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라캉은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와 함께 나에게 큰 울림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라캉의 이론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면을 지나치게 도외시하고, 언어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물론 나의 견해는 피상적인 그런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의 주장들은 내가 적절하게 이해를 했던 하지 못했던 일단은 주의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가 쓰는 용어들이 우리의 일상 어법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먼저 정신분석의 윤리를 '결코 인식할 수도 없고, 충족될 수도 없는' 욕망(욕구와 요구의 차에서 발생하는 것?)의 추구라고 한 면, 자아와 주체의 문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보르메오의 매듭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현실, 이런 주장들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잘 알 수는 없지만그럼에도 라캉의 그 화려한 언어 뒤에는 뭔가 거북스러움이 스며드는데, 그것은 아마도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진리를 독점하겠다는 욕망에 대한 거부감은 아닌지 모르겠다.)
김석은 홍준기, 맹정현 등과 더불어 국내의 손꼽히는 라캉 전문가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난해한 [에크리]를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개념들을 좀 더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라캉에 대한 입문적 소개의 글은 [라캉의 재탄생]에 실린 홍준기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히 수 만 가지 말들이 넘쳐나는 백가쟁명의 시대이다. 글들을 취사선택해서 이해가 닿는 껏 읽고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이 책도 작년 유월에 읽었는데 이제서야 정리를 한다.
[인용]
1부 - 구조주의 시대와 [에크리]
1장 내가 본 [에크리]
(25)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
(29) 텍스트는 텍스트로 머무는 게 아니라 '나의' 욕망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에크리]가 던지는 메시지.
(44) 여러분이 라캉주의자라면 나는 프로이트주의자입니다.
(54) 라캉은 무의식의 언어적 속성에 주목했던 초기 프로이트의 모델을 발전시켜 무의식의 실체가 성적 리비도의 흐름과 억압이 아니라 언어적 구조라고 설명한다.
(56) 상징계가 주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의미화의 세계라면 실재계는 상징계의 한계와 욕망의 절대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충동들이 겨냥하는 부분 대상들은 충동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충동 자체는 계속되는 순환을 통해 만족을 누리는데, 그 중심에는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욕망 즉 결여가 놓여 있다. 충동이 겨냥하는 것은 상징계를 넘어서는 실재이다.
(58)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개인적 차원의 욕구와는 구별된다. 욕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해주는 그런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언어적인 존재이고 언어는 언제나 인간을 속이기 때문이다.
(59) 욕망이야말로 [에크리]의 전체 주제
(62) 라캉이 프로이트 사유에 내재한 생물학적이고 역학적인 무의식 모델을 폐기하고 상징계의 작용이 수행되는 순수 공간으로 무의식을 규정할 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 개념, 상징계의 우월성, 근친상간의 금지와 문화의 상관관계 등의 이론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4) 구조주의에 의하면 주체의 행위와 의미는 구조의 요소들이 맺는 관계와 위치에서 발생하는 부차적 결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리들과 위치들이 그것을 점유하는 존재자나 현상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말이다.
(66) '상징계와 주체의 관계'가 바로 [에크리]의 핵심 주제. 욕망, 충동, 결여, 반복, 죽음, 대상 등 여러 용어들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71) 코제브- 주인과 노예의 상호 투쟁은 욕망의 만족을 위한 것인데 욕망의 만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오는 인정이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자의적인 주관적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으로 구조화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욕망의 이러한 변증법적 성격은 라캉의 상호 주체성 개념으로 계승된다.
(73)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론에 토대를 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 금지 법칙의 필연성을 통해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가정된 사회의 기원에 대해 과학적인 해명을 시도한 사람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의 금지가 문명의 기본적인 구조에 속하며 자연에서 사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 범주임을 주장.
- 친족 관계란 가족 내에서 개인의 위치를 정해줌으로써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선행 구조이자, 주체의 삶을 사회관계 속에서 순환시키는 상징적 질서.
(74) 소쉬르가 언어의 최소 단위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인 기호로 제시하면서 기호 체계에 주목하는 형식적 언어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음소들의 변별적 관계가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어떤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규명함으로써 구조주의적인 언어 연구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야콥슨.
(75) 라캉 - 은유; 선택, 환유; 결합. (치환과 압축)
(76)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 과정을 부성 은유로 재공식화하면서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재해석.
2부. [에크리]의 구조와 핵심 사상
1장 [에크리]의 구조와 주요 내용
(83) 인간은 자신이 상징계의 주인이라고 착각하지만 정작 상징계의 구성 요소인 시니피앙에 의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일방적으로 부여받는다.
(84) L 도식 - 주체들이 맺는 상호 관계의 구조와 소통을 묘사. 동시에 주체의 내적 구조의 공식. 언어가 상상계의 작용을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래 의도가 왜곡되면서 말하는 주체에게서 무의식의 효과를 발생시킴.
(87) 주체는 먼저 거울에 비친 외화된 신체 이미지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자아라는 최초 실체를 획득
-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
(89) 남근은 상상계가 아니라 상징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남근의 소유자로 등장한다. 욕망은 대타자의 소유로 가정된 남근을 향하기에 구조적으로 대타자의 욕망에 종속되게 된다.
(90) 분석은 치료나 행복을 목표로 삼는 게 아니라 욕망의 진실에 눈을 뜨고 자신의 결여를 적극적으로 떠안는 윤리적 태도와 관계되기에 언제나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91) 지식의 정합성과 객관적 검증만을 강조하는 실증적인 자연과학은 오히려 망상에 가까우며, 말하는 주체의 진리를 보존하는 정신분석이야말로 합리성을 강조하는 과학적 정신에 훨씬 충실한 것.
(96) 세 명의 죄수 우화 - 무의식에 고유한 논리적 시간개념
(102) 진리는 현실에서 결코 완전하게 획득될 수 없는 것이며 지식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인 정신분석만이 새로운 진리의 전달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술 행위 속에서만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주체 속의 주체'를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상징계보다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상징계에 틈을 벌리는 실재에 더 가깝다.
(105) 자크 데리다 - 라캉 사상을 남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비판한 것처럼 [남근의 의미]에는 특권적 시니피앙인 남근과 욕망의 관계를 묘사한 유명한 구절들이 들어 있다.
- 시니피앙들의 시니피앙
- 특권적 기표인 남근은 욕망의 출현에서 발견되는 로고스의 표식
(106) 여성이란 남녀 모두에게 향유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여성성은 결국 미지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 되는데 거세에 의해 편성되는 상징계의 질서를 벗어나기에 상징화도 불가능하다. 성적 비대칭성은 나중에 '성관계는 없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라캉에 의해 정식화된다. 결국 여성성의 문제는 상징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주이상스의 문제와 연결된다.
(107) 정신병은 상징계의 안내자인 '아버지의 이름'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실재계가 환상의 형태로 돌아오는 것. R도식으로 설명.
(108) 라캉은 사드가 향유의 자유를 통해 욕망의 절대성을 인권의 실질적 내용으로 제시한 최초 인물이라 평함.
(109) 정신분석이야말로 시니피앙의 논리를 통해 주체의 진정한 원인을 제시하고, 분열되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주체의 불안한 지위를 동시에 폭로.
2장 [에크리]의 핵심 사상
(115) 라캉 연산식은 우선 시니피에에 대한 시니피앙의 우월성과 자율성을 강조한다. 대문자 S는 시니피앙을 말하는데 소쉬르의 기호와 달리 그것이 시니피에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시니피앙의 능동성과 지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116)시니피앙 개념
1. 라캉은 언어의 최소 단위를 기호가 아니라 시니피앙으로 보는데 시니피앙이 의식적, 무의식적 담론을 형성하고 주체를 발생시키는 근본 요소가 된다.
2. 시니피앙은 언제나 연쇄적인 사슬 형태로만 존재한다. 개별적인 시니피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서로 간의 변별적 체계 속에서 대립을 통해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3. 시니피앙은 주체를 대리함으로써 상징계를 완성하고 무의식적인 욕망을 발생시킨다.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자 언어의 주관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시니피앙이 주도권을 갖는다.
-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본성을 규명하면서 주체의 생물학적이고 역동적인 리비도 이론을 기초로 삼았다면, 라캉은 외부적 원인이자 순수 형식인 시니피앙을 중심으로 무의식의 구조를 해명한다.
(117)시니피에는 시니피앙 밑으로 끊임엇이 미끄러져 들어가며 고정된 기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라캉이 강조하는 점이다. 일정한 시니피앙 연쇄가 고정된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둘, 셋 혹은 그 이상의 다의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는 것이다.
(118) 실재계란 상징계를 넘어서는 절대적 질서이며, 상상계란 상징계에 지배를 받는 표상들의 질서이기 때문에 상징계가 둘의 기준이 된다.
(125) 자아 - 상상계, 주체 - 상징계
- 라캉이 말하는 주체는 외부 세계를 마주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대상들을 사유 속에서 취하는 코기토가 아니라 상징계에 포섭됨으로써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그런 주체.
(128)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주체의 성적 정체성과 인격 현성에 중요한 계기이듯 라캉도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과정을 주체 생성의 필수 과정으로 간주. 오이디푸스 과정이란 주체가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된 상상적 돌일시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부과하는 상징계의 질서로 편입되는 과정.
(135) 정신병이 발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폐제되면 된다. 다시 말해 주체에 대한 상징계의 대립에서 요청되는 대타자의 자리에 그 시니피앙이 오지 않으면 된다. 이 자리에 '아버지의 이름'이 결핍되면 그것이 시니피에에 구멍을 내면서 상상계의 점증하는 재앙들의 기원이 되는 시니피앙 변화의 연속을 일으킨다. (에크리)
(136) 부성 은유 공식 볼 것.
(138) 언어적 질서는 실재계에 속하는 물을 절대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실재는 무이며 언어를 초월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물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데 이것이 라캉이 무의식을 불가능한 지식으로 정의하는 이유이다.
(140) 은유 공식
(141) 은유란 시니피앙 간의 대체를 통해 전혀 새로운 의미(s)를 발생시키는 작용.
- 사랑이란 태양 아래 미소 짓는 조약돌
(144) 욕망이란 존재 결여의 환유이다.
(148) 거울단계는 주체가 구성되는 최초 순간이자 이후 주체를 영원한 분열과 소외 속에 위치시키는 실질적 계기이다. 주체가 자기 자산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때, 그리고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언제나 거울단계에서 기원하는 이자 관계가 작용한다. 다시 말해 주체가 사고하거나 외부를 의식하면서 행동할 때 언제나 자아가 주체를 대신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데, 이 자아는 본질적으로 주체에 대해 타자이다. 자아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외부 매체에 투영된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취하면서 사후에 발생한 것으로 주체의 신체적인 감각에서 기원하는 근원적 불안감을 완전하게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신체적으로 미숙한 아이가 느끼는 조각난 몸의 환상 같은 것이 바로 근원적 불안감이다. 주체와 자아의 이러한 대립적 관계 때문에 라캉은 자기의식의 기만적이고 허위적인 속성을 강조하면서 코기토에서 비롯되는 모든 철학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코기토는 이미지에서 비롯된 자아를 모든 진리의 확실한 출발점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150) 상상계는 주체가 자신의 이미지와 맺는 이자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주체에게 완전성과 통합의 환상을 주며 세계에 대해 생각할 때 모든 것을 대상화하는 표상적 태도를 갖게 만든다. 상상계는 주체가 구성될 때 가장 먼저 작용하지만, 그것이 구조화되고 주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상징계의 작용에 의해 가능하다.
(152) L 도식 그림3
(154) 자아는 외부 대상과 관계를 맺기 위해 주체가 어쩔 수 없이 뒤집어 쓸 수밖에 없은 가면이기도 하다. 주체가 상상계에서 고정되는 특정한 지점이 없으면 자아와의 관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표상화가 가능해지지 않게 되며, 결국 지식의 형성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언어가 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표 주체인 내가 상징계의 공간에 일정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한다. 자아란 소외의 구조이지만 상징계 내에 있는 주체에 자리를 잡을 때 주체의 가시적 토대처럼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주체의 상상적 대리인이기도 하다.
(155) 상상적 동일시 - 거울 단계, 상징적 동일시 - 오이디푸스
(163) 라캉은 "Wo es war, soll Ich werden"을 "자아가 이드를 대신해야 한다"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진정한 주체인 내가 그것이 있던 곳에 도달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
이 주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실제처럼 언급하는 이드나 욕망의 동력인 리비도 에너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부성 은유가 이루어질 때 시니피앙에 의해 거세되어 영원히 상실된 물(Ding)의 형상으로만 나타나는 존재를 말한다.
(166) 빗금친 주체 - 상징계의 질서가 무의미인 존재를 억압할 때 가능해지기 때문에 주체 구성이 이루어질 때 소외는 주체의 본질적 운명이 된다. 주체는 상징계에서 의미 주체로 태어나지만 존재를 배제하고 억압할 때 그것이 가능해지므로 주체 탄생은 소외를 대가로 지불할 수밖에 없다.
(169) 진리가 자신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관계하는 현실로부터이다.
- 상징계는 주체를 소외시키고 욕망에 대해 알 수 없게 만들지만 우리는 상징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나 욕망에 전혀 다가갈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의 역설이기도 하다.
(176) 꽉 찬 말 - 상징적 축에 의해 진실이 드러나는 말
텅 빈 말 - 상상계적 차원의 지배를 받는 말
(181) 무의식은 상호 주체성의 구조에서 주체의 의지를 벗어나면서 반복되는 시니피앙 연쇄의 작용. 인간에 대해 상징계가 외재적이고 선험적인 질서로 존재하는 것이 무의식 개념의 본질임을 강조.
(185) 욕구, 요구, 욕망
(194) 욕망의 그래프
- 욕망의 그래프는 욕망의 전개 양상은 물론 무의식이 이중화된 담론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수학소를 결합하여 일목요연하게 지표상에서 그려낸 것.
(195) 사후 작용이란 한 문장의 의미는 과거에서 현재로의 순차적 흐름이 아니라 최종적인 구두점 찍기에 의해서 거꾸로 소급적으로 부여된다는 것이다.
(202) 욕망의 그래프는 주체가 의미화 연쇄 속에 편입되면서 시니피앙의 주체로 태어나고, 그 주체를 통해 대타자에게 요구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담론의 분열이 이루어지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담론이 분열 되는 것은 최종적으로 진리의 장소인 대타자 역시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를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대타자는 언어의 장소인데 자신을 언어적으로 묘사하면서 초월할 수 잇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욕망이란 언어에 순응해서 진행하면서 또 하나의 축인 죽음과 주이상스를 반복적으로 체험한다. 이때 주체는 환상 가로지르기를 통해 대타자의 결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믿는 대상 a를 놓으면서 욕망을 지속한다. 그러나 욕망은 언어 속에서 죽음의 모습을 본다. 죽음 충동은 자연스럽게 상징계의 한계를 넘는 주이상스를 향해 주체를 끌고 간다. 주이상스 속에서 주체를 유혹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결여 자체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욕망의 끝이 아니며, 대타자에 대한 종속이 욕망의 완성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은 본질상 언어에 의해 시작되면서도 그 한계 너머로 가려는 주이상스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데 죽음은 상징계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207) 남근은 대타자에 속한 것 혹은 대타자의 욕망을 상징하는 절대 기표가 된다.
(208) 라캉 - 남근은 존재 결여의 시니피앙으로 기능하는데, 결여는 주체가 시니피앙과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208) 상징계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시니피앙의 연쇄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상징계 내의 빈자리를 상정할 때 가능하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주체가 어머니의 상상적 남근이 되기를 포기하고 그 빈자리에 '아버지의 이름'을 가져올 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욕망과 관계된 최초 기표의 자리는 영원히 억압되는데 이후의 어떠한 기표도 그것을 대신할 수없다.
(214) 결여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화의 질서를 벗어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적극적 의미이다.
(219) 성차 공식으로부터 여성과 남성의 대등한 성적 결합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것이 "성적 관계는 없다"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이다.
(225) 신경증 환자가 언어 속에 거주하는 자라면 정신병자는 언어가 그 속에 거주하고 그를 소유하는 경우이다. 신경증 환자가 소외를 겪으면서도 언어를 주체의 세계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대상관계를 맺는다면, 정신병자는 언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229) 신경증이란 "존재가 주체에게 묻는 질문이다." 히스테리가 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강박증은 존재와 죽음에 대한 질문.
(232) 도착증: 주체가 타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에 스스로를 환상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결여를 대상을 통해 메움으로써 거세의 현실을 부인하려는 노력.
(234) '너는 대타자의 법에 충실해야만 한다'가 칸트식 명제라면, '너는 즐겨야 한다'는 명령이 사드적인 도착의 본질.
(237) 실재계란 무엇보다 상징계가 주체의 의미 세계인 현실로부터 배제한 부분으로, 상징화를 벗어나는 모든 영역을 다 실재라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나타나는 환상, 주체 탄생 시 잃어버린 어떤 것, 언어적 질서로 표현하지 못하는 욕구의 찌꺼기,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는 불가능한 성관계 등이 그것이다.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고 기표들의 질서에 동화되지 않는 모든 질서.
(245) 언어는 그 출발점에서 사물의 상징적 살해 위에서 구축되므로 주체는 말을 할 때마다 상실의 경험을 되풀이한다.
(247) 라캉은 승화를 본질상 성도착과 같은 것으로 보는데 둘 다 쾌락원리가 부여한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257)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라캉의 연구 궤적과 애매한 문체는 진리와 지식 혹은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진리는 언어와 더불어 시작되지만 언어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진리에 대한 노력은 절대 만족이 불가능한 욕망과 짝을 이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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