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가 영국 문학, 더 나아가 세계 문학의 중요한 소설가 중의 한 명인 반면, 프로이트는 인간의 사상사, 혹은 지성사에 큰 변혁을 가져온 인물이다. 동시대인인 두 사람은(프로이트는 1856년, 콘래드는 1857년에 태어났다) 직접적인 교류는 물론이거니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프로이트가 콘래드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야기도 없으며, 콘래드도 당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던 정신분석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콘래드가 죽기 3년 전인 1921년 한 지인이 그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예를 들면 올메이(Almayer)나 짐(Jim)- 을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해 볼 것을 권유하자, 그는 '오랜 기간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매료되어 있긴 하지만, 단지 이야기꾼인 자신이 [올메이어의 우행]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고 싶은 욕망은 없다(보충 - 콘래드의 첫 작품인 이 소설의 주된 주제 중의 하나는 아버지 올메이어와 그의 딸의 관계의 문제다)'라고 했다. 이 당시 이 지인은 그에게 프로이트의 책 몇 권도 읽으라고 빌려 주었는데, 콘래드는 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Oxford Reader's Companion to Conrad. 295 참조)
프로이트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 세계에서 보다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그가 이 용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마음의 하나의 특징적인 체계'로서의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이드로 대체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크게 보아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원리를 그 이전과는 달리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서, 즉 이원적으로 파악했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때로는 심한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에 초점을 맞추듯, 정신분석 문학 비평에서도 '텍스트의 무의식'에 집중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서 의식적인 의도와는 다른 그 사람의 무의식을 추적하듯, 텍스트에서도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무의식을 추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정당성 여부를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나, 아마도 텍스트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낸 결과물로서의 논리적 타당성이나 설득력이 관건일 것이다.
하지만 자칫 이러한 접근은 문학 텍스트를 이론의 틀 안에 가두는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 또한 크다. 문학 텍스트를 정신분석에 종속되는 하위의 범주로 간주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문학 텍스트와 정신분석이 상호 교류하는 장으로 접근할 때 그러한 위험을 비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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