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점을 먹으러 아파트를 나서는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 한 켠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누군가가 흘리고 간 제법 큰 군고구마 덩어리를 쪼고 있다. 비둘기보다는 좀 작은 그렇다고 참새처럼 작지는 않은 잿빛의 별 특징이 없는 이 새의 그 중요한 순간 -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 을 방해하지 않으려 좀 멀찌감치 돌아가려고 했는데도, 인기척에 놀란 새는 저만치 후루루 날아가 버린다.
우리가 생명체라고 이름붙인 것은 모두 뭔가를 먹어야 한다(이 생명체의 끝단에는 우리가 생명체라고 규정 짓는 특징의 일부만 지니고 있는 바이러스가 있다. 생명체 내에서만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이러스는 생명체 밖에서는 바이론(viron)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 때에는 무생물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생물학적인 지식이 일천하여 대충 위키피디어에서 알아낸 지식을 요약한다). 식물의 경우 대체로 동물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지만 물이나 돌과 같은 무생물처럼 그냥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뻔한 이야기를 다시금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 말한 새의 먹이 활동에서 뭔가 존중해 주어야 할 것, 보호해야 할 것을 느낀 것은 이 세상을 건너기 위해 '먹는 것'만큼 갈급한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먹이는 쪼는 새의 모습에서 뭔가 공감대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인 입장이리라. 다시 말해 인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수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인간의 언어 혹은 생각은 인간의 시각이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 이외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 현재 나의 생각이다. 크게 보아 회의주의적 태도, 혹은 언어 세계 자체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칸트나 헤겔 등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할지에 대해 아주 혁명적인 발상들을 내놓았다. 예전에 황설중이 쓴 [인식론]이라는 얇은 책에 이에 대한 핵심적인 말들이 있어서 옮겨 본다.
인식론에서의 문제의 관건은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주관의 능력이 대상의 인식을 선험적으로 조건지우는 형식에 있다고 칸트는 제안한다. 대상으로부터 우리 주관의 인식 능력으로 탐구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이 바로 인식론에서 칸트가 감행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이다. (99)
칸트는 우리의 인식의 방향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물자체'가 아니라 '우리 주관의 인식 능력'이라고 말함으로써 칸트 자신이 말했는지 모르지만 인식론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이룬 셈이다. 하지만, "현상과 물자체를 구분하는 칸트의 비판 철학은 흄의 경험적 회의주의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수는 있어도 철학적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만족할 만한 이론으로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회의주의와 목표를 공유하는 협력자로서 만난다."(110) 그런 점에서 칸트의 비판 철학 또한 회의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철학사에서 회의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공고한 답변은 헤겔에서 어느 정도 찾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온다.
헤겔의 혁명적인 발상은 우리가 우리의 사유를 이용해서 개념을 도출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꾸로 우리의 사유가 개념을 통해서 규정된다고 하는 전환에서 정점에 이른다. 언뜻 우리가 개념을 이용하여 사유를 진행시키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념들의 질서가 우리의 사유를 이미 향상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22)
헤겔 또한 칸트와 비슷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 뭔가 새로운 생각 혹은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를 특정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할 때 헤겔의 이 말 자체는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의 이 말은 개념들의 질서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사유인가? 아니면 새로운 개념인가?)
지식은 짧고 생각도 짧아 언제나 한계에 봉착하고 좁은 틀에서 맴을 도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쓰려고 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였던 듯한데, 글의 방향은 '인식론'으로 나아가고 말았다. 내 능력이 닿는 껏 생각을 갖고 논다(는 말보다는 헤집어 본다)는 것이 나의 몫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