을 빌어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가 갑자기 '국민연금이 이제 이재용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마침 아침 뉴스에서는 이재용의 구속 영장이 기각된 것을 톱뉴스로 내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까 어머니는 '이제 국민연금은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이재용이 관리하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하셨다. 나는 거의 방바닥을 구르다시피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 찬성을 했던 사건을 어머니는 그렇게 인식을 하신 것이었다.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평생을 육체적 노역으로만 살아온 어머니의 현실인식은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고 대구*경북 지역의 보수성을 그대로 답습하는 면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탄핵 소추에 몰려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불쌍하다'는 것이고,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북한에 간다'는 것이 문재인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이승만 이후로 노태우 정권까지, 그리고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서 내세우고 있는 안보 논리 내지는 여론 조작에 흠뻑 젖어 있다고 할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행적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편지 등을 이야기 하자 어머니는 또 '그거야,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지'라고 말하신다. 도무지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요,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유행어가 요즈음처럼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시절도 없는 듯하다.)

 

이 글이 어머니의 흉을 보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글을 공개하자니 어머니에게 죄송스러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사실들을 묻어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어머니의 현실 인식의 취약성은 특히 '지리 부분'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예전에 한 번 서울에서 대구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가는 길에 우리나라의 도의 위치를 설명하려고 진땀을 뺀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부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낙동강의 하구를 보고는 '이기 한강이가?'라고 해서 저절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대화는 과거 이야기에서는 어떤 보석보다도 밝게 빛난다. 외조부님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서 몇 년 살다가 해방이 되어 나온 이야기며, 홍역이 돌아 어머니의 여동생분 두 명이 죽은 이야기며, 육이오 때 외할아버지가 누군가의 거짓 신고로 국군의 손에 죽을 뻔 했던 일, 또 외할아버지가 포탄이 터지자 큰외삼촌만 안고 달아난 것, 더 나아가 6,70년대의 생활고(정말로 죽지 못해 살았다고 했던가?) 등등. 병마와 다소 무책임한 남편 탓에 가정을 도맡아 이끌어야 했던 어머니는 그 때문에 젊은 시절 여성성은 거의 던져버리고 억척스럽게 세상과 맞서야 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남다른 기술도 없었던 탓에 3D 직종의 하나인 도살장에서 일해야 했던 부모님. 운 좋게도 힘든 노역의 대가로 조금의 경제적 안정을 얻은 어머니가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된 것을 무작정 비난할 수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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