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
[감상]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데 제대로 적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개인적인 감회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오래 전부터 [독서 목록]에 올라와 있었던 책인데, 이번에 비록 한글 번역이긴 하지만(번역이 좀 의심스러운 곳은 영어본을 참조하면서) 끝까지 다 읽고 발췌까지 마쳐서 뿌듯하다. 예전에 읽으려고 몇 번 시도를 했으나 영어로 [서문] 부분만 읽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영어 본을 빌려 제본한 것이 20년 전인 98년이고, 우리 나라의 초역본인 [왕문사]에서 나온 책을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도 2000년이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이 [왕문사]라는 출판사 본의 번역자 역시도 이번에 읽은 [나남] 본의 번역자와 동일한 김인환이다. 그 사정을 번역자는 [역자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1971년 겨울 이 책을 번역하여 1972년에 '왕문사'라는, 지금은 없어진 출판사에서 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철학적 간주곡"과 "신프로이트 학파의 수정주의 비판"을 생략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7-18)
번역자의 이름이 지금은 은퇴한 대학교수이자 유명한 국문학 평론가와 같아서 [왕문사] 본을 구입했을 때 처음에는 동명이인이 아닐까 하다가, 바로 그 분이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번역을 했다는 것을 알고 상당히 놀랐던 것도 떠오른다. 국문학을 하는 분이 이런 책을 번역하다니!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왕문사] 본의 발행일이 1973년으로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 분의 기억에 약간 착각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대양서적]이라는 출판사에서 [세계사상대전집] 중의 한 권으로 1981년에 나온 번역서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구입 날짜도 적어놓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왕문사] 본보다도 훨씬 이전에 구입하지 않았나 한다. 번역자는 김종호인데 역자에 대한 소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어디에도 없다.]
[두 가지 오해. 나는 이 책의 저자인 마르쿠제가 독일인이라서 영어 본 또한 번역 본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쿠제는 에리히 프롬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 온 다음에는 외국어인 영어로 저작 활동을 했고, 1955년에 나온 이 책 역시도 영어로 쓴 글이다. 또 하나 마르쿠제가 막시즘과 정신분석을 접목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도 그러한 입장이 표명된 책이 아닌가 했는데, 부제에 나와 있듯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그런데, 이 책의 뒷표지에는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정신분석이론과 열려있는 맑스주의와의 통합을 최초로 제시한 책이다"라고 적혀 있다. 내 말은 맑스적인 마르쿠제의 입장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20대 이후로 정신분석은 그래도 꾸준히 공부를 한 편이기 때문에, 마르쿠제의 이 책은 그래도 여타 다른 철학책보다는 따라가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발췌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읽고 난 뒤에 드는 첫 느낌은 이 책은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유명한 글의 주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 삶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의 상당 부분이 나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억압에 기인한 것이라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서 오는 위안감이다.
그 같은 사정은 이 책의 첫 마디가 "문명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영원한 억압에 기초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누구에게나 승인되어 왔다"(23)라는 말로 시작하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프로이트는 인간 삶의 두 가지 원칙으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을 이야기 했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유예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현실원칙 아래 문명이 건설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문명은 본능의 억압에 기초하는데, 이 억압된 본능은 문명의 요구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는 것이다. (문명은 일차 본능들과 쾌락원칙에 맞서서 수립된다. 그러나 쾌락원칙은 이드 안에 살아 남기 때문에 문명화된 자아는 그 자신의 초시간적 과거 및 금지된 미래와 영구히 싸워야 한다. 287)
그래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다분히 비관적인 관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과 문명 간의 갈등의 해결 가능성을 예술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근본적이고 독립적인 정신과정으로서의 환상은 자신의 경험에 일치하는 - 즉 적대적인 인간의 현실을 극복하는 자신의 진리가치를 소유한다. 상상력은 개인과 전체, 욕망과 실현, 행복과 이성의 화해를 마음 속에 그린다. 이러한 조화는 기존의 현실원칙에 의해서 유토피아로 추방되었지만, 환상은 그러한 조화가 현실이 되어야 하고, 현실이 될 수 있으며, 환상의 배후에는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상이 형식을 갖출 때, 환상이 지각과 이해와 우주 - 주관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인 우주를 창조할 때 상상력의 진리는 비로소 실현된다. 이것은 예술 안에서 일어난다. (172)
인간의 일차적인 본능들이 상상력의 힘을 빌어서 승화의 과정을 거칠 때 문명과의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는 말인 듯하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성욕 등 일차적 본능을 에로스로 전환시킬 것도 이야기하고 있다.
정신적인 생식은 신체적인 생식과 마찬가지로 에로스의 작업이며, 국가(제도와 법률)의 올바르고 참된 질서는 사랑의 올바르고 참된 질서처럼 에로스적인 질서이다. 에로스의 문화건설 능력은 억압 없는 승화이다. 성욕은 목적으로부터 굴절되지도 않고 목적을 가두어 넣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목적을 획득하면 본능은 더 완전한 만족을 찾아서 다른 목적들로 초월한다. (248)
전체적으로 마르쿠제는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에서 이야기한 내용 들을 승인하면서도, 인간의 본능과 문명의 억압에 의한 갈등의 해소 방편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 감상을 쓰면서 잘 드러난다.)
[발췌]
- 역자의 말(6) 이동 - 환유, 축합(압축) - 은유
- 낱말에서 낱말로 이동하는 환유의 심리과정은 긴 탄도를 지나간다. 이에 비하여 마음의 섬광이 낱말과 낱말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은유의 심리과정은 좀더 직접적이다.
(7) 충동(욕동, 본능)의 진정한 대상은 영원히 무의식에 맡겨지고, 욕망은 대상에서 대상으로 이동하는 환유의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근원적인 결여에 견주어 볼 때 쾌락원칙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의 호소는 부분적으로밖에 실현될 수 없다.
- 언어는 욕망에 응답하면서 동시에 욕망을 금지하고 또 보호한다. 욕망과 요구(demand, need - 욕구)가 갈라지는 순간은 아이가 언어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욕망은 말할 줄 모르고 요구의 언어는 진정한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desire - need, demand)
- 무의식을 구성하는 기본억압(원억압 -primary repression)이란 언어의 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기본억압은 맑스의 필요노동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 어떠한 사회에서건 인간이 사람 구실을 하려면 치르지 않을 수 없는 보편적 희생이다.
(10) 사회적 순응주의 - 미국식 생활방식 : 잉여노동, 과잉억압 - 계급구조의 토대를 개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는 것.
(11) 한계분석 경제학; 행복한 자본사회 - 순응주의
(14) 과잉억압과 잉여노동을 거절함으로써만 인간은 정신의 장애를 회피할 수 있게 된다.
* 서론
(23) 문명은 인간의 본능(욕동Trieb)에 대한 영원한 억압에 기초 - 프로이트
(24) 강제수용소, 대량학살, 세계대전, 핵폭탄 등은 야만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과학과 기술과 지배의 성과를 아무런 강제를 받지 않고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으로 퇴보가 아니라, --사용이다.) [Concentration camps, mass exterminations, world wars, and atom bombs are no "relapse into barbarism," but the unrepressed implemenation of the achievments of modern science, technology, and domination -4) 인간에 의한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예속과 파괴는 인류의 물질적 * 지적 성과가 정말로 자유로운 세계의 창조를 허용할 것 같은 바로 그 때에 그 고도한 문명 안에서 일어난다.
*제1부 - 현실원칙의 지배
- 정신분석의 은폐된 경향
(34) 상상력은 문화적 변용으로부터 보호되어 그대로 쾌락원칙에 위탁되어 있다. (쾌락원칙 -- 현실원칙)
(36) Ananke - 희소성, 필연성.
(36)희소성(Ananke : 필연성)은 인간에게 본능의 충동을 자유롭게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 쾌락원칙 아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본능적 구조의 결정적인 수정을 강요하는 사회적 동기는 경제적인 동기이다. 각자의 노동이 없으면 사회는 성원의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수단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기의 정력을 제한하고 정력이 성적인 활동에서 노동으로 향하도록 주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40) (Ernest G. Shcachtel - on Memory and Childhood Amnesia)
- 억압된 개인의 기원 (개체발생)
[참고] 본능(욕동) 이론의 변화
1. Sexual/self-perservative (ego)
2. a) Object love/ self love
b) Sexual /aggressive
3. Life/death (Eros - Thanatos) [사전]
(47)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에로스는 결국 죽음의 본능에 봉사하는 활동이며, 삶은 단지 죽음에 이르는 긴 우회로인가?
(49) 이전의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이 그토록 시종일관하게 삶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이 그토록 에로스에 가깝게 접근한 적도 또한 없었다. 페니헬은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이라는 반대명제가 원래 공통된 근원에서 분화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56) 아난케란 일정한 제한과 포기와 지연이 없다면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지나치게 궁핍한 세계 안에서 생존경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
(57) 과잉억압(Surplus Repression) - 현실원칙의 어떠한 형태가 본능에 대한 억압적 조종을 상당한 범위와 정도로 요구함과 동시에 특정한 역사적 제도와 지배의 특정한 이익은 문명된 인간의 공동생활에 피할 수 없는 억압적 조정 위에 부가적 조정을 다시 도입한다. 특정한 지배체계에 기인하는 부가적 조정.
(61) 문명과 성욕의 갈등은 성적인 사랑이 두 사람의 사이의 관계이며, 그 안에서 제3자는 쓸데없거나 방해가 되지만 문명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관계에 기초한다는 상황에 기인한다. 사랑의 관게가 절정에 이를 때 주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용납할 여지는 전혀 없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들 자신으로 충분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소유하는 어린애를 원하지조차 않는다.
the conflict between civilization and sexuality is caused by the circumstance that sexual love is a relationship between two people, in which a third can only be superfluous or disturbing, whereas civilization is rounded on relations between larger groups of persons. When a love-relationship is at its height no room is left for any interest in the surrounding world; the pair of lovers are sufficient unto themselves, do not even need the child they have in common to make them happy.
(70) 도착은 정상적인 성욕보다 더 많은 행복을 약속하는 듯하다. 그러한 약속의 근원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정상으로부터의 이탈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성격과 생식적인 성 기능에 대한 거부를 강조했다. 도착은 성욕을 생식의 질서에 예속시키는 문명과 이러한 질서를 보증하는 제도에 대한 항거의 표현이다.
(71) 정상적인 것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과 선한 것 사이의 등식을 강요하는 억압적 질서 속에서 쾌락을 위한 쾌락의 표명은 악의 꽃으로 나타난다.
- 억압된 문명의 기원
(85) 가부장을 집단적으로 살해. 지배하는 형제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부과한 터부가 집단 전체의 유지라는 공동이익을 내세워 억압을 완성. 원시 유목부족과 형제씨족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심리학적 사건은 죄의식의 발전.
(92) 유대인 배척주의 - 아버지인 신의 가장 사랑하는 첫째 아들이라는 유대인의 주장에 대한 질투. 거세의 위협과 관련된 할례의 공포,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근대인에게 강요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원한 등이 유대인 배척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 원한은 기독교의 근원인 유대교에 투사.
(96) 종교가 아직도 평화와 행복을 향한 비타협적인 갈망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환상은 평화와 행복을 제거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과학보다는 아직도 훨씬 높은 진리가치를 가지고 있다. 종교의 억압되고 변질된 내용은 종교를 과학적인 태도에 예속시킴으로써 해방될 수 없다.
- 문명의 변증법
(103) 프로이트 - 죄의식이 문명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함.
- 문명이 진보할 때에 죄의식은 더욱 강화되고 항상 증대. 1) 본능의 이론에서 분석적으로 도출
2) 현존문명의 커다란 병과 불만 - 증대되는 전쟁의 주기, 도처에서 일어나는 학살, 유대인 배격주의, 민족근절 책동, 맹목적 신앙, 망상의 강화, 증대되는 부와 지식 속의 고통과 병과 비참함 등이 바로 문명의 불만.
(106) 죄의식의 불합리성이 문명 자체의 불합리성이라면 죄의식은 합리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만일 지배의 파괴가 문화 자체를 파괴한다면 지배의 파괴는 가장 큰 죄가 되고, 그것을 막기 위한 어떠한 효과적인 수단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본능에 관한 프로이트 자신의 이론은 그를 강요해서 더 앞으로 나가게 하였고, 지배를 합리화하는 동력학의 치명적임과 무익함을 전적으로 밝혀내게 하였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반대되는 것인 듯하면서도 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 그런 것을 좀 더 생각]
- 우리의 문명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본능의 억압에 토대하고 있다. - 프로이트
(120) 소외의 세계에서 에로스의 해방은 필연적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원칙의 전반적인 부정,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트리스탄의 신화가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듯이 서구 문명의 위대한 문학이 불행한 사랑만을 예찬하고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신화의 병적인 낭만주의는 엄격한 의미에서 현실주의이다.
- 철학적 간주곡
(134) 죽음의 본능적 가치를 높이는 것은 에로스의 실패이고 삶에서의 충족의 결여이다. 퇴행의 갖가지 형태들은 문명의 불완전함에 대항한, 쾌락보다 노고가 우세하고 만족보다 수행이 우세한 데에 대항한 무의식적인 항의이다.
(135)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이 서양철학의 본류와 만나는 지점 -
서양문명의 과학적 합리성이 그것의 충만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자 서양문명은 그것의 정신적 의미에 관하여 점점 더 많이 의식하게 되었다. 인간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의 합리적 변형을 담담하는 자아는 본질적으로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주체로 나타났고, 그 주체의 사상과 행동은 객체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설계되었다. 그것은 객체에 대립하는 주체였다. 이 선험적으로 적대적인 경험이 행동하는 자아뿐 아니라 생각하는 자아도 규정하였다. 자연은 - 외부세계만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투쟁하고 정복하고 유린해야 할 어떤 것으로 자아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자기보존과 자기발전의 전제조건이었다.
(144) 헤겔 이후에 서양철학의 본류는 고갈되고 만다. 지배의 로고스가 그 체계를 구축하였으니 다음에 오는 것은 발문이다.
(145) 쇼펜하우어가 존재의 본질을 의지라고 규정할 때에, 그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족시켜야 하는, 지칠 줄 모르는 결여와 공격을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그것들은 그것들의 절대적 부정 속에서만 충족될 수 있다. 의지 자체가 끝에 가서는 멈춰야 한다. 그러나 열반의 이념은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종말은 완성이고 만족이다. 열반은 쾌락원칙의 이미지이다.
(152)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그[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은 그것을 로고스로 규정하는 전통적 정의와는 반대로 존재를 에로스로 규정한다. 죽음의 본능이 에로스(존재의 원리)에 대항하여 비존재(존재의 부정)의 원리를 긍정한다. 프로이트의 개념구성의 도처에 존재하는, 두 원리의 융합은 존재와 비존재의 전통 형이상학적 융합에 대응한다.
제2부 현실원칙을 넘어서
(155) 인간의 운명이 인간의 다음 세계가 어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투쟁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는가! 찾아내려는 노력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그는 그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에 대하여 점점 더 모르게 되었다. 그가 알고 있고 살고 있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그에게 선사한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세계가 목사나 신부에 의하면 그가 머리로 생각해 낸 것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태어난 날부터 그는 세상에 안녕이라고 말하도록 충고받고 명령받았다. 아, 우리는 이 멋진 세계를 너무나도 학대해 왔다.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일 수밖에 없다느 것은 슬픈 진실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단순한 오두막, 단순한 옷가지. 단순한 음식물에 백합과 장미, 사과와 배밖에 더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 또는 죽지 않는 인간에게 알맞는 보금자리일 것이다. (숀 오케이시 - 저녁놀과 저녁별)
- 확립된 현실원칙의 역사적 한계
(162) 만일 자유가 더 높은 단계로 진보하는 것이 문명이라면 본능발달의 지배를 점차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은 거의 역사적인 필연성으로까지 진지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164) 만일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가 원래 매우 사소한 것이었다면, 동물적 인간의 역사에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의 차이는 역사과정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이 된다.
- 환상과 유토피아
(171) 이성은 불쾌하지만 유용하고 정확하다. 환상은 유쾌하지만 쓸모없고 진실되지 못한, 단순한 놀이와 백일몽이 된다. 그것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억제되지 않은 욕망과 충족의, 다시 말하면 쾌락원칙의 언어를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172) 근본적이고 독립적인 정신과정으로서의 환상은 자신의 경험에 일치하는 - 즉 적대적인 인간의 현실을 극복하는 자신의 진리가치를 소유한다. 상상력은 개인과 전체, 욕망과 실현, 행복과 이성의 화해를 마음 속에 그린다. 이러한 조화는 기존의 현실원칙에 의해서 유토피아로 추방되었지만, 환상은 그러한 조화가 현실이 되어야 하고, 현실이 될 수 있으며, 환상의 배후에는 지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상이 형식을 갖출 때, 환상이 지각과 이해와 우주 - 주관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인 우주를 창조할 때 상상력의 진리는 비로소 실현된다. 이것은 예술 안에서 일어난다.
(173) 예술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적이고 역사적인 수준에서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 '억압된 자들의 귀환'이다.
(177) 융의 심리학은 그 나름의 이론이 전개됨에 따라서 반계몽적이고 반동적인 경향이 우세하게 되었고, 결국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의 비판적인 통찰을 제거해 버렸다.
(183) 문명이 폭발하여 선사적인 야만상태로 역전될 것인가? 개인은 그 자신의 활동력과 만족의 수단이 소진됨에 따라 소멸할 것인가? 고도한 수준과 광대한 규모로 물질적 * 지적 생산을 촉진해 온 모든 에너지를 결핍과 억압의 부재가 고갈시키고 말 것인가? 프로이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184) 아무리 풍부하다 하더라도 문명은 안정적이고 방법적인 노동, 즉 만족의 불쾌한 지연에 의존한다. 일차적인 본능이 선천적으로 만족의 지연에 반항하기 때문에 일차적 본능의 억압적 수정은 모든 문명의 필수조건이 된다.
(185) 생산성은 여가와 탐닉과 수동성에 대한 비난, 정신과 신체의 심층에 대한 승리, 착취적 이성에 의한 본능의 순치를 의미한다. 능률과 억압이 한데 모인다.
- 오르페우스와 나르키소스(Narcissus)의 이미지
(196) 오르페우스와 나르키소스의 이미지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화해시킨다. 그들은 조종되거나 지배되지 않고 해방된 세계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인간과 자연의 억압되고 응고된 형태에 구속되어 있는 에로스의 힘을 해방하는 자유의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205) 프로메테우스라는 문화적 영웅에 의하여 상징되는 세계에서 오르페우스적이고 나르키소스적인 에로스는 모든 질서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 속에서 오르페우스와 나르키소스는 다른 원칙에 의하여 지배되며 그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새로운 현실을 드러낸다.
- 미학적 차원
(209) 이론이성이 인식의 선험적인 원리를 제공하고, 실천이성이 욕망(의지)의 선험적인 원리를 제공하는 데 비해서 판단력은 고통과 쾌락의 느낌에 의하여 그 둘을 매개한다. 쾌락의 감정과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판단력은 미학적 판단력이며 그것의 적용분야는 예술이다.
(211) 칸트의 철학에서 미학적 차원 - 인간존재의 양극인 감성과 도덕 사이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
(212) 목적없이 목적에 부합함은 아름다움의 구조를 규정하고, 법칙없이 법칙에 부합함은 자유의 구조를 규정(이 두 범주는 진정한 억압없는 질서의 본질을 규정)
(214) 칸트가 볼 때 미학적 차원은 감각과 지성이 만나는 매개체이다. 그 매개는 제3의 정신능력인 상상력(구상력)에 의하여 수행된다. 미학적 차원은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217) 쉴러의 [심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는 미학적 기능의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
(218) 비록 이성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거부한다 할지라도 감성이 진리로 인지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미학은 진리로 생각한다.
(219) 예술의 진리는 이성과의 화해를 통한 감성의 해방이다.
(222) 감성을 이성화하고, 이성을 감성화하여 두 충동을 화해시키는 대신에 문명은 감성을 이성에 예속시켰다.
(225) 놀이충동이 문명의 원칙으로서 한번 실제로 지배권을 획득하면, 놀이충동은 글자 그대로 현실을 변형할 것이다. 객관적인 세계인 자연은 그때에 (원시사회에서와 같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기존의 문명에서와 같이) 인간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것으로서도 아니고, 관조(바라봄)의 대상으로서 경험될 것이다.
(232) 문명화된 도덕은 억압된 본능의 도덕이며, 억압된 본능의 해방은 문명화된 도덕의 저락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차적인 가치의 저락은 그 가치들을 인간 존재와 분리된 상태로부터 인간존재의 유기적 구조로 다시 통합하고, 이러한 재통일은 유기체의 구조 자체를 변형할 것이다.
- 성욕에서 에로스로
(237) 리비도의 확장에 포함되는 퇴행은 우선 모든 성감대의 회복과 성기 전기적(pregenital) 다형 성욕의 소생과 성기 우위의 쇠퇴로 나타날 것이다. 육체 전체가 부착(cathexis)의 대상, 즐겨야 할 것, 쾌락의 도구가 된다. 리비도적인 관계의 가치와 범위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개인적인 상호관계를 조직하는 제도, 특히 일부일처제와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제도를 해체한다.
(239) 매우 탁월한 정식의 하나에서 프로이트는 행복을 '선사적인 소망의 후대적 충족'으로 정의한 적이 있다. 그것이 부가 행복을 초래하지 않는 이유이다. "돈은 유아의 소망이 아니다."
(245) 승화가 언제나 욕망의 부정인 것은 아니다. 승화가 언제나 본능에 대항하는 승화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상을 위한 승화일 수도 있다. 나르키소스는 이미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런 자이다"라고 말한다. (바쉴라르)
(247) 만일 유기체의 정신적인 부분으로부터 신체적인 부분을 적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억압의 역사적인 결과라면, 이러한 적대관계가 극복될 때 정신적인 영역은 충동에 대하여 개방될 것이다. 감성적 이성이라는 미학적인 관념은 그러한 경향을 암시한다. 정신적인 영역이 에로스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고 리비도적인 대상으로 남아있는 한, 감성적 이성은 본질적으로 승화와는 다르다. 활동력에도 목적에도 변화는 없다.
- 에로스와 아가페는 결국 하나이며 같다 - 에로스가 아가페인 것은 아니지만 아가페는 에로스이다 - 는 개념은 2천 년의 신학사를 거치고 난 현재에 와서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248) 정신적인 생식은 신체적인 생식과 마찬가지로 에로스의 작업이며, 국가(제도와 법률)의 올바르고 참된 질서는 사랑의 올바르고 참된 질서처럼 에로스적인 질서이다. 에로스의 문화건설 능력은 억압 없는 승화이다. 성욕은 목적으로부터 굴절되지도 않고 목적을 가두어 넣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목적을 획득하면 본능은 더 완전한 만족을 찾아서 다른 목적들로 초월한다.
(256) 억압 없는 승화가 수행원칙의 제도와는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으며, 이러한 원칙의 부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강조.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 이론이 이러한 모순을 인멸하고, 억압적 생산성을 인간의 자기실현으로 찬양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은 더욱 중요하다.
(259) C. B. Chisholm -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미덕이 되었다. 우리의 먼 조상에서부터 언제나 일의 미덕이 선전되어 왔다. 우리의 어린애들은 그들의 어린애들이 신경증적인 필연성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어린애들을 기를 준비를 해야 한다.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은 신경증의 증상이다. 그것은 절름발이의 목발이다. 그것은 일에 대한 특정한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치 있는 인간으로 느끼려는 시도이다.
- 에로스와 타나토스
- 발문 ; 신프로이트학파의 수정주의 비판
(279) 억제와 억압과 자제가 '자유로운 개성'을 만드는 요소들이라는 사실을 프로이트는 증명. 사회의 '일반적인 불행'이 치료나 정상이란 개념으로 다룰 수 없는 한계임을 그는 인정. 정신분석은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이론.
(281) 정신분석의 우익에서는 칼 융의 심리학이 곧 반계몽주의적인 가짜 신화체계가 되었다.
- 프로이트는 구속과 고통을 전제하고 구속과 고통을 영속시키는, 서양문명의 최고 가치들 속에서 억압의 작업을 알아보았다.
(282) 프로이크가 일차 본능들의 전변에 초점을 맞추어 인류와 개인의 가장 깊이 감추어진 층위에서 사회를 발견한 데 반하여,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적 제도들과 관계들의 기원이 아니라 기성의 물화된 형태를 겨눔으로써 이러한 제도들과 관계들이 그것들을 완성하리라 기대된 개성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285) 프롬은 "정신분석치료의 사회적 조건들"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내었는데, 거기서 그는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석적 상황이 자유주의적 관용의 특수한 표현이고, 그것은 사회에 내재하는 동일한 관용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중립적(비개입적) 분석가의 너그러운 태도 뒤에는 '사회적 금기들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존경'이 숨겨 있다.
(287) 정신분석이론은 개인의 병이 궁극적으로 문명의 병에 의하여 야기되고 지속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반면에 정신분석 치료는 병든 문명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서 병든 문명의 한 부분으로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도록 개인을 치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이 끝나는 현실원칙의 승인은 본능적 욕구들, 특히 성욕에 대한 문명적 편제의 승인을 의미한다.
(290) 수정주의자 - 프로이트는 개인과 그의 신경증이 환경과의 갈등에 의하여 결정되는 범위를 지나치게 경시하였다. 프로이트는 '생물학적 입장'을 따라 개인의 계통발생적*개체발생적 과거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성격이 다섯 살 또는 (늦어도) 여섯 살에 본질적으로 고착된다고 생각하였고, 개인의 운명을 본능과 본능의 변화, 특히 성욕과의 관점으로 해석하였다. 반대로, 수정주의자들은 무게의 중심을 '과거에서 현재로', 생물학적 층위에서 문화적 층위로, 개인의 소질에서 개인의 문화로 옮긴다. 리비도라는 개념을 전적으로 폐기한다면, 그리고 그 대신에 성장과 인간관계의 각도에서 서로 다른 단계들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생물학적 발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96) 정신분석은 개인의 경험 안에 있는 보편적인 것들을 해명한다. 그렇게 하는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정신분석은 인간관계가 돌처럼 응고되는 소외의 세계를 깨뜨릴 수 있다.
(301) 문명이 인간으로 무엇을 만들어 놓았는지를, 문명이 인간을 어떤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를 생각한다면, 개성발달의 차이는 주로 인류공통의 운명인, '나날의 불행'의 균형 없는 몫과 균형 있는 몫의 차이이다. 불행의 균형 있는 분배는 치료가 성취할 수 있는 극한인 것이다.
그러한 '최소계획"에 더하여 그리고 반대하여 프롬과 그 밖의 수정주의자들은 치료의 더 높은 목표, '인간 잠재력의 최적 발달과 그의 개별성의 실현'을 선언한다.
(309) 생물학적 영역, 특히 성욕의 역할에 대한 수정주의적 경시는 무게중심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드에서 자아로 옮길 뿐 아니라 인간 현존재의 아직 승화되지 않는 표현들에서 이미 승화된 표현들로 옮긴다. 본능적 만족의 억압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인간의 실현에 미치는 그것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상실함에 따라 사회적 억압의 깊이도 감소한다.
(312) 프로이트는 성욕 안에서 완전한 쾌락원칙의 전형을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개인적 경험의 아득한 깊이에서 신경증적 불행과 '일반적' 불행의 공통된 뿌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모든 의식적으로 경험되고 관리된 억압의 밑에 있는 일차적이고 '구성적인' 억압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발견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너무나 진지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는 행복을 생산적인 사랑과 기타의 생산적인 활동에 보이는 효율적 승화와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행복의 실현으로 정향된 문명을 파국이라고, 문명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문명 안에서 실행되고 설교되는 거짓과 자유와 거짓된 행복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참된 행복을 분리하는 깊은 심연을 보았다.
(317) 파괴본능은 삶의 본능에 대항하거나 삶의 본능에 봉사하거나 한다. 더욱이 죽음의 본능의 목적은 본래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파괴의 필요를 제거하는 데 있다.
부록[김인환의 글]
1. 수필의 철학
(325) 모든 체계를 자유자재로 참고하지만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반대자로 남아 있는 데에 바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특색이 있다.
(332) 칸트는 인식의 대상이 먼저 직관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되며, 직관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에 받아들여진 현실적 사물은 반드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주어진다고 하여,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였다.
(334) 헤겔은 그의 변증법을 현존재, 즉 규정된 존재의 해명에서 시작
- (335) 현존재란 수많은 관계들의 집합이지만, 현존재에게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현존재의 상태를 규정하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현존재의 본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상태를 본성에 통합하면서, 다시 말하면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본성에 통합하면서 변화한다.
(336) 역사적 현재의 변형에는 비약이 있게 마련이며, 여기서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의 참다운 죽음이다. 역사에는 평탄한 진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것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는 없다. 새로운 것은 어쨌든 낡은 것 안에 있을 것이다.
(339) 역사적 현재의 객관성을 가르고[변] 밝히는[증] 변증법은 파악된 결과가 아니라 파악하는 활동이며, 항상 새롭게 자기를 쇄신하는 집단적 주체의 창조적 활동이다. 변증법은 현재의 구조를 '대립을 포함한 전체', 즉 부정적 총체성으로 파악하는 집단적 주체의 활동인 것이다. 그러나 집단적 주체가 현재의 구조를 대립을 포함한 전체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주체는 다만 역사적 현재의 객관적 전개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집단적 주체는 역사적 현재의 모순을 인식하고, 현재의 구조를 부정적 총체성으로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341) 수필의 정신은 이단의 정신이다.
- 사고의 깊이는 사실 속에 어느 정도로 침잠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확고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추론의 결과로 사실을 얼마나 잘 환원시키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342) "수필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새로운 서양과학과 그 이론의 출발시기에 확립한 네 개의 규칙에 대한 항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도르노)
(344) 현재를 긍정하고 정당화하는 모든 공식에 대항하여 수필은 언제나 새롭게 부정의 이름으로 행복을 표명하는 것이다.
2. 놀이의 본질
(350) 의식의 표현이 노동인 데 비하여 본능, 특히 화합본능의 표현이 놀이다. 현실원칙이 도입되어 현실의 검열로부터 자유롭고 오직 쾌락원칙에만 종속되는 정신활동이 남아 있게 되는데, 실제적인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상상력이 바로 그것이다. 상상력의 표현은 아이들의 놀이에서 시작되어 후에 백일몽으로 계속된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자유로운 충족은 문명사회의 존재와 공존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씌어졌다. 헤겔, 맑스, 프로이트의 사유를 이은 이 책은 심오한 심리학도, 철학도, 인류학도, 신화 해석학도, 문화구조의 사회학도 아니지만 실제로 이 모두를 아우른다. '행복은 문화적 가치가 아니다'는 프로이트의 명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아울러 억압사회와 관련된 프로이트의 비관론이 역사적 문맥 속에서 밝혀지면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본능적인 삶의 대대적인 억압 없이도 문명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정신분석이론과 열려있는 맑스주의와의 통합을 최초로 제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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