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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정신분석

김석 - [프로이트 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영사 (170206- )

by 길철현 2017. 2. 6.

* 김석 - [프로이트 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김영사 (170206- )


[프로이트는 내 20대부터 40대까지의 삶에서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의 저작들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는 가운에에도 읽어나갔고, 강의를 듣고, 또 정신분석적 상담을 오랜 기간 받기도 했다. 이 삶을 좀 더 잘 이해해보려는 시도였으나, 지금도 삶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김석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국내 전문가 중의 한 명으로 어렵지 않은 문체로 프로이트와 라캉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상당 부분 있을 듯하다. 


인간의 정신에서 무의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정립하려 했던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생각에 언어학과 철학을 접목시켜 더욱 발전시켜 나간 라캉. 이 두 사람의 생각들은 그 동안 내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저절로 공감의 소리를 내게 되지만, 그럼에도 뭔가 아쉬움은 항상 남는다.  



- 프롤로그

(7) 내가 아는 나의 욕망이 진정 나의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만들어낸 부풀려진 시화들을 맹목적으로 좇는 허황된 모방은 아닌지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8) 나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들이 사실은 가장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9)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하면서 그것이 인간 삶에 대한 빛과 소망이 아니라 페스트와 같이 껄끄럽고 불안한 새로운 골칫거리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라캉은 한술 더 떠 선의지로 무장한 도덕주체의 계몽적 윤리 대신 사드적 도착과 향유에 대한 맹목적 의지가 정신윤리의 방향이라고 선포한다. 정신분석이야말로 인간이 숨기고 말하기 싫어하는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의식을 부끄럽게 만드는 추악한 무의식을 무대화시킨다.

(11) 삶의 주체로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바로 여기 이곳에서 내가 외면하고 잊고 지냈던 삶의 실재와 대면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12) 정신분석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초월적 삶을 누리거나 무절제하게 욕망을 추구하라는 양자선택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이것과 저것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매몰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이율배반의 행동에 가깝다.


(9-10)홍상수 감독은 일상에 내재한 권태와 새로움을 차분하고 때로 코믹하게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아주 소소한 심리와 숨겨진 속물적 근성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9년에 개봉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역시 그의 영화에 매료된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영화의 매력은 이야기나 등장인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 자못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 오해하고 비난하며 헤어지고, 또 다시 새로운 삶을 갈망하면서 여전히 속물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적 모습이다. 물론 그 재미의 이면에는 왠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겸연쩍음과 그 때문에 불편한 감정도 솔직히 있을 것이다. 아무튼 영화의 주인공들은 너무 '찌질'하고 때로 과장되어 있지만 이중적으로 우리가 사는 일상의 모습들을 재연한다. 예컨대 주인공 구경남이 힘드니까 자기에게 짜증 내지 말라고 불평하는 여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 여자는 이제 너무 힘들다. 내 말을 너무 듣지 않는다"고 혼자 말을 하는 장면.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만난 후배의 부인에게 뭔가 오해를 불러 일으켜 후배의 돌을 맞고 절교 선언을 당하는 모습. 제주도에서 자신이 한때 좋아했지만 이제 존경하는 선배의 부인이 된 여자를 만나 정사를 나누는 장면. 그리고 그 여자에게 자신이 여태 만나지 못한 이상적인 짝이라고 고백하면서 어설프게 유혹하는 장면. 마지막에 구경남이 지금처럼 나이든 사람과 살면 그녀가 나중에 외로워질 것이라고 하자, 여자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 ."라고 면박을 준다. 로맨택하거나 감동적이기보다 한마디로 궁색한 인물들이 치고받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과 유사한 대사와 상황이 자주 반복되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많은 애기를 하고, 많은 기대를 품으며, 많이 아는 것처럼 남을 평가한다. 그리고 구경남처럼 겉으로는 사회적 성공이나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쿨하게 굴지만 성공한 후배를 질투하고, 예술 영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여자들에게 딴마음을 먹기도 한다. 경남은 꿈 속에서 자신이 앞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 돈도 많이 벌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그날 처음 본 후배의 부인을 끌어안는다. 꿈속의 상황은 후배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는 장면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데 더구나 남에 대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처럼 체면과 남의 시선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두툼한 보호막을 걸치고, 어느 정도의 위장 속에서 속내를 감추고 살 수밖에 없다.


-무의식에로의 초대

(18) 2007년 개봉된 피터 웨버(Peter Webber) 감독의 [한니발 라이징 Hannibal Rising]은 영화 사상 가장 잔인하고 지능적인 살인마 캐릭터 '한니발 렉터 Hannibal Lecter' 시리즈의 완결판이자 그 기원을 다룬 심리 영화다. 박학한 지식, 예술적 열정과 안목, 상대를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완벽한 팔방미인이지만 냉혹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엽기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 하지만 그는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과 악을 초월해 그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인간 내면의 악마적 충동을 가장 냉정하게 실현해나가는 인물이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가 괴물로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라트비아. 한니발과 여동생 미셸은 오둑막에 숨어 있던 중 도주하던 독일군 패잔병에게 발각된다. 한겨울의 오두막에 갇혀버린 패잔병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다 결국 한니발의 여동생을 잡아먹는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니발은 유일한 혈육인 삼촌을 찾아 프랑스로 탈출하는데, 삼촌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미모의 숙모 '레이디 무라사키 Lady Murasaki'가 한니발을 거둬 기른다. 숙모의 보살핌으로 의대에 진학한 한니발은 해부학과 예술에 심취하면서 사무라이의 도와 무예를 배운다. 그러면서 여동생을 죽인 장본인들을 찾아 복수를 감행하고 점차 잔인한 살인마로 변해간다. 영화는 새로운 한니발 렉터의 살인 행각을 예고하면 막을 내린다.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인 [한니발 라이징]을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분석하면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복수의 정당성이 아니라 영화의 마지막에서 괴물 한니발의 탄생을 알리는 대반전이 이루어지는 점이다. 한니발은 어렸을 적 동생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만 한니발의 희생자의 입을 통해 사실은 그 역시 동생을 먹어치운 범죄에 소극적 형태나마 가담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이 한니발에게 죄책감과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인육을 먹는 것을 즐기는 욕구를 불러일으켰음을 암시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한니발이 밤마다 꾸는 악몽은 한편으로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트라우마 trauma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에게 잠재된 공격성을 일깨우고 자극하는 욕망의 원천이다. 한니발은 동생의 일로 계속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초적 트라우마의 상황이 되풀이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무의식적 소원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25)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과정은 본능을 포기하고 억압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체는 아버지의 금지와 법을 수용한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금지된 욕망을 꿈꾼다. 사회화는 자연적인 본능을 길들이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그 본능을 표출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억압과 그 억압에 따른 다양한 증상을 수반한다.


(30) 라캉의 주장은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다'와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로 요약된다. 라캉은 주체와 시니피앙의 관계가 정신분석의 핵심 주제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무의식 주체의 욕망과 관계가 있다.

(32) 욕구와 요구가 분열되면서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갈망처럼 나타나는 것이 라캉이 말하는 욕망. 욕망은 대상들을 상징화해 기호 체계 속에서 교환되게 만드는 언어의 본성에서 비롯.

(33) 인간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말은 욕망이 결국 타인의 인정과 평가를 필요로 한다는 말.


II. 만남

(40) 히스테리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가 상기하기 싫어하는 특정한 기억이 의식에서 밀려나더라도 기억과 결부된 감정은 무의식 속에 남아 수축, 두통, 지각 마비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47) 무의식적 소원은 유아기의 성적 체험,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되는 꿈은 특히 신경증 환자에게 두드러지지만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임을 강조.

(91) 이 충동의 대리물(억압된 것)이 억압되는 장소가 바로 무의식이며, 무의식의 내용물은 곧 충동이 고착된 표상들이다. 무의식의 내용물은 억압과 관련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최초 억압의 대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된 소원이 중심이 된다.

(92) 의식 체계는 주로 판단, 구별, 분석과 같은 사유 작용을 통해 현실과 교섭하기 때문에 말의 표상에 많이 연관된다. 반면에 위에서 설명했듯, 무의식의 내용물은 원초적 기억, 즉 사물 표상에 가깝다. 그런데, 전의식에는 이 두 가지가 다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전의식은 무의식을 억압하면서도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대변자처럼 무의식의 작용에 끼어들기도 한다.

(101) 종교나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나 잔혹성은 초자아가 이드에 어떻게 봉사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107) 신경증을 댐의 물이 조금씩 틈새로 새면서 버티는 것에 비유한다면, 정신병은 물의 압력이 댐을 완전히 부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댐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물이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계속해서 일정량의 물을 흘려 내보내야 한다.

(111) 라캉은 자아란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지는 허구적 산물이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자아의 강화가 아니라 무의식 주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

(116) 거울 단계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인식의 기준이 되는 자명한 자의식이나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자아는 어느 순간 나의 이미지를 다른 대상 이미지로부터 분리하고, 그것에 고착됨으로써 가능해진다. 거울 단계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이미지에 열광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 세계에서 처음으로 가시화된 자신의 신체를 보여주면서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외부로 가시화된 이미지는 내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체의 나르시시즘이 투사되는 타자적 대상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단지 신체가 가시적 공간에 반영된 것으로 나와 마주해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자다. 그런데 신체 이미지는 나의 내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한갓 대상일 뿐이기에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만 머물며 이상화되기 쉽다. 이처럼 최초 주체의 구성 순간이 타자적인 거울상에 의해 매개되는 것은 주체의 욕망을 소외된 구조로 만든다.

(121) 도덕 규칙과 박애의 강조는 사실은 견딜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공격성과 불안에 대한 일종의 도피이자 방어다.

(122)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일찍이 마르틴 하이데거가 비판한 것처럼 외부 대상을 자신 앞에 세워놓고 닦달하는 권력화된 주체이자, 세계를 가시화된 대상으로 의식에 재현하는 표상의 주체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존재의 확실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유, 즉 표상하는 작용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정립하는 '에고 코기토'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도 [성찰]에서 코기토를 설명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동안만 존재한다"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126) 자연과학과 철학은 불가피하게 실재를 추상화하고 배제할 때만 가능해지는데, 그럼에도 절대성과 보편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라캉이 자연과학과 철학을 망상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135) 언어는 한편으로는 상징계의 구성 요소인 순수 시니피앙의 결합에 의해 구성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계적 작용에 의해 오염된다.

(136) 라캉의 독창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니피앙에 의한 상징화의 과정, 즉 주체 탄생의 드라마로 재해석 한 데 있다. 또한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아이가 욕망하는 대상이 성차에 상관없이 언제나 어머니이며, 아버지는 그것을 방해하면서 욕망에 법의 질서를 부여하는 상징계의 대리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140) 시니피앙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속하는 것으로 주체에 대해 이질적이며 주체의 존재를 완전히 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거하지 않고는 스스로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시니피앙은 이렇듯 한편으로는 주체를 구성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시킨다.

(142) 라캉 - 무의식이란 주체가 스스로를 나타내지도 않고, 주체가 말을 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말해지고 있는 어떤 것이다.

(144) 주체의 분열 - 담론의 주체: 언표된 주체 - 시니피앙에 의해 상징계에 드러나는 주체

                           무의식의 주체 - 언술 행위를 하는 주체 - 말의 의미 속으로 사라지는 무의식의 주체

-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한다 :  담론의 주체 - 거짓말을 하는 주체

                                        무의식 주체  - 진실(고백)을 말한다는 것을 전제

-라캉은 주체 분열의 논리를 언어학에서 빌려 오는데, 무의식 주체는 언술 행위를 하는 주체를 말하며 담론의 주체는 그 담화에 의해 표현되는 주체, 즉 언표된 주체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한다'라는 말을 보자. 이 문장에서 주어인 '나'는 거짓말을 하는 주체로 언표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언술 행위의 주체가 진실(고백)을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 문장은 전형적으로 두 주체의 분열된 모습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예들은 농담이나 말실수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라캉이 말실수나 거짓말이 더 진리에 가깝다고 보는 것은 그것이 언표된 주체 밑으로 사라지는 무의식 주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46) 라캉은 결여가 실제 대상의 상실이 아니라 언어가 발생시키는 사후적 효과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언어 이전에는 결여도 차이도 존재하지 않지만, 일단 언어가 작용하면 언어는 주체적 삶에 상실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언어는 대상을 상징화해 소통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의미의 세계를 건설하는데, 이는 실제 세계에 대한 배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147) "인간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말은 욕망과 대상의 영원한 어긋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며, 그런 까닭에 욕망하는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 욕망의 주체는 채울 수 없는 존재 결여에 시달리면서도 시시포스의 헛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이기도 하다.

(148) 라캉은 상징계의 구조적 우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상징계가 결코 동화시키지 못하는 범주인 실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신적, 물질적 삶의 매커니즘을 총체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151) 실재는 상징계에 의해 현실에서 배제되는 영역이다. 언어가 사물의 살해라고 했을 때 실재는 기표에 의해 대리되면서 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칭한다.

- 실재는 항상 같은 장소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것이다. 사유하는 주체, 즉 사유 실체인 코기토는 이 자리에 도달할 수 없다. (라캉)

(154) 상징계는 계속해서 실재를 현실 속에 기입하려고 하지만 불가능성의 논리에 가로막힌다. 실제는 모든 개념과 기표의 논리가 좌절되는 곳이다 사유 주체의 대명사인 코기토가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재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상징계의 필연성이 대립하는 것이 인간 삶의 현실이다.

(157) 욕망은 결국 주체가 상실한 존재, 즉 실재에 대한 갈망이라 할 수 있다. 실재는 이처럼 언어에 대해 언제나 이질적이며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상징계의 틈을 뚫고, 상징계가 결국 완전한 존재의 질서를 보장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160)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을 궁극적으로 자극과 긴장이 제로에 도달하는 상태, 즉 연원한 휴식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일종의 열반 원리로 보았다. 반면에 라캉은 죽음 충동을 상징계가 설정한 쾌락 원리와 금지를 넘어, 잃어버린 대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향유 의지로 해석한다.

(165) 라캉은 예술 또한 창작 과정을 통해 실재와의 만남을 체험하면서 작품을 통해 작가가 느낀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기에 승화의 일환으로 본다.


- 이슈

(207) 라캉은 자신의 성차 이론을 근거로 하나 됨이 불가능한 환상이고,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208) 라캉은 여성적인 위치에서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찾을 것을 주문한다. 여성은 일자를 꿈꾸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는 비동일성의 논리다. 라캉은 남성적 위치를 일자의 논리로, 여성의 위치를 '전체가 아님'의 논리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