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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 조지프

콘래드, 조지프(조셉 콘라드) - 서구인의 눈으로 (2) [89년도에 적은 감상문]

by 길철현 2017. 5. 29.


(89년도 2학기 [현대 영국 소설] 수업을 듣고 적은 감상문 초고, 완성된 부분은 제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하나의 체험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 체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 속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거나 일어날 사건들이 아닌 작가가 창조해 낸 허구의 세계인데도 왜 글을 읽는 독자는 마치 그러한 것들이 실지로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흡사 자기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고민하고 열광하는가? 그것은 작품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이 글을 읽는 독자와 어떠한 식으로던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문학 작품은 갈등을 제시하고 그 갈등의 전개 및 해소를 기본틀로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기본적인 갈등은 라즈모프와 홀딘과의 갈등이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홀딘의 라즈모프에 대한 '그릇된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그릇된 믿음은 홀딘 자신의 불행 뿐만 아니라 그의 믿음의 대상이었던 라즈모프의 불행마저 초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보다도 이 작품에서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은, 작가가 그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 보수적이랄 수 있는 작가의 태도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 이 작가의 그러한 통찰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이다. 소설 속의 이러한 상황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들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구절 한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홀딘이 라즈모프를 찾아간 동기이다. 홀딘은 라즈모프로 보아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그가 라즈모프를 자기 나름대로 규정하고, 그를 믿고서 찾아왔다는 사실은 홀딘의 P 장관의 암살 및 혁명에 의한 개혁이라는 신념이 너무 단순간 사고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게 한다. 실제의 역사는 홀딘의 기대대로 혁명을 몰고와 전제 정치를 무너뜨렸지만 과연 그 혁명이 홀딘이 기대한 세계를 가져왔는지는 한 번 의문을 던져 보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홀딘이 자기 동료 중의 누구에게 찾아가 그에게 자기의 탈출을 부탁했다고 한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전개 양식을 가졌으리라. 또 라즈모프가 완전히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이었다면, 비록 홀딘이 그릇된 생각으로 혹은 어떤 불가피한 사정으로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라즈모프가 이 작품에서처럼 고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라즈모프가 위에 든 두 부류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하튼 홀딘이 라즈모프를 찾아온 사실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둔하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즈모프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그의 배경과 그의 고민의 경로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라즈모프가 처해 있는 상황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독"이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을 정도로 외롭다. 가족도, 친척도, 친한 친구도 없는 오로지 자기 몸뚱아리 하나뿐인 고아이다. 또 시대적인 불안과 긴장 상태에 어느 정도 반응하고 있긴 하지만 학문 연구와 자기 자신의 장래 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선량한 사람이 격렬한 집안 싸움에서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듯이 정신적으로는 이 세상의 시끄러운 일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말로 작가는 라즈모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과연 라즈모프가 중도자적인 입장에 있는지는 의문을 한 번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개인이 사회 속에서 생활해 나간다고 하면 그 사회와 어떠한 형태로든지 연관을 맺지 ㅇ낳을 수 없는데, 라즈모프의 중도자적인 입장이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한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라즈모프가 진정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했다면 그는 홀딘의 도움을 거절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홀딘을 쫓아내지 않은 이유를 자신의 '건전한 본능'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홀딘이 붙잡혔을 때 자신이 입게 될 피해때문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라즈모프가 홀딘의 탈출을 돕기 위해 지미아니치를 찾아가는 것도 자신의 안전이라는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라즈모프를 너무 일방적으로 몰아부치는 것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라즈모프의 행동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으며 (인간이 기대하는 것과 실지는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므로) 또 그의 행동이 전적으로 그러한 본능에 의해서만 취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